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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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한국 독자와 만나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여덟 번째 작품으로(앤솔로지 적색의 수수께끼제외), 일본보다 한국에 먼저 소개됐습니다. 수록작 모두 2004~2017년 사이에 집필된 단편들이지만 대부분 미발표 신작들입니다.

2001‘13계단으로 데뷔한 이래 25년에 걸쳐 단 여덟 편만 출간한 과작(寡作) 작가지만, ‘のカルテ’(2005) 외엔 모두 한국에 소개될 정도로 국내 팬에겐 큰 호응을 얻어온 게 사실입니다.

 

표제작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를 포함하여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네 편이 유령 또는 영혼을 소재로 삼은 미스터리이며, 나머지 두 편은 이중인격을 다룬 서스펜스물과 기억상실을 소재로 한 SF물입니다.

한밤중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특정 장소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의 진실(‘발소리’), 한 여성이 참혹하게 살해된 사찰에서 유령 목격담이 잇따르는 가운데 진범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꿈에서 낯선 남자의 죽음을 지켜본 여자가 그 죽음 이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세 번째 남자’), 1958년을 무대로 깊은 산속에 자리한 유령 산장의 사연과 비밀을 캐는 이야기(‘아마기 산장’) 등 네 편의 유령 미스터리가 차례로 수록돼있고, 이어 건물에 갇힌 채 이중인격자인 무차별 살인범과 마주한 한 아르바이트생의 공포(‘두 개의 총구’), 기억을 잃은 뒤 수상한 기관에 수용된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내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하는 이야기(‘제로’) 등 서스펜스와 SF가 대미를 장식합니다. 개인적으론 앞선 네 편의 유령 미스터리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단편만의 묘미까지 더해져서 더 인상 깊었던 것 같습니다.

 


꽤 오래 전, 초기작인 ‘13계단그레이브 디거로 다카노 가즈아키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그를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새로운 기수로 여겼는데, 그래선지 신인류의 존재를 둘러싼 초대형 SF제노사이드가 그의 특별한 외도일 거라고 멋대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빙의를 소재로 한 ‘KN의 비극’.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연작단편집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를 연이어 읽으면서 어쩌면 다카노 가즈아키의 전공은 따로 있으며 오히려 초기의 사회파 미스터리가 진짜 외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직전에 한국에 소개된 건널목의 유령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그 생각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준 작품들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유령 미스터리는 그저 공포와 재미에만 방점을 찍지 않습니다. 오히려 처연함과 애잔함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게 살아있는 주인공의 활약보다도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유령의 안타까운 사연이기 때문이며, 또한 미스터리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게 바로 유령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살아 있던 이들의 사연과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시선을 드러낸다. 다카노 가즈아키가 천착해 온 인간의 악의와 연민이라는 주제의식을 느낄 수 있다.”는 출판사 소개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듯 한데, 혹시 이 작품을 통해 다카노 가즈아키의 독특한 유령 미스터리 서사에 마음이 끌렸다면 장편인 건널목의 유령을 읽어볼 것을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한국에 최초로 소개됐지만 같은 해 출간된 ‘13계단의 명성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던 유령인명구조대가 유일하게 못 읽은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인데, 기회가 되면 중고로 구해서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팬으로서 가장 아쉬운 건 그가 하라 료 못잖은 과작 작가라는 점입니다. 초기에만 해도 매년 신작을 냈지만, ‘제노사이드’(2011) 이후 건널목의 유령’(2022)이 나올 때까지 무려 11년이 걸렸습니다. 단편집이라 살짝 아쉬웠긴 해도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를 통해 어느 정도 갈증이 해소되긴 했지만, 언제쯤 새 장편 소식이 들려올지 그저 감감할 따름입니다. 오랜만에 사회파 미스터리를 내놓는다면 더없이 반가울 것 같고, 처연하고 애잔한 유령 미스터리라도 두 손 들어 격하게 환영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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