라스트 폴리스맨 - 자살자들의 도시
벤 H. 윈터스 지음, 곽성혜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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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기까지 6개월이 남은 어느 날, 짝퉁 맥도널드 매장 화장실에서 보험회사 직원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지구의 종말이 확실시 된 상황이라 자살은 도처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이 되어버렸고, 헨리 팔라스 형사를 제외하곤 아무도 맥도널드의 시신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습니다. 비아냥과 조소 속에서도 팔라스 형사는 눈앞의 사건에 매진하고, 연이어 벌어지는 살인사건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을 잃지 않습니다.

 

흔히 봐온 지구 종말에 관한 소설이나 영상물들은 최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 시간을 그다지 넉넉히 주지 않습니다. 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긴박감을 강조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입니다. 반면, ‘라스트 폴리스맨6개월이라는 충분한 시간을 설정함으로써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강조합니다.

약탈과 방화 등 종말을 선고받은 자들의 전형적인 패닉 상태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고, 거리에는 냉소와 비아냥, 무관심과 헛된 희망만이 남아있습니다. 자살은 끔찍한 종말을 회피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수단으로 선호됐고,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시스템들은 천천히 붕괴되는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명백히 자살로 보이는 시신에 홀로 관심을 갖는 이가 팔라스 형사입니다. 그리고 그의 수사 과정은 단순한 범인 찾기스토리뿐만 아니라, 종말을 코앞에 둔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를 함께 보여줍니다. 6개월 후면 쓸모없어질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돈에 혈안이 된 사람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여 남은 시간을 나름 의미 있게 보내려는 사람들, 그동안 억제해온 날들을 보상받기 위해 쾌락과 일탈에 탐닉하는 사람들, 아니면 실없는 농담으로 공포를 이겨내려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읽기 전에는 공포와 혼란이 지배하는 긴박한 공간, 그리고 6개월 후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스피디한 범인 찾기라고 예상했지만, 실제 내용은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말하자면, 종말 6개월 전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그려냈고, 바로 그 점이 라스트 폴리스맨의 가장 돋보이는 미덕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범인 찾기라는 본연의 임무에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종말이라는 설정을 빼놓고 보면 살인사건 자체도 팔라스의 수사도 조금은 맥이 빠진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증거는 모호하고, 추리는 자의적입니다. 팔라스의 카리스마는 빛나지 않고, 종말은 그에게는 남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수사는 대부분이 팔라스의 머릿속에서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적인 착상에 의존하고 있고, “누가 범인일까?”라는 궁금증이나 호기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매 챕터의 마지막 문장에서 제시되는 미끼조차 큰 흥미를 자아내지 못합니다.

더구나 종말 6개월 전이란 설정은 결과적으로는 더 큰 약점의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살인사건 + 지구 종말을 묶었을 때는 사건 자체가 지구 종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거나 범인의 동기와 피살자의 행적 등이 종말로부터 적잖은 영향을 받아야 그럴 듯 해지는데, 정작 이야기는 그 두 가지 아이템을 적절히 믹스하기 보다는 거의 따로국밥처럼 다루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던 설정의 힘에 비해 이런저런 아쉬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지구 종말 77일 전을 배경으로 한 2편을 포함하여 3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라고 하니 이후의 헨리 팔라스의 활약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큰 키와 시크한 성격으로 묘사된 헨리 팔라스가 나머지 시리즈에서는 비슷한 외양을 지닌 해리 홀레에 버금가는 매력과 카리스마를 발휘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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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창비세계문학 16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한정 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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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같은 작가의 미친 사랑을 읽고 난 직후 세설을 이어서 읽을 예정이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열쇠를 먼저 만나게 됐습니다. ‘()’을 소재로 다뤘다고는 하지만, 주인공이 부부이고 나이가 56세와 45세이다 보니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자극적인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예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일기를 통해 가감 없이 자신들의 성 생활을 표현하는 점, 또 그 일기 자체가 다분히 상대방이 훔쳐 읽을 것을 기대하며 쓰인 점 등 파격적인 형식과 캐릭터 덕분에 얼마 안 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무척 독특한 책 읽기가 되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 네 명은 일본이라는 공간과 1950년대라는 시대적 특징을 감안하더라도 요즘의 상식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면모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질투를 성욕의 원동력으로 삼은 나머지 아내의 나체사진 인화까지 질투의 상대에게 맡기는 남편, 고풍스러운 집안에서 자란 탓에 여자가 지켜야 할 의무를 당연히 여기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왕성한 성욕 때문에 이중적인 삶을 살아온 아내, 그런 모친의 음탕함을 대놓고 비난하다가도 자신의 교제상대인 남자와의 불륜을 조장하는 듯한 딸, 존경하는 남자의 아내와 딸을 양손에 거머쥔 파렴치한 같지만 정작 행동은 예의바른 사나이처럼 하는, 남편의 질투 상대인 젊은 남자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부부의 침실 생활에만 맞춰져있고, 그 방법 역시 변태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특이합니다. 작가는 이런 분위기를 위해 상당히 많은 양의 판화로 된 삽화를 함께 실었는데, 그 덕분에 내용이나 형식 모두 극단적이라고 할 지점까지 내달립니다.

