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르르르 - 제3-4 ZA 문학 공모전 수상 작품집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8
김민수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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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든 문학이든 좀비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3~4ZA 문학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모아놓은 크르르르에 실린 다섯 편의 중단편을 읽어보곤 좀비 이야기가 이렇게 확장될 수도 있구나, 라는 감탄과 함께 그동안 갖고 있던 편견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었습니다. ‘크르르르는 첫 수록작 엘리베이터 액션에서 좀비들의 신음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로 좀비 이야기 다섯 편을 전부 아우를 수 있는 독특한 제목입니다.

 

좀비가 점령한 대형마트에 잠입했다가 엘리베이터에 갇힌 뒤 목숨을 건 한판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엘리베이터 액션), 비를 두려워하는 좀비와 대결하면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장마), 세상이 뒤바뀌어 이제는 오히려 인간사냥꾼의 타깃이 된 좀비와 고가의 변종 좀비를 사냥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남자들의 치열한 대결(여름 좀비), 좀비의 습격으로 놀이공원 대관람차에 갇힌 일가족이 그간 쌓여온 갈등을 폭발시키면서 벌어지는 코미디 같은 비극(해피랜드), 좀비가 되어 가족까지 해쳤던 남자가 어느 순간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오며 좀비 무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좀비, 눈뜨다) 등 다섯 편의 작품 모두 기발하고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좀비 이야기에 취향이 아닌 독자들도 쉽게 빠져들 만한 소재와 스토리, 결말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구성과 전개, 정말 좀비의 세상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현실감 있는 캐릭터 등 웰메이드 장르물의 미덕을 모두 갖춘 작품들이라 좀비를 소재로 한 영상물이 득세하고 있는 미국에서라면 원작으로 탐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여름 좀비좀비, 눈뜨다는 그런 면에서 강점을 가진 작품입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가장 많은 분량의 중편 장마가 비슷한 상황들의 반복과 조금은 헐거워 보이는 미스터리 구조 때문에 지루하게 읽혔다는 점 정도입니다.

 

외국 괴물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마니아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좀비지만 이만한 개성과 상상력, 그리고 확장성을 이어갈 수 있다면 언젠가는 주류 장르물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약간의 불편함과 거북함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좀비 장르에 대한 편견을 지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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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탄생 진구 시리즈 3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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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현호의 유산을 놓고 세 자매가 말 그대로 콩가루 전쟁을 벌입니다. 그런데 상속자 중 하나인 막내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유산상속전은 장녀+차녀+맏사위 막내 사위 젊은 새어머니3파전의 양상으로 진행됩니다. 아내를 잃은 막내 사위가 진구를 영입하며 선전포고를 날리자 장녀 팀은 고진 변호사를 끌어들여 맞불을 놓았고, 급기야는 서로에게 막내를 살해한 혐의를 씌워 상속권을 빼앗으려 합니다. 이 와중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젊은 새어머니에 대한 협공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고진과 진구는 경쟁하는 듯, 협조하는 듯 남씨 집안의 비밀을 캐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불륜, 간통, 출생의 비밀, 낙태, 살인 등 갖가지 추악한 막장들을 발견합니다.

 


유산상속전과 살인사건 미스터리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도진기의 명품 캐릭터인 고진과 진구가 맞대결을 벌인다는 점 때문에 그들이 등장했던 그 어떤 작품보다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실제 법정에는 나가지 않으면서 어두운 뒷골목의 사건들을 해결하는 변호사 고진과 포커페이스에 냉정함까지 갖췄지만 어딘가 우수 어린 느낌을 주는 탐정 진구. 각자가 주인공을 맡은 시리즈를 통해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두 인물의 정면대결은 도진기의 팬들에겐 더없이 흥분을 자아내는 선물임에 분명합니다.

