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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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한국 독자와 만나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여덟 번째 작품으로(앤솔로지 적색의 수수께끼제외), 일본보다 한국에 먼저 소개됐습니다. 수록작 모두 2004~2017년 사이에 집필된 단편들이지만 대부분 미발표 신작들입니다.

2001‘13계단으로 데뷔한 이래 25년에 걸쳐 단 여덟 편만 출간한 과작(寡作) 작가지만, ‘のカルテ’(2005) 외엔 모두 한국에 소개될 정도로 국내 팬에겐 큰 호응을 얻어온 게 사실입니다.

 

표제작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를 포함하여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네 편이 유령 또는 영혼을 소재로 삼은 미스터리이며, 나머지 두 편은 이중인격을 다룬 서스펜스물과 기억상실을 소재로 한 SF물입니다.

한밤중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특정 장소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의 진실(‘발소리’), 한 여성이 참혹하게 살해된 사찰에서 유령 목격담이 잇따르는 가운데 진범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꿈에서 낯선 남자의 죽음을 지켜본 여자가 그 죽음 이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세 번째 남자’), 1958년을 무대로 깊은 산속에 자리한 유령 산장의 사연과 비밀을 캐는 이야기(‘아마기 산장’) 등 네 편의 유령 미스터리가 차례로 수록돼있고, 이어 건물에 갇힌 채 이중인격자인 무차별 살인범과 마주한 한 아르바이트생의 공포(‘두 개의 총구’), 기억을 잃은 뒤 수상한 기관에 수용된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내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하는 이야기(‘제로’) 등 서스펜스와 SF가 대미를 장식합니다. 개인적으론 앞선 네 편의 유령 미스터리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단편만의 묘미까지 더해져서 더 인상 깊었던 것 같습니다.

 


꽤 오래 전, 초기작인 ‘13계단그레이브 디거로 다카노 가즈아키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그를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새로운 기수로 여겼는데, 그래선지 신인류의 존재를 둘러싼 초대형 SF제노사이드가 그의 특별한 외도일 거라고 멋대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빙의를 소재로 한 ‘KN의 비극’.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연작단편집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를 연이어 읽으면서 어쩌면 다카노 가즈아키의 전공은 따로 있으며 오히려 초기의 사회파 미스터리가 진짜 외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직전에 한국에 소개된 건널목의 유령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그 생각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준 작품들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유령 미스터리는 그저 공포와 재미에만 방점을 찍지 않습니다. 오히려 처연함과 애잔함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게 살아있는 주인공의 활약보다도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유령의 안타까운 사연이기 때문이며, 또한 미스터리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게 바로 유령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살아 있던 이들의 사연과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시선을 드러낸다. 다카노 가즈아키가 천착해 온 인간의 악의와 연민이라는 주제의식을 느낄 수 있다.”는 출판사 소개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듯 한데, 혹시 이 작품을 통해 다카노 가즈아키의 독특한 유령 미스터리 서사에 마음이 끌렸다면 장편인 건널목의 유령을 읽어볼 것을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한국에 최초로 소개됐지만 같은 해 출간된 ‘13계단의 명성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던 유령인명구조대가 유일하게 못 읽은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인데, 기회가 되면 중고로 구해서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팬으로서 가장 아쉬운 건 그가 하라 료 못잖은 과작 작가라는 점입니다. 초기에만 해도 매년 신작을 냈지만, ‘제노사이드’(2011) 이후 건널목의 유령’(2022)이 나올 때까지 무려 11년이 걸렸습니다. 단편집이라 살짝 아쉬웠긴 해도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를 통해 어느 정도 갈증이 해소되긴 했지만, 언제쯤 새 장편 소식이 들려올지 그저 감감할 따름입니다. 오랜만에 사회파 미스터리를 내놓는다면 더없이 반가울 것 같고, 처연하고 애잔한 유령 미스터리라도 두 손 들어 격하게 환영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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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끝났다
후루타 덴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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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일 저녁 721, 도쿄 도에이 지하철 S선 다섯 번째 칸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남자가 칼부림을 일으켜 옆에 앉은 임산부를 찌르는 등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한 것입니다. 범인은 자신을 제지하던 한 노인을 찔러 살해했지만 다음 역에서 출동한 경찰에게 제압당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건 불과 3분 남짓. 범인이 체포되면서 사건은 종료됐지만, 그날 이후 지하철 S선 다섯 번째 칸에 탔던 여러 사람의 일상은 일그러지고 비틀린 끝에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이하고 맙니다.