 

요즘이야 워낙 극단적인 소재와 이야기들이 넘쳐나서 열쇠같은 작품의 출간이 주목받기 쉽지 않지만, 1950년대 일본에서 연재될 당시 정치권까지 나설 정도로 사회적인 이슈가 됐던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다루는 은 탐미적이라기보다는 파괴적이거나 악마적인 성격이 강한 편입니다. 작품 해설에서 언급된 다니자키의 다른 작품들의 내용을 보면 대체로 일관된 경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들을 살피다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활동 시점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압받는 근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 속에서 남녀의 지위는 을 매개로 역전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발 앞에 굴복하고 이용당하다가 종국엔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니자키는 그런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내세우진 않습니다. “나는 섹슈얼 페미니스트다!”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남자의 을 단순히 동물적인 것으로 격하시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작품 속에서 여자는 신 아니면 완구라고 언급한 점을 보면, 지독한 여성 비하론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도 아니면 모식의 양극단을 치닫는 가치관을 지닌, 이해 불가한 뇌구조라고 할까요?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지만, 읽고 나면 이게 뭐지?”라는 당혹감이 더 강하게 남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선정적인 장면들을 기대한다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일본 문화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상식과는 거리가 먼 다소 기괴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강추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쯤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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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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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해(大渡海)’라는 이름의 꿈의 사전(事典)을 기획한 아라키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정년 이전에 후계자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던 중 영업부에서 근무하던 마지메 미쓰야를 추천받고, 그가 가진 언어에 대한 독특하면서 탁월한 감각을 감지합니다.

대도해(大渡海) 제작진은 교수 출신의 고문인 마쓰모토 선생, 정년 후 외부 스태프로 참여하는 아라키, 그리고 주인공 마지메 외에 철없는 한량 니시오카, 계약사원 사사키, 대도해(大渡海) 제작 13년 차에 합류한 막내 기시베 등입니다. 마지메와 니시오카, 기시베 등이 한 챕터씩 화자가 되어 기획에서 출판까지 15년이 걸린 대도해 제작의 장정을 이야기합니다. 그 속에서 마지메는 편집자로서의 고뇌와 희열, 어른으로의 성장과 연애를 겪습니다. 한때 사전 제작과는 안 맞는다고 툴툴거리던 니시오카는 마지메의 진정성에 감동받고, 계약사원 사사키는 기숙사 사감 같이 무뚝뚝하면서도 늘 편집부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아라키와 마쓰모토 선생은 사전에 대한 열정 하나로 살아온 인생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패션잡지 팀에 있던 막내 기시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전편집부의 열혈멤버가 되어갑니다.

 

배를 엮다는 일본 소설의 강점인 다양한 소재, 다양한 캐릭터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독특하고 신선한 작품입니다. 겐부쇼보 출판사 사전편집부에서 근무하는 주인공들이 대도해라는 이름의 꿈의 사전을 제작하기 위해 보낸 진정성 가득한 15년의 여정이 느리지만 진하고 깊은 맛을 풍기며 그려집니다. 이미 종이 사전이 디지털 사전에게 그 자리를 내준 지 한참이고, 그래서 새삼 한 편의 사전을 제작하는 이야기가 어떤 감흥을 줄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일본 서점대상 수상작이라는 공식적인 타이틀도 믿음직했고, 처음 만나는 작가지만 주변에서 좋은 평을 들었던 미우라 시온에 대한 기대감도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극성이 그리 강하지도 않고, 긴장감이나 반전 같은 강한 양념도 찾아볼 수 없는 차분한 소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온 마음을 다 해서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전편집부라는 다분히 아날로그적인 공간과 그보다 더 아날로그적인 캐릭터들이 내뿜는 힘은 웬만큼 잘 짜인 미스터리보다 더 강한 페이지터너로 작용합니다. 그 중심에는 평범하지만 자신의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진정성이 놓여있습니다.