 

유산상속전에 뛰어든 남씨 가족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만 있다면 굳이 행복해질 필요 있어?”라는 극단적인 가치관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눈먼 돈을 위해 진흙탕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탐욕으로 치장한 거짓말쟁이들 같아서 유산상속전에서 누가 이겨도 독자 입장에선 찜찜한 결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안 그래도 인간 말종 같은 의뢰인들에게 고용된 것도 당혹스러운데 고진과 진구를 승자와 패자로 갈라야 한다는 것도 왠지 불편해 보입니다. 독자는 이런 난감한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결론이 날지 너무나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상속전의 승패를 결정할 막내의 죽음의 진상 역시 만만찮은 트릭으로 포장돼있습니다. 정말 사고인지, 계획된 살인인지 작가는 끝까지 독자의 판단을 오락가락하게 만들면서 마치 유쾌한 쇼를 연출하듯 고진과 진구의 추리 대결을 풀어놓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아이러니 또는 역설입니다. 우선 콩가루 집안의 유산상속전을 다루면서 가족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붙인 점이 그렇고, 승부는 결정됐지만 누구도 이겼거나 졌다고 할 수 없는,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면서 악()이 응징되는 엔딩 역시 역설 그 자체입니다. 결국 누가 이겨도 찜찜할 것 같던 유산상속전은 속이 시원할 정도로 해결되고, 고진과 진구의 대결 역시 제대로 된 맞수란 이런 것을 보여주며 유쾌하게 마무리됩니다. 동시에 이들의 다음 승부를 예고하는 작가의 대형 떡밥도 투척됩니다.

 

출판사에서는 진구 시리즈(‘순서의 문제’ - ‘나를 아는 남자’ - ‘가족의 탄생’)를 순서에 무관하게 읽어도 괜찮다고 설명했고 실제로도 큰 무리 없이 읽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곳곳에 달린 (앞선 작품들을 참조하라는 의미의) 각주를 보면 아무래도 가족의 탄생의 참맛은 전작들을 읽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한 가지 놀라웠던 건 이 작품이 지난 해(2014) 여름에 출간된 유다의 별이후 집필됐다는 사실인데, 물론 미리 준비는 했겠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이만한 작품을 탈고했다는 점이나 진구의 과거를 다룬 작품이 이미 집필이 끝났다는 작가 후기를 읽어 보니 도진기의 왕성한 집필력에 그야말로 입이 벌어질 따름입니다.

다만, 너무 집필에 속도를 낸 탓인지, 아니면 출판사가 출간을 서두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의 탄생에는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오타가 많습니다. 심지어 인물의 이름을 뒤바꿔 쓴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내용만 놓고 보면 별 5개 이상도 충분한 작품이지만, 오타의 문제는 옥의 티라고 하기엔 무척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번역서도 아니고, 초짜 출판사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가족의 탄생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이 작품의 메인 줄거리와는 무관한 내용인데, 말하자면 고진과 진구가 또 다시 얽히게 될 작품에 관한 예고편입니다. 특히 그 상대가 정신자살이후 고진의 평생의 숙적으로 설정된 이탁오 박사이고, 그와의 대결에 진구가 연루됐다는 점을 암시하면서 독자의 기대감을 도발합니다. 다음에 출간될 도진기의 작품이 진구의 과거사 이야기가 될지, ‘고진-진구 연합군 이탁오 박사의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떤 작품이든 출간이 기다려지고 그 내용이 궁금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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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 아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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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이블 아이를 포함하여 4편의 중단편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자상하기 이를 데 없는 수십 년 연상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의 네 번째 아내가 됐지만, 악마처럼 변해버린 남자에게 예속된 채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사는 여자(‘이블 아이’) 외에, 스토킹, 존속살해, 소아성추행을 소재삼아 부부, 연인, 부모-자식, 친족 등 가까운 관계에서 파생된 공포와 비극을 묘사한 작품들이 실려 있습니다.

