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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끝났다
후루타 덴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6월
평점 :
12월 20일 저녁 7시 21분, 도쿄 도에이 지하철 S선 다섯 번째 칸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남자가 칼부림을 일으켜 옆에 앉은 임산부를 찌르는 등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한 것입니다. 범인은 자신을 제지하던 한 노인을 찔러 살해했지만 다음 역에서 출동한 경찰에게 제압당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건 불과 3분 남짓. 범인이 체포되면서 사건은 종료됐지만, 그날 이후 지하철 S선 다섯 번째 칸에 탔던 여러 사람의 일상은 일그러지고 비틀린 끝에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이하고 맙니다.

“사건은 끝났다. 그리고 다시 일상이 시작됐다.” (p12)
이 작품의 제목은 무척 역설적입니다. 사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와 후유증,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스스로 치유하는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옮긴이의 말’ 부제인)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는 작품인데, 작가는 작의를 좀더 강조하고 부각시키기 위해 ‘사건은 끝났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을 묘사한 프롤로그 외에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범인에게 칼을 맞은 끔찍한 기억 때문에 삶이 피폐해지고 만 임산부, 범인 옆에 앉아 있다가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습이 한 유튜버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는 바람에 인간관계도 직장도 잃은 채 은둔형 외톨이가 되고 만 남자, 고교 테니스 에이스였지만 사건 당일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며 발목을 크게 다친 고교생, 범인의 칼에 목숨을 잃은 노인과 인연 혹은 악연으로 엮인 사람들, 그리고 사건과는 전혀 무관했지만 실은 자기도 모르게 여러 피해자들과 운명과도 같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한 남자 등 지하철 S선 다섯 번째 칸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와 후유증을 얻은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그려집니다.
흥미로운 건 꽤 많은 수록작에서 ‘비현실적인 설정’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된 남자, 어느 날 갑자기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 여자, 거울과 유리에 나타나는 환상과 대화하는 남자, 자신이 그린 그림이 움직이는 걸 목격하곤 그림을 포기해야 했던 남자 등 트라우마와 후유증의 산물이라고 하기엔 살짝 과할 정도의 판타지 혹은 괴담 코드가 각 수록작의 주인공들에게 부여됐는데, 지금까지 후루타 덴이 한국에 출간한 세 편의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다른 결의 서사라서 꽤 의외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래선지 첫 두 편의 수록작을 읽을 때만 해도 다소 낯선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낯선 느낌이란 게 큰 사고 한 번 겪지 않고 무난하게 살아온 저의 안일함 때문이란 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환청, 환시, 환각은 지하철 S선 참극의 피해자처럼 지독한 사건에 휘말렸던 사람이라면 실제로 겪고도 남을 만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판타지 혹은 괴담 코드는 일종의 양념으로만 작동할 뿐 ‘사건은 끝났다’ 자체가 그쪽 계열의 작품이란 뜻은 아닙니다.)
피해자들은 갖은 고통과 시련 끝에 트라우마와 후유증을 극복하기도 하고, 더는 나빠지지 않는 선에서 일상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피해자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했던 사건 당일의 미스터리가 풀리면서 감동적인 엔딩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가장 가까이에서 피해자들을 지켜보고 응원해온 가족이나 친구, 혹은 우연한 인연으로 맺어진 낯선 타인이 큰 역할을 하곤 합니다. 연작단편집의 묘미도 잘 살아있어서 일면식조차 없던 각 수록작의 주인공들이 마지막 수록작에서 가슴 뭉클한 방식으로 재회하거나 엮이기도 합니다.
실은 모든 이야기 속에 대단한 반전이나 엄청난 감동 같은 건 없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피해자들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고 험한 여정이 더 인상 깊게 읽혔던 것 같습니다. 후루타 덴의 팬이 아니더라도 ‘사건은 끝났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에 눈길이 끌렸다면 한번쯤 그들의 길고 험한 여정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