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섬 - 악마를 잡기위해 지옥의 섬으로 들어가다
나혁진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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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베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강력범죄자를 영원히 격리시키기 위해 필리핀으로부터 임대한 일명 교도섬입니다. 전기 철조망 외엔 제대로 된 수감시설도, 교도관도 없는 탓에 10년 만에 악당들의 섬으로 변질됐습니다. 사이비 종교집단이 섬을 장악했고, 권력과 부의 서열이 만들어졌으며 매춘과 마약이 횡행합니다. 이곳에 엘리트 경찰 출신의 연쇄살인범 장은준이 수감됩니다. ‘악마를 잡기위해 지옥의 섬으로 들어가다라는 부제대로 장은준은 자신의 가족을 붕괴시킨 사이코패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가 수감돼있는 교도섬에 스스로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긴 장은준은 교도섬 선배인 추웅과 이강생의 도움으로 섬에서 벌어진 여러 미스터리를 풀어내며 불가능해 보이던 복수극 미션에 매진합니다.

 

교도섬이라는 독특한 설정과 긴장감 넘치는 액션이 잘 조합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입니다. 사적인 복수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잔인한 연쇄살인범이 되어 교도섬에 수감되기를 자청한 장은준의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장은준을 돕는 전설의 암살자 추웅이나 꾀돌이 이강생도 주연 못잖은 역할을 해냅니다.

이야기는 장은준의 복수극 외에도 교도섬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들을 두루 건드리는데, 필리핀 창녀살인사건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시퀀스나 추웅의 과거 속에 숨어있는 음모를 파헤치는 대목에선 전직 엘리트 경찰로서의 장은준의 뛰어난 능력이 십분 발휘됩니다.

 

홍보카피만 봤을 땐 배틀 로열이나 헝거 게임과 유사한 고립된 곳에서의 추격 액션물이라고 예상했는데 악당들이 세운 그들만의 천국이라는 설정은 이야기를 훨씬 더 풍성하게 만들어냈습니다. 악당들의 영구 격리를 위해 만들어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감시의 손길은커녕 활기찬(?) 자본주의의 천국으로 변질된 교도섬이 구석구석 소개될 때마다 작가의 빛나는 아이디어가 돋보였습니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의 산물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교도섬에는 추리, 무협, 액션, 모험 등 엔터테인먼트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있고, 필리핀 해안의 절경이나 거칠고 위험한 밀림은 물론 식민지 시대의 건물 등 시각적인 재미를 주는 공간들도 다수 등장해서 영상물로 제작될 여지도 충분해보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을 꼽아보자면, 가족을 붕괴시킨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장은준이 한때 본연의 임무를 잊고 즐거운 날들을 보내는 시퀀스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강생과 처음 만난 이후 약 100여 페이지에 걸쳐 장은준은 스스로 즐거운 날들이라고 표현할 만큼 교도섬에 들어온 목적을 망각한 채 추웅, 이강생과 함께 야생의 삶을 만끽합니다. 복수를 펼칠 방법을 찾지 못해 낙심한 채 기회를 엿보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제가 볼 땐 여긴 도대체 왜 온 거야?”라는 반문이 저절로 나올 법한 이상한 장면들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조연들에 관한 것인데, 우선 추웅은 뒤로 갈수록 주인공이 뒤바뀐 건가, 할 정도로 그 역할이 장은준을 넘어섭니다. 장은준이 지능과 액션을 겸비한 슈퍼맨이 아닌 것은 사실적인 설정이었지만, 처음부터 추웅의 도움을 기대라도 한 듯한 모습이나 시간이 갈수록 그에게 의존하는 모습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또한 가족을 잃은 장은준 입장에서 볼 때 연쇄강간을 저질러 교도섬에 수감된 이강생은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쓰레기 중의 쓰레기가 분명한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와 인연을 맺는 모습은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은준의 복수의 대상인 악마의 존재감이 너무 미약했다는 점입니다. 포악한 본능이 하늘을 찌르든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든 엄청난 폭력재능을 지니고 있든 뭐 하나라도 장은준을 위협할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면에서든 기대에 한참 못 미친 게 사실입니다. 또한 악마에 대한 묘사 역시 분량도, 표현의 수위도 너무 미미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지옥의 섬에 들어온 장은준의 의지까지 맥없어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총평하자면, 384페이지라는 적당한 분량에 재미와 몰입감을 갖춘 흥미로운 액션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아쉬움은 있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이 탄생시킨 교도섬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복수를 위해 그곳에 잠입한 매력적인 주인공이라고 생각된 바,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권총 한 번 쏘기 어려운 척박한 대한민국 스릴러의 토양 위에서 신선한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의 필력 역시 후속작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나혁진의 데뷔작 브라더는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연상시킨다는 평을 보니 그가 만들어낸 암흑가에 몰아치는 피비린내가 어떤 모양일지 급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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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
마크 해던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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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의 모든 가족을 위한 아주 특별한 여행담’, ‘일일연속극보다 시끌벅적하고 막장드라마보다 꼬인 가족 8인의 88마일이 펼쳐진다!’ 등 이 작품의 소개글을 보면 언뜻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유쾌한 가족 블랙코미디가 연상되지만, 이 가운데 실제 이 작품을 적확하게 묘사한 건 막장드라마보다 꼬인이라는 표현뿐입니다.