 


사건은 끝났다. 그리고 다시 일상이 시작됐다.” (p12)

 

이 작품의 제목은 무척 역설적입니다. 사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와 후유증,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스스로 치유하는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옮긴이의 말부제인)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는 작품인데, 작가는 작의를 좀더 강조하고 부각시키기 위해 사건은 끝났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을 묘사한 프롤로그 외에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범인에게 칼을 맞은 끔찍한 기억 때문에 삶이 피폐해지고 만 임산부, 범인 옆에 앉아 있다가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습이 한 유튜버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는 바람에 인간관계도 직장도 잃은 채 은둔형 외톨이가 되고 만 남자, 고교 테니스 에이스였지만 사건 당일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며 발목을 크게 다친 고교생, 범인의 칼에 목숨을 잃은 노인과 인연 혹은 악연으로 엮인 사람들, 그리고 사건과는 전혀 무관했지만 실은 자기도 모르게 여러 피해자들과 운명과도 같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한 남자 등 지하철 S선 다섯 번째 칸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와 후유증을 얻은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그려집니다.

 

흥미로운 건 꽤 많은 수록작에서 비현실적인 설정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된 남자, 어느 날 갑자기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 여자, 거울과 유리에 나타나는 환상과 대화하는 남자, 자신이 그린 그림이 움직이는 걸 목격하곤 그림을 포기해야 했던 남자 등 트라우마와 후유증의 산물이라고 하기엔 살짝 과할 정도의 판타지 혹은 괴담 코드가 각 수록작의 주인공들에게 부여됐는데, 지금까지 후루타 덴이 한국에 출간한 세 편의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다른 결의 서사라서 꽤 의외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래선지 첫 두 편의 수록작을 읽을 때만 해도 다소 낯선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낯선 느낌이란 게 큰 사고 한 번 겪지 않고 무난하게 살아온 저의 안일함 때문이란 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환청, 환시, 환각은 지하철 S선 참극의 피해자처럼 지독한 사건에 휘말렸던 사람이라면 실제로 겪고도 남을 만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판타지 혹은 괴담 코드는 일종의 양념으로만 작동할 뿐 사건은 끝났다자체가 그쪽 계열의 작품이란 뜻은 아닙니다.)

 

피해자들은 갖은 고통과 시련 끝에 트라우마와 후유증을 극복하기도 하고, 더는 나빠지지 않는 선에서 일상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피해자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했던 사건 당일의 미스터리가 풀리면서 감동적인 엔딩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가장 가까이에서 피해자들을 지켜보고 응원해온 가족이나 친구, 혹은 우연한 인연으로 맺어진 낯선 타인이 큰 역할을 하곤 합니다. 연작단편집의 묘미도 잘 살아있어서 일면식조차 없던 각 수록작의 주인공들이 마지막 수록작에서 가슴 뭉클한 방식으로 재회하거나 엮이기도 합니다.

 

실은 모든 이야기 속에 대단한 반전이나 엄청난 감동 같은 건 없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피해자들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고 험한 여정이 더 인상 깊게 읽혔던 것 같습니다. 후루타 덴의 팬이 아니더라도 사건은 끝났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에 눈길이 끌렸다면 한번쯤 그들의 길고 험한 여정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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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와 렌
엘레이나 어커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앤드)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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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의 법의병리학 박사이자 검시관인 렌 멀러는 연이어 발견된 젊은 여성들의 시신을 조사하던 중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임을 확신합니다. 파트너나 다름없는 형사 존 르루 역시 렌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찾지 못해 곤경에 빠집니다. 그러던 중 렌은 범인이 남긴 메시지를 해독해내곤 다음 범행의 윤곽을 예측하기에 이릅니다. 한편 납치한 희생자들을 상대로 루이지애나의 늪지대에서 사냥놀이를 즐기며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제러미는 평소 점찍어 온 여성을 납치하는데 성공하지만 사냥 도중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서 큰 충격에 빠집니다.