 

장르로 따지면 공포나 호러로 분류되겠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공포나 호러와는 조금 다른 색깔을 지닌 작품인데, 대놓고 무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뒤늦게 천천히 젖어드는 무서움에 가까운, 그런 독특한 느낌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잘못된 사랑이 이끌어내는 공포”, “트라우마를 안은 채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과 애정으로 얽힌 관계가 상처를 주고 공포를 자아내는 관계로 변질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와 후유증을 남긴다는 서사는 네 편의 수록작을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이며, 독자에겐 뒤늦게 천천히 젖어드는 무서움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표지 뒷면의 사랑과 관계의 왜곡, 그것이 불러오는 파멸에 대한 이야기라는 카피나 조이스 캐롤 오츠가 그린 사랑은 단순히 엇나가는 게 아니라 폭발하고 독을 옮기고 고문하고 죽인다.”는 외국의 한줄 평은 이 작품이 그린 가까운 관계에서 파생된 비극을 잘 요약한 문장들입니다.

 

작가는 네 수록작 모두 공포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사람들을 여자로 설정했는데, 소위 가까운 관계라는 것이 대부분 권위적인 남성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역시 의도된 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책 소개글은 네 수록작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공통점을 잘 정리해놓았습니다.

 

여자들은 '이블 아이(악마의 눈)' 같은 존재의 남자에게 위로를 찾고 영혼을 기댄다. 그러나 강한 남자들은 약한 여자들을 지배하고 위협하고, 이내 여자들은 겁먹고 무기력해진다. 그러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예속을 원한다. 그들은 가해자와 피해자일까, 아니면 악의 공범자일까.”

 

사실, 설정이나 캐릭터만 놓고 보면 새롭거나 파격적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소재나 이야기도 익숙하고 예측 가능하며, 반전보다는 묵직하되 정직한 전개가 눈에 띄는데, 그래서인지 브람스토커 상을 2(1996좀비’, 2011악몽’)나 수상한 작가에 대한 기대가 욕심만큼 충족되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쉽고 평이한 문장에 담긴 현실적인 공포와 인간 내면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 덕분에 처음 만난 대작가의 필력을 미량이나마 맛볼 수 있었습니다.

 

총평하자면, 제대로 된 공포를 기대한 독자에겐 좀 심심한 여운을 남길 수 있고, 저처럼 작가의 명성을 기대하며 첫 만남을 가진 독자에겐 물음표와 함께 어중간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독자들로부터 극단적인 평을 받긴 했지만 그녀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좀비를 먼저 읽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블 아이로 맛보기를 끝냈으니, 머잖아 메인 요리인 좀비를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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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럼 다이어리
에마 치체스터 클락 지음, 이정지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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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하는 말 다 알아듣는 것 같아.”

 

반려동물과 함께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표정이나 목소리의 톤에 따라 반응하는 걸 수도 있지만, 안 보이는 데서 흉이라도 보고 있으면 느릿느릿 다가와 원망어린 표정을 짓기도 하고, 예쁘다며 칭찬하고 있으면 얼른 와서 꼬리를 흔들기도 합니다. 더구나 눈빛은 또 얼마나 다양한지, 배가 고플 때나 산책 가고 싶을 때, 아무 것도 하기 싫어 마냥 늘어지고 싶을 때 등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이라면 금세 눈치 챌 수 있는 자신만의 소통법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잭 러셀과 푸들이 섞인 휘핏의 잡종인 후셀이라는 복잡한 족보를 가진 플럼은 에마와 루퍼트 부부와 함께 런던에 사는 사랑스러운 반려견입니다. 유독 물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하고, 막대기 잡기 놀이를 좋아하는가 하면 여우 똥냄새를 좋아하는 특별한 기호도 갖고 있습니다. 나름 터프한 이미지를 좋아해서 에마가 기껏 미용실에 데려갔다 온 다음날이면 어떻게든 헤어스타일을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반골기질도 지니고 있습니다.

 

플럼 본인이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1년간의 일기에는 반려견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물론 스코틀랜드, 프랑스를 여행한 유람기도 담겨있고, 사람이나 친구들과 나눈 우정, 사랑, 질투 등 다양한 에피소드도 들어있습니다. 플럼의 능청스런 수다와 따스한 느낌의 그림으로 채워진 페이지들을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플럼과 진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읽는 도중 괜히 베란다에서 볕을 쬐던 반려견 아지(시추, 43개월)를 불러 앉혀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며 희죽희죽 웃다가 식구들의 눈길을 사기도 했습니다.