무능한데다 불륜에 빠져있으면서도 아내가 죽기를 바라는 남편, 열등감과 콤플렉스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에 걸린 아내,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안달이 난 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중인 소년, 술과 대마초를 즐기는 도발적인 소녀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가족, 8명의 구성원은 죄다 비밀과 상처,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로 인해 인생 자체가 꼬일대로 꼬인 인물들입니다. 이런 시한폭탄 같은 남녀노소가 웨일스 국경지대에 홀로 뚝 떨어져있는 별장 빨간 집에서 무려 일주일동안 위험천만한 동거에 들어갑니다.

 

안젤라와 리처드는 친남매지만 20년 가까이 연락조차 끊은 채 지내왔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동생 리처드는 누나 안젤라에게 가족여행을 제안했고,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던 안젤라는 남편 도미니크와 세 아이들과 함께 빨간 집으로 향합니다. 리처드와 재혼한 루이자와 의붓딸 멜리사는 불편한 심정으로 여행에 동참합니다.

거의 남이나 다름없는 두 가족의 동거는 예상대로 지뢰밭 그 자체입니다. 안젤라와 리처드의 충돌은 물론, 이미 위험수위에 있던 각 집안 내부의 갈등까지 폭발하여 빨간 집은 24시간 초긴장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구나 하루가 멀다 하고 비밀과 상처, 욕망과 고백의 퍼레이드가 이어지는가 하면,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펀치가 오고가며 8명 사이의 갈등은 임계점을 향해 치닫습니다.

하지만 끝장을 볼 것 같던 갈등들은 뜻밖에도 여기저기서 화해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밀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무능했던 사람은 각오를 새롭게 하고, 거만했던 사람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다짐합니다. 그렇지만 이 화해는 또 다른 대폭발의 전조일 뿐입니다.


 

인물 소개만 봐도 알겠지만 바람직하고 도덕적이며 모두를 아우르는 주인공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빨간 집8명 모두가 주인공이며 골고루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안젤라의 막내인 8살 벤지조차 분량은 좀 적지만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크게 보면 안젤라-리처드 남매의 갈등을 메인으로 두 가족 간의 미묘한 대립을 그리고 있고, 격랑의 복판에 놓인 3명의 10대와 좌절과 분노에 휩싸인 4명의 40대가 때론 세대 간의 갈등을, 때론 같은 또래 간의 충돌을 일으키는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그야말로 가족 내부의 갈등과 가족 간의 충돌을 그리기 위한 모든 진용이 갖춰진 셈입니다.

 

하나같이 유별나고 독특한 인물들이지만 작가는 이들 모두에게 잊고 싶은 과거, 혼란스러운 현재, 갖고 싶은 미래라는 특징을 꼼꼼하게 부여합니다. 당연히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유무형의 폭력과 간섭은 물론 몰이해, 무관심, 이기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무척 많습니다.