 


스릴러 속 여성 법의학자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퍼트리샤 콘웰이 창조한 버지니아 주 법의국장 케이 스카페타와 테스 게리첸이 창조한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입니다. 두 사람 모두 법의학자이자 형사 못잖은 능력을 발휘하며 극강의 사이코패스와 위험천만한 맞대결을 펼치곤 하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렌 멀러 역시 비슷한 캐릭터와 재능을 가진 인물입니다.

렌의 상대인 사이코패스 제러미는 성장과정만 놓고 보면 덱스터를 연상시키지만, 그가 희생자들을 사냥하고 학살하는 방식은 여느 사이코패스보다도 잔인하고 끔찍해서 독자의 속을 수시로 뒤집어놓곤 합니다. 덧붙여 어둡고 음습한 루이지애나의 늪지대를 무대로 한 범행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게 묘사돼서 제러미의 사이코패스 기질을 더욱 서늘하게 만듭니다.

 

340페이지라는 분량답게 이야기 구도는 비교적 단선적입니다. 미스터리 코드는 거의 없는 편이고, 성실하고 유능한 법의학자 렌이 형사 존 르루와의 협업을 통해 가공할 사이코패스 제러미의 정체를 밝히고 추적하는 심플한 스릴러 서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다만 구성의 맛이 독특한 작품인데, 중반부 조금 넘어 시작되는 ‘Part 2’에서 한차례 반전과 함께 렌과 제러미의 대결이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뭐지?”하고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반전의 의미를 깨닫자마자 앞서 읽은 ‘Part 1’에 작가의 계략(?)이 숨어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읽고 검색해보니 이 반전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 적나라하게 공개돼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자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설정이란 생각인데, 왜 이런 셀프 스포일러가 노출된 건지 아쉬울 뿐입니다.)

 

한 번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정도로 속도감도 빠르고 사이코패스 스릴러의 미덕도 갖춘 작품이지만, 기대 대비 만족감은 다소 떨어졌습니다. 무엇보다 법의학자와 사이코패스의 대결이라는 구도에 비해 사건과 캐릭터 모두 소소하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제러미의 사냥과 학살은 잔인하긴 해도 중심사건으로서의 무게감이나 긴장감은 인상적이지 못했습니다. 루이지애나를 떠들썩하게 만들지도 못했고, 경찰의 대응도 고만고만해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러미가 아무리 미쳐 날뛴다 해도 결국 법의학자 렌과 형사 르루만이 관심을 갖는 개인적인 차원의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법의학자이자 형사 역할까지 떠맡은 렌의 캐릭터가 폭발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형사 르루 외에는 딱히 그녀와 접점을 갖는 인물이 없다 보니 법의학자로서 어느 정도 레벨에 있는 건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또 그녀를 방해하거나 적대적으로 대하는 인물조차 없어서 입체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곤 했습니다. 형사로서의 렌 역시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는데, 뒷표지 카피에 실린 폭풍 같은 두뇌 게임이란 문구와 달리 렌의 역할은 정공법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요약하자면 포장에 비해 내실이 부족한 주인공이라고 할까요?