 

누군가는 뻔하다고, 상투적이라고,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보면 우리는 늘 그런 이야기에 감동받고, 울컥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본능을 스스로 일깨우게 됩니다. ‘배를 엮다는 그런 상투성 위에 이제는 책꽂이에서 먼지받이로 방치된 채 언제 다시 사람 손에 의해 펼쳐질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종이 사전을 얹어놓음으로써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소중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합니다.

좀더 강하고,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것만 찾아 읽느라 무뎌질 대로 무뎌진 오감을 위해 가끔은 배를 엮다같은 꾸밈없고 티 없는 이야기를 읽는 것도 요즘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여름을 지내기에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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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이틀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 들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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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소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로 많은 후배 경찰에게 존경을 받던 카지 소이치로 W현 경찰청 교육과 계장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촉탁살인한 후 자수합니다. 경찰청은 현직 경찰의 범죄라는 파장을 최대한 억누르려 하고, 검찰과 언론은 진상을 파악해내려고 동분서주합니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카지 소이치로가 아내를 살해한 후 자수하기까지 이틀의 공백입니다. 경찰은 카지 본인의 진술대로 자살할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라고 판단하지만, 검찰과 언론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카지와 W현 경찰청을 추궁합니다. 하지만 카지는 사라진 이틀에 대해 함구할 뿐이며, 그러는 사이 경찰-검찰-법원-교도소에 이르는 약 3~4개월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사라진 이틀의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 책의 원제인 半落’(한오치)는 용의자가 범행의 일부만 자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경찰용어입니다. 일본에서 이 용어의 어감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라진 이틀이라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책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요코야마 히데오를 좋아하는 이유는 치밀한 구성, 빈틈없는 스토리, 적절한 반전 등 미스터리의 기초가 탄탄하게 잘 갖춰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를 토대로 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묘사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라진 이틀에는 이야기의 규모에 비해 꽤 많은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한 챕터씩 주인공을 맡아 사건의 흐름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진실 찾기라는 1차적인 역할 외에도 사건의 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거나, 범인의 심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보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하거나, 때로는 자책하고, 때로는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마치 옆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느껴질 만큼 리얼한 존재들입니다. 어렵지도 않고, 장황하지도 않은 문장으로 그 많은 캐릭터들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필력 덕분에 읽는 내내 두근거리다가, 짠해지다가, 분노하다가 결국에는 울컥하게 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됐습니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화두 중 하나는 카지가 자수하기 직전 붓으로 쓴 人間五十年이라는 다섯 글자입니다. “인간 오십년, 천상의 하루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번 생을 얻은 자, 그 누가 멸하지 않으리오.”라는 하이쿠(?) ‘아츠모리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조금 작위적인 면이 보이지만, 등장인물 상당수가 곧 나이 50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주인공 카지 소이치로(49)를 비롯하여 카지를 담당한 W현 강력계 지도관 시키 카즈마사(48), 카지의 진실을 밝히려는 W현 지검 검사 사세 모리오(43), 카지의 변호사 우에무라 마나부(49)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크건 작건 가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결혼 생활 20년을 넘겼고, 자녀들은 한창 반항기를 지나고 있을 무렵입니다. 부모들은 작고했거나, 병환을 앓고 있거나 그 외 여러 가지 트러블의 원인이 될 나이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내 살해범 카지 소이치로를 바라보는 동년배의 형사, 검사, 변호사의 시선은 경찰출입기자 나카오, W현 판사 후지바야시 등 30대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분됩니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50이라는 나이를 한 인간이 넘어야 할 가장 큰 고비처럼 묘사합니다.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과 분노가 동시에 일어나고, 그것이 범죄나 자살로 이어지는, 사춘기보다 수백 배의 폭발력을 지녔다고 봅니다. 더불어, 본문 중에 최근 몇 년간, 살인범 가운데 49살이 가장 많다라는 통계도 제시합니다. 어찌 보면 사라진 이틀은 단순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제 손으로 죽여야 했던 성실한 49살의 현직 경찰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끼리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 또는 자신의 삶과 행적을 돌아보는 참회록의 비중이 더 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전에 대한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한 것과 선명하지 못한 마무리 덕분에 왠지 후속편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그 정도 아쉬움은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면에서,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린 사회소설에 가깝다.”라는 번역자의 후기는 이 작품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올해 들어 가장 많이 읽은 작가가 요코야마 히데오입니다. 진작 읽었어야 할 작품들을 뒤늦게 읽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마치 맛있는 반찬을 아껴놓았다가 마지막에 먹는 기분 좋은 느낌처럼 뒤늦게 몰아 읽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매력은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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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의 섬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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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쿄에 사는 논픽션 작가 카츠라기 시호는 사흘 안에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정리를 부탁해.”라는 말과 함께 시키부에게 집 열쇠를 맡기고 고향으로 떠납니다. 조사 사무소를 운영하는 시키부는 소식이 끊긴 시호의 행방을 수소문 한 끝에 그녀의 고향이 규슈 북서부의 야차도라는 섬임을 알게 됩니다. 야차도는 정통 신사(神社) 체계에 편입되지 못한 채 미신으로 치부된 비운의 흑사(黑祠)가 남아있고, 주민들은 흑사에 모셔진 귀신이 초자연적 힘으로 죄인을 징벌한다고 믿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흑사를 관장하는 지배적 가문이 섬 전체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외지인인 시키부는 철저히 배척 받으며 시호의 행방에 관해 아무 도움도 못 받습니다. 겨우겨우 소소한 정보를 모아갈 무렵, 잔혹하게 살해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경찰에 신고하기는커녕 모든 증거를 없앤 채 진노한 신을 위로해야 한다며 풍경(風磬)과 바람개비를 내다 걸 뿐입니다. 혼란에 빠진 시키부는 섬을 지배하는 진료(神領) 가문을 의심하고, 장남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전통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가문의 아웃사이더들을 통해 섬의 비밀들을 하나씩 알아냅니다. 섬의 어두운 역사가 조금씩 드러나는 가운데, 시키부는 섬 곳곳에서 20년 가까이 적잖은 의문의 살인이 벌어진 사실까지 알아내게 됩니다.