17살 알렉스는 무능한 아버지의 멱살을 잡기에 이르고, 16살 데이지는 자신의 고민을 전혀 이해 못하는 엄마에게 등을 돌립니다. 극강의 문제아 16살 멜리사는 알고 보면 소박한 희망사항을 갖고 있는데 누구라도 좋으니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47살의 안젤라는 그저 오롯이 모든 걸 혼자 즐길 수 있는 자유를 꿈꾸고, 그녀의 남편 도미니크는 타고난 게으름과 소통 부족으로 여기저기서 맹공을 당하고 있으며, 안젤라의 남동생 리처드는 재혼 가족인 루이자와 멜리사를 끌어안으려 애쓰고 있고, 루이자는 부모와 오빠와 전 남편에게 받은 학대를 잊고 리처드에게서 안식을 찾으려 합니다. 과연 스치기만 해도 폭발을 일으킬 것만 같은 8명에게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너무 어두침침하고 암울한 이야기인 것처럼 서평을 적었는데, 실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불쾌하거나 찜찜함이 남는 작품은 결코 아닙니다. 중년의 부모들도, 10대 아이들도 빨간 집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은 변화와 성장을 겪습니다. 누군가는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전통적인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누군가는 삶의 태도나 발상의 전환을 이루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오히려 일주일전보다 더 큰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화해를 나눈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조만간 더 큰 전쟁을 예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탓에 제각각의 엔딩을 품은 채 빨간 집을 떠나는 8명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와 씁쓸함이라는 묘한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대한민국 막장드라마가 남의 불행을 지켜보며 고소해하는 시청자의 심리를 자극한다면 웨일스 국경의 빨간 집에서 벌어지는 두 가족의 막장드라마는 훨씬 더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동안 변화와 성장을 겪은 8명의 삶이 앞으로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이어지길 바라게 만들고, 또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담담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긍정적인 미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또는 이미 보냈거나 아직은 행복하다고 자평하는 모든 가족들에게 빨간 집은 위안과 격려, 그리고 충고와 경고를 동시에 전하는 작품이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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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간의 불가사의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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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적 청소년용으로 번역된 ‘X의 비극’, ‘Y의 비극’,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등을 읽은 후론 엘러리 퀸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만난 현대의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에 빠져들다 보니 홈즈, 뤼팽, 푸아로 등 한때 열광했던 고전의 주인공들도 엘러리 퀸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선지 오랜만에 만난 엘러리 퀸은 낯설지만 반가운, 또 새로운 느낌을 전해줬습니다. ‘열흘간의 불가사의라이츠빌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엘러리 퀸이 가상의 소도시 라이츠빌에서 펼친 세 번째 활약을 그리고 있습니다.

 

엘러리 퀸은 10년 전 파리에서 인연을 맺었던 하워드 밴혼의 초대를 받아들여 라이츠빌에 있는 밴혼 가의 대저택을 방문합니다. 하워드의 아버지인 디드릭은 라이츠빌의 산업계를 대표하는 거물이며 60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30년 연하의 샐리와 재혼했습니다.

밴혼 가에서의 첫날밤을 보내며 퀸은 밴혼 가족에게서 까닭모를 불길한 느낌을 받습니다. 더구나 방문 이틀째 만에 퀸은 밴혼 가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이후 연이어 벌어지는 절도와 협박 사건에 말려들어 곤혹스러운 처지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의 불길한 느낌대로 밴혼 가에서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퀸은 흩어져있던 단서들과 밴혼 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해프닝들을 통해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가족과 경찰 앞에서 일련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 과정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괴이하고 정교한 패턴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자리에 있던 관계자들은 물론 미국 전역을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이야기를 좌지우지하는 큰 설정이 비교적 초반에 노출되긴 하지만 그 부분을 서평에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아서 일부러 피했고, 사건의 패턴역시 단어 하나만으로도 너무 많은 암시를 줄 수 있어서 제외시키고 보니 써놓은 줄거리가 참 애매하고 모호할 따름입니다.

 

퀸이 첫날부터 불길한 느낌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밴혼 가의 독특한 인물들 때문입니다. 산업계의 거물이자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내뿜는 아버지 디드릭, 빈민가 출신이지만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으며 30년 연상의 디드릭과 결혼한 샐리, 아버지 디드릭을 숭배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기도 또 벗어나고 싶기도 한 하워드, 밴혼 가의 말썽꾸러기이자 트러블메이커로 하워드의 경멸을 받는 숙부 울퍼트, 그리고 밤이 되면 저택을 돌아다니는 100살에 가까운 기괴한 노파 등 하나같이 어딘가 비틀려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들입니다. 결국 밴흔 가의 비극은 이 비틀린 관계에서 출발했고, 그 종착역은 수많은 인물들의 참혹하거나 안타까운 죽음으로 장식됩니다.