 

미국에선 주인공 렌을 앞세운 후속작 ‘The Butcher Game’2024년에 출간됐습니다. 굿리즈 평점이 전작보다 조금 높게 나온 걸 보면 나름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첫 만남이 좀 아쉽긴 했지만 한국에서도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한번쯤은 더 만나볼 생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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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농성
구시키 리우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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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옛날 분위기가 남아 있는 온천거리 도로코베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어린 소년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경찰은 목격진술을 토대로 악명 높은 15세 불량소년 마세 도마를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뜻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도마가 똘마니게이타로와 함께 경찰을 습격해서 총을 빼앗은 뒤 한 식당에서 인질극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온천거리 아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온 야기라 식당의 젊은 사장 쓰카사는 마침 식당에 와있던 소년, 소녀들과 함께 인질이 된 채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총과 칼로 무장한 도마와 게이타로는 15세답지 않은 잔혹한 성정을 내보이며 경찰에 요구조건을 전달합니다. 자신은 살인범이 아니며, 경찰이 진범을 잡아 방송에 공개하기 전까진 결코 농성을 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잔혹함의 끝을 보여주는 엽기적인 살인과 피도 눈물도 없는 15세 소년이 벌이는 가공할 인질극이라는 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설정이 눈길을 끌었지만, ‘소년 농성은 그런 설정에 대한 선입견을 여지없이 뒤집어버리는 사회파서스펜스 미스터리입니다. 야기라 식당을 무대로 한 전대미문의 인질극이 숨 가쁜 서스펜스를 그려냈다면, 인질극을 종료시키기 위해 진범을 추적하는 경찰의 지난한 분투는 반전을 거듭하는 미스터리를 펼쳐 보이는데, 이 작품의 중심서사이자 서스펜스와 미스터리의 토대는 실은 거소불명 아동(서류상 존재하지 않거나 거주지가 불분명한 아이)과 빈곤 아동의 문제라는 사회적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인질이 된 식당 사장 쓰카사와 그의 절친인 경찰 이쿠야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9~15세에 불과한 인질범과 인질들입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도로코베에 만연해 온 아동 문제의 피해자들입니다. 폭력과 빚에 쫓겨 자식과 함께 도로코베에 몸을 숨긴 여성들은 온천거리의 업소에서 신분을 숨긴 채 일을 하느라 자식들을 방치합니다.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남성들은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아내를 증오하며 역시 자식들을 내팽개칩니다. 그 결과 거리를 배회하게 된 아이들은 때론 어른이나 또래의 사냥감이 되거나 거꾸로 사냥꾼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쓰카사나 이쿠야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올곧게 성장한 경우도 있지만, 인질범 마도와 게이타로처럼 그 반대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것이 (사건이 해결된 뒤 한 댓글에서 무슨 쇼와시대 중기도 아니고, 그딴 동네가 있다는 게 말이 돼?”라는 비난을 받은) 온천거리 도로코베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연 많은 부모가 자식과 함께 야반도주하는 일이 밥 먹듯 벌어지고, 때론 자식만 남겨둔 채 부모가 도망치거나 거꾸로 부모를 버리고 가출하는 자식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도로코베에서 소년, 소녀가 종적을 감추는 일은 그 누구의 이목도 끌지 못합니다. 경찰에 신고하는 부모도 없고, 신고를 진심으로 접수해주는 경찰도 없습니다. 야기라 식당에서 벌어진 인질극은 이런 비극적인 사연들이 오랜 세월 쌓인 끝에 벌어진 예고된 참극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인질범 도마의 요구대로 소년 살해범을 쫓던 수사본부는 사건현장 인근에서 또 다른 어린이 시신들이 발견되자 수사방향을 급선회합니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데, 가출과 잠적과 실종이 빈발했던 도로코베에서 그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지난한 미션이기에 막판에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대목에서 독자는 평범한 반전 이상의 놀라움을 맛보게 되는데, 아무래도 소년, 소녀들이 연루된 끔찍한 사건이다 보니 개운함이나 통쾌함보다는 가슴에 누름돌이 얹힌 듯한 먹먹함에 잠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시키 리우의 전작인 타이거(Tiger)’가 엔터테인먼트 미스터리에 가까웠다면, ‘소년 농성은 인질극과 진범 찾기가 병행되는 서스펜스 미스터리의 묘미에 빈곤과 아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서사의 묵직함까지 함께 만끽할 수 있어서 오랫동안 여운이 남을 것 같은 작품입니다. 덕분에 아직 읽지 못한 구시키 리우의 첫 한국 출간작 사형에 이르는 병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는데, 동시에 다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본에서 왕성하게 펴낸 그의 장단편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진 게 사실입니다. 이제는 신작 소식이 기다려지는 일본작가 목록에 구시키 리우를 올려놓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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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 - 개정판 스토리콜렉터 40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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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전근으로 도쿄에서 나라(奈良)의 나가하시 마을로 이사한 초등학교 4학년 쇼타는 산중턱에 자리한 2층 주택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습니다. 집 뒤편의 웅크린 뱀 모양을 한 도도산()과 그 정상부의 어두운 숲길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자아냈고, 다른 가족들 눈에는 안 보이는 기이한 형체들이 쇼타 앞에 수시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여동생 모모미가 요괴임에 분명한 존재들을 봤다고 말하자 쇼타의 두려움은 극에 달합니다. 최근 3년 동안 여러 가족이 이 주택을 거쳐 간 사실을 알게 된 쇼타는 분명 그들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이 괴현상의 원인이라 여기곤 유일하게 사귄 친구 코헤이와 함께 나가하시 마을에 대해 조사합니다.