 

제목과 표지에서 느껴지는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가 이야기 전반에 고스란히 배어있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섬이라는 공간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곳이 밀실로 포장되면 오히려 매력을 덜 느끼는 편인데, ‘흑사의 섬은 밀실이면서도 밀실의 분위기를 강요하지 않아서인지 엉뚱한 트릭에 신경 쓰기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읽은 일본 미스터리 가운데 그들의 전통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꽤 있어서 더 이상 낯설거나 어렵게 여기지 않는 편이지만, ‘흑사의 섬은 소재 때문인지 조금은 더 깊이가 느껴진 작품입니다. 다만, 그리 상세히 묘사하지 않았어도 될 내용인데도 신사(神社)와 흑사(黑祠), 또 그들이 모시는 신에 대한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 덕분에 중간쯤에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지거나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지점들이 있긴 합니다.

 

더불어, 분량에 비해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몇몇 가문의 가계도를 그려놓고 읽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인지 서평 속에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을 나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앞뒤 맥락을 다 설명하지 않으면 뜬금없이 들릴 수밖에 없고, 다 설명하려면 그 양도 방대하거니와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꼭 필요한 부분만 정리하면, 섬을 둘러싼 어두운 과거와 현재, 거미줄처럼 얽힌 섬 주민들 간의 관계, 미신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다수와 그것을 편리하게 이용하려는 탐욕스러운 소수, 과거에 벌어진 것과 똑같은 형태로 벌어지는 연쇄 살인 등 페이지를 빠른 속도로 넘기게 만드는 다양한 요소들이 잘 버무려져있는 작품입니다.

 

구도는 단순해 보이지만 디테일에 있어서는 높은 집중력을 요구할 만큼 복잡한 미로나 퍼즐을 닮았습니다. 이런 스타일의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최적의 작품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다룬 미스터리에 이질감을 갖는 독자라면 쉽게 읽힐 작품은 아닙니다.

폐쇄적인 섬에 남아있는 미신숭배 문화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소재지만, 조금만 더 쉽고 간결하게 묘사됐더라면, 그래서 이야기가 오히려 사건 자체에 집중됐더라면 훨씬 더 고급스러운 미스터리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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