 

퀸이 밝혀낸 사건의 진상과 패턴은 약간 작위적이긴 해도 놀랄 만큼 빈틈없이 짜여있고, 마지막 반전은 왜 엘러리 퀸인가?”라는 우문에 대한 현답을 보여줍니다. 서사의 무게는 단지 오래 전에 출간된 고전이라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단출한 무대와 소규모의 등장인물만으로도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과 갈등을 다채롭고 깊이 있게 다룬 엘러리 퀸의 필력에 기인합니다. 좀 현학적인 문장이긴 하지만 출판사의 소개글 일부를 편집해서 인용하자면,

 

욕망과 애증, 집착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몸부림치다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작중 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한 편의 그리스 비극을 보는 듯한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아쉬운 점들도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띈 점은 퀸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전까지의 조금은 지루한 전개입니다. 인물간의 비밀스러운 관계나 연이어 발생한 절도와 협박사건은 이야기의 도입부로서는 그리 큰 긴장감을 주진 못하는 설정들입니다. 물론 나중에 비극적인 사건을 야기하는 단초나 진실을 입증하는 단서로 활용되긴 하지만, 그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왠지 장르물이 아닌 애증물을 읽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는 이 작품이 라이츠빌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보니 앞선 두 작품(‘재앙의 거리’, ‘폭스가의 살인’)에 관한 언급이 종종 등장하곤 하는데, 딱히 큰 문제는 없지만 퀸의 심리나 갈등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경우가 많았고, 그 분량도 꽤 많이 할애된 탓에 두 작품을 안 읽은 독자에게 당혹감을 느끼게 한 점입니다.

세 번째는 엘러리 퀸이 한방에 모든 것을 끝장내는 신의 경지를 선보인 점입니다. 실제 내용 중에도 엘러리 퀸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에 빗대고 있는데, 이는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이란 뜻으로 그리스극에서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등장시켜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이야기를 결말로 이끌어가는 수법 또는 그 존재를 뜻합니다. ‘번뜩이는 이미지처럼 그냥 떠오른 영감덕분에 퀸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합니다. 물론 이런저런 복선도 깔아놓았고 단서도 흘려놓았기에 논리적인 추론이 가능했던 것이지만, 한방에 사건을 해결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의 퀸의 역할은 분명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엘러리 퀸의 고전미와 만난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현미경을 통해 보듯 풍경이나 인물에 관해 꼼꼼히 설명한 문장들이나 당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인물들에 대한 풍부한 설명은 요즘의 장르물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고전이라고 하면 올드함을 먼저 떠올리는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올드함을 기본에 충실하고 꾀를 부리지 않는 우직함이라고 해석하고 싶고, 그런 면에서 Oldies but Goodies로서 퀸의 매력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열흘간의 불가사의를 좀더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면 라이츠빌 시리즈의 첫 편부터 순서대로 읽을 것과 아주 천천히 정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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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비탈의 식인나무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김소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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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대로 괴담에 가까운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미타라이 기요시의 데뷔작인 점성술 살인사건에 버금가는 끔찍하고 괴이한 사건이 벌어지고, 조사과정에서 40여 년 전 스코틀랜드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벌어졌던 소녀 납치살해 사건과 패전 전후 일본의 어둠 비탈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살인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야기는 광대한 시공간을 오고가며 전개됩니다.

 

어둠 비탈은 가나가와 현 도베 역 인근의 비탈길로 이름 그대로 낮에도 어둑어둑한 기분 나쁜 곳입니다. 낮까지 지배한 그 어둠은 비탈길 위에 자리 잡은 수령 2천년의 거대한 녹나무가 드리운 그림자 때문인데, 이 녹나무는 오래 전부터 저주받은 식인나무라는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줄기 위의 구멍을 통해 사람을 잡아먹고, 그곳을 통해 온갖 비명 소리를 내뿜는다고 합니다. 거대한 혹이 수없이 겹친 듯한 흉한 모습에 사악한 기운으로 가득 찬 괴수(怪樹)인 녹나무는 그 일대가 에도 시절 유명한 처형장이었던 탓에 사람들로부터 피를 빨아먹고 자란 나무라고도 불립니다.

녹나무 일대 빌라와 서양관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온 후지나미 일가에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연이은 죽음이 찾아들면서 미타라이가 개입하게 되고, 어딘가 평범하지 않은 후지나미 가문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거대 녹나무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던 미타라이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칩니다.

 

이번 사건은 논리적인 해석이 가능하긴 하지만 몇 퍼센트는 아무래도 신비적 요소가 남아. 그건 그 녹나무와 어둠 비탈이라는 그 지역의 성격 탓이겠지.”