 


일본 기준으로 미쓰다 신조의 집 시리즈화가’(禍家,2007) - ‘흉가’(凶宅,2008) - ‘마가’(魔邸,2017) 순으로 출간됐는데, 등장인물이나 스토리에 연관성은 전혀 없지만 어린 주인공이 낯선 곳에 살게 된 뒤 괴이 현상을 겪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할머니와 함께 도교 외곽에 살게 된 코타로가 괴물체를 비롯한 기괴한 일들을 겪는 이야기(‘화가’), 삼촌과 함께 숲속 별장에 살게 된 유마가 숲과 별장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끼다가 끔찍한 일에 휘말리는 이야기(‘마가’)에 이어 흉가역시 이제 10살이 된 쇼타가 도도산() 중턱의 2층 주택에서 도저히 현실의 일이라 믿을 수 없는 괴이 현상을 목격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작품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집 근처의 산과 숲입니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음습한 기운을 발산하는가 하면 카미카쿠시(사람이 갑자기 행방불명되는 일)를 일으켰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의 근원지이기도 한 산과 숲은 호러의 주 무대이자 마치 살아있는 캐릭터처럼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특히 흉가에 등장하는 도도산은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 사관장백사당에도 등장했던 곳으로, 뱀의 기운이 진하게 서려있는 마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선지 사관장백사당을 읽은 독자라면 흉가의 공포를 더욱 농밀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 쇼타의 눈에만 보이는 시커먼 사람의 형체, 여동생 모모미를 찾아오곤 하는 복수의 요괴들, 쇼타의 2층 주택을 제외하곤 제각각의 이유로 공사가 중단된 채 폐허로 남은 주택지, 도도산이 내뿜는 사악한 냉기와 그 일대에 거주하는 수상하고 기괴한 인물들, 그리고 쇼타 가족보다 앞서 2층 주택에 살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금세 떠나고 말았던 한 가족의 비밀 등 흉가는 다양한 호러와 미스터리 코드를 품고 있어서 같은 시리즈인 화가마가에 비해 훨씬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공간과 캐릭터 등 비주얼 요소도 뛰어나서 영상으로 만든다면 무척 매력적인 호러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특히 막판에 사람의 형체를 닮은 그것요괴의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은 어느 정도 예상됐음에도 불구하고 소름 돋는 반전의 맛과 함께 영상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들었습니다.

 

화가의 서평에도 썼지만 집 시리즈는 미쓰다 신조의 다른 호러물에 비하면 단편영화 혹은 단막극 정도의 사이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호러의 농도나 깊이는 여전하지만 주인공이 모두 어린 소년들이다 보니 서사 자체가 어느 정도는 제한됐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무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질 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호러물 한 편을 고른다면 미쓰다 신조의 작품이 제격일 것 같은데, ‘집 시리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흉가화가를 선택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인 만족도로 따지면 흉가’ > ‘화가’ > ‘마가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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