 

미타라이의 말 그대로 어둠 비탈~’은 광기가 몰고 온 참혹한 비극과 함께 우연이나 전설 등 신비한 요소들을 함께 다룬 작품입니다. 녹나무 일대에서 기이한 형태로 발견되는 사체는 물론 40년 전의 살인자와 현재의 살인자의 범행동기와 수법, 그리고 그 과정에 끼어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막힌 우연 등 후지나미 일가를 덮친 비극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이나 뿌리 깊은 사연 모두 논리와 상식만으로는 입증하기 어려운 괴담의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우선 거대 녹나무에 얽힌 오래되고 끔찍한 식인 전설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녹나무 일대에 살고 있는 후지나미 일가의 비극적인 가족사입니다. 시마다 소지는 안 그래도 섬뜩한 이 두 개의 이야기를 심하다 싶을 정도의 잔인한 묘사와 문장들을 동원해 풀어갑니다. 중간에 삽화처럼 끼어드는 40년 전의 참극과 식인 나무의 희생자들에 대한 묘사에서는 꽤나 소화력이 뛰어난 저도 속이 거북해질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잘 읽힙니다. 6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분량이지만 페이지는 무서운 속도로 넘어갑니다. 거대 녹나무의 괴담과 양념처럼 가미된 잔혹한 이야기들은 흡인력이 강하고 미타라이 특유의 냉소와 뻔뻔함, 전광석화 같은 추리는 무척 재미있게 읽힙니다.

미타라이는 사건의 실체는 조금도 파악하지 못한 채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경찰에 대해 거의 적개심에 가까운 혐오감을 드러내곤 하는데, 그에 따르면 경찰이란 사고 능력은 모기나 개미 수준이고, 어깨에 힘주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유치원 골목대장입니다. 경찰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탐정물에서 이런 장면은 소소한 재미를 주는 설정인데다 미타라이의 독설이 워낙 시니컬한 돌직구라 재미있게 읽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시마다 소지는 동서양의 갖가지 사형 방법에 대해 여러 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소개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천외한 사형 방법들을 최대한 리얼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아무리 봐도 어떻게 하면 더 잔인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라고 단단히 작정하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몰입도도 좋고, 속도감도 좋고,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린 김소영의 번역도 깔끔했고, 특히 등장인물의 캐릭터나 사건은 제 취향에 딱 맞았지만, 결정적으로 어둠 비탈~’에서 아쉬움을 느낀 부분은 상식을 뛰어넘는 미타라이의 천재적인 재능과 조금은 무리한 트릭들이었습니다. 전에 읽은 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에서도 그런 느낌이 강했는데, 미타라이의 추리는 비약이 과한 나머지 나중에 설명을 들어도 왜 그런 결과가 도출됐는지 공감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고, ‘, 그랬나보다하고 슬쩍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그가 밝혀낸 트릭들도 독자를 감탄하게 만들기보다는 만화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비현실성 때문에 맥이 빠지게 만들곤 했습니다.

 

이런저런 장점과 미덕이 있음에도 어둠 비탈~’은 꽤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시마다 소지의 기발한 상상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타라이의 매력에 빠진 독자라면 어둠 비탈~’의 장점과 미덕이 훨씬 더 커 보이겠지만, 리얼리티에 더 비중을 두는 독자라면 후반부의 공허함이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굳이 점수를 나눠서 준다면, 식인 나무와 관련된 잔혹한 괴담에 대해서는 100, 미스터리와 트릭에 대해서는 60, 그래서 평균 80점에 별 세 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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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10 링컨 라임 시리즈 10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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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 콤비의 10번째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4번째 만난 작품입니다.

4~5년 전쯤 코핀 댄서아니면 곤충 소년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실 그때만 해도 링컨 라임의 신체적 핸디캡이 적잖이 당황스럽게 여겨졌습니다.

물론 파트너이자 연인인 아멜리아 색스가 나머지 부분을 꽉 채워주고 있긴 했지만,

주인공 링컨 라임이 현장에서 활약할 수 없다는 점은 치명적인 한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작품씩 읽어나갈수록 그의 뛰어난 추론과 판단력에 감탄하게 됐고,

그동안 좋아했던 현장을 뛰는 주인공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됐습니다.

특히 복잡하고 거대한 사건일수록 미량 증거물을 통해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내는 지점에선

그야말로 화려한 액션에 못잖은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킬 룸은 링컨과 색스의 콤비플레이가 최대치로 발휘된 작품입니다. (신간이다 보니^^)

다만, 작품의 시작과 동시에 링컨은 왼손과 왼팔을 위한 대수술을 앞두고 있는 상태이고,

색스는 고질적인 관절염이 악화되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묘사되어,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부터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데,

(그녀의 액션 장면만 나오면 괜히 제 무릎이 시큰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불편함이 어떻게 해소되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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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평검사 낸스 로렐은 연방기관인 국가정보활동국의 국장 슈리브 메츠거를 체포하기 위해

링컨과 색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녀가 내부 고발자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메츠거는 잘못된 정보와 자의적 판단에 의해 바하마에서 무고한 반미주의자를 살해한 셈인데,

링컨은 사건에 구미가 당기지만, 색스는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리는 듯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링컨과 색스는 바하마의 저격수와 내부 고발자를 찾는데 주력합니다.

내부 고발자를 찾는 과정에서 색스는 수사를 방해할 의도가 명백한 연쇄살인과 맞닥뜨리고,

사건 현장을 찾아 바하마로 과감한 외출을 감행한 링컨 역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하지만 검사 낸스는 정해진 결론을 향해 폭주하듯 자신의 의도대로 수사를 몰아가려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링컨과 색스가 현장에서 찾아낸 증거물은 그야말로 미량에 불과하지만,

그를 바탕으로 바하마의 저격수와 의문의 살인자, 내부 고발자의 단서를 포착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단서들 덕분에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조차 모호해지고,

킬 룸이라는 암호의 의미는 물론 당초 추정했던 사건의 동기나 목적도 불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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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작품들보다 킬 룸은 방대한 스케일을 펼쳐놓습니다.

9.11 테러 이후 반미주의나 테러리즘을 상대하던 연방기관의 월권행위는 물론

워싱턴 정가와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연루된 다분히 정치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목격자와 증인에 대한 잔혹한 연쇄살인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링컨과 색스는 미량증거물공감능력이라는 자신들만의 재능을 통해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를 천천히, 순서대로 풀어나갑니다.

사소한 현장 증거, 흐릿한 사진 한 장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찾는가 하면,

꼼꼼하게 기록해놓은 사건일지의 행간에 숨은 의미를 파악해냅니다.

 

링컨과 색스의 활약도 매력적이지만,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하는 검사 낸스 로렐과

정체불명의 살인자 제이컵 스완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높이는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뭔가 숨겨진 의도를 갖고 수사에 임하는 태도 덕분에 낸스는 번번이 색스와 충돌합니다.

자신이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이려는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태도는 물론

위험한 반미주의자를 척결하려는 자국의 연방기관 수장을 체포하려는 목적도 의심스럽습니다.

정체불명의 살인자 제이컵 스완은 초반부터 뛰어난 요리 실력과 잔혹한 고문법을 선보이는데

링컨과 색스, 낸스를 노리는 그의 행보는 마지막까지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이 작품의 압권은 후반부에 연이어 터지는 반전에 있습니다.

역자의 말을 보면, 제프리 디버는 이야기를 뒤집는 것을 제외하고도

결말에만 반전을 최소한 3개 만들어 놓는다고 하는데,

킬 룸의 반전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연타로 터집니다.

당연하다고 여기게 만들어놓곤 여지없이 뒤집어버리는 제프리 디버의 반전은

그 어느 것도 함부로 예단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마음 깊이 각인시켜줍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후반부의 화려하고 정신없는 반전에 비해

중반부까지의 전개가 조금은 나이브하게 진행된 점인데,

초기의 작품들에 비해 자연스러움 흐름으로 인해 편해진 감이 있습니다.”라는

어느 분의 서평에 100% 공감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비슷한 형태로 반복된 사건들, 조금은 장황한 설명들, 자연스럽고 편하게 보이는 전개 덕분에

중반부까지는 책을 손에서 뗄 수 없는긴장감은 상대적으로 덜 느끼게 됐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링컨은 대수술을 앞두고 있고, 색스의 관절염은 위험수준에 이른 상태인데,

제프리 디버는 이들의 엔딩조차 반전을 선사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곧 출간될 스킨 컬렉터에서 두 사람이 어떤 컨디션으로 활약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아직 링컨 시리즈의 첫 작품인 본 컬렉터를 읽지 못했는데,

그 쌍둥이 제목의 신간이 나온다고 하니, 그 전에 얼른 마스터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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