 


영국과 우리의 반려견 문화 사이엔 분명 차이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런 작품이 출판된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고, 아무리 픽션이고 만화라 하더라도 플럼을 한 식구처럼 대하는, 말 그대로 반려견으로 아끼고 챙겨주는 에마 부부의 애정이 작고 귀여운 애완견에 집착하는 우리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서 이것저것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지난주쯤, MBC에서 방송된 유기견 관련 프로그램에서 작고 귀여워서 분양받았다가 덩치가 커지자 내다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리포트를 봤습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왠지 우리의 반려견 문화는 이기심의 산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때맞춰 읽은 플럼 다이어리는 늘 함께 살면서도 가족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애완견처럼 대했던 귀여운 아지를 새삼 다른 눈으로 보게 해줬습니다. 얼마 전 읽은 일본 작가의 콩고양이를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강아지든 고양이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폭증하고 있다지만, ‘플럼 다이어리같은 작품이 한국시장에서 선전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운 좋게 읽은 이 작품이 카페나 블로그 등을 통해 입소문이 나서 반려견과 함께 사는 분들에게 호응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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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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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에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잠시나마 주저했던 게 사실인데, 하나는 일본 미스터리 작품치곤 꽤 방대한 분량(688페이지)이란 점입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몇 년 전에 읽은 가노 료이치의 제물의 야회656페이지였습니다. 또 하나는 제목을 보는 순간 윌리엄 아이리시의 작품이 황금가지에서 다시 나온 건가, 오해했던 점입니다. 물론 그 오해는 금세 풀렸지만, 초반에 여주인공 고바야시 료코가 사라지는 대목을 읽다보니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이 연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환상의 여자역시 그녀는 과연 누구인가?”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5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옛 연인 고바야시 료코가 다음날 무참히 살해되자 변호사 스모토 세이지는 모든 일을 중지하고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친인척을 찾기 위해 그녀의 고향까지 찾아갔던 스모토는 뜻밖의 상황에 처하면서 그가 알고 있던 료코가 진짜 료코인가?”라는 당혹감에 빠집니다. 또한 그녀가 살해된 현장을 조사하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는가 하면,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폭력단이 연루된 사실까지 알게 됩니다.

흥신소장 기요노, 호스티스 사요코와 함께 갖은 위험을 무릅쓴 스모토의 조사는 결국 10여 년 전 그녀의 고향에서 벌어졌던 두 건의 살인사건에 닿게 되고, 거기에서 스모토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야차처럼 날뛰었던 악당들의 실체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쉽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스모토 일행은 오히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단지 그녀를 위해서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집요하게 자료를 모으고 사람들을 만나보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스모토가 손에 쥔 진실은 참담하고 가슴 아픈 료코의 과거사일 뿐입니다.

 


심플한 구조의 이야기지만 작가는 캐면 캘수록 끝없이 딸려 나오는 고구마 줄기처럼 고바야시 료코의 과거를 복잡다단하게 설정함으로써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채웠습니다. 그래선지 어느 시점인가부터는 인물과 지역과 사건을 메모하면서 읽게 됐는데, 30여 년 동안 일본 전역을 전전했던 료코의 삶을 촘촘하고 빈틈없이 구성한 작가의 필력에 여러 번 놀라곤 했습니다. 사건에만 집중했다면 아마 4~500페이지 내외에서 마무리 될 수 있었겠지만, 작가는 스모토와 료코 두 남녀의 고통스런 가족사와 심리 묘사에 적잖은 분량을 할애함으로써 단순한 사건해결 미스터리를 넘어 한 편의 묵직한 비극을 완성했습니다.

 

변호사 스모토의 인생은 한시도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오직(汚職)으로 공무원에서 퇴출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 ‘정의란 그저 비즈니스라는 원칙으로 살아온 삐딱이 같은 변호사로서의 삶, 권력형 로펌의 수장을 장인으로 뒀지만 불륜으로 인해 파탄에 이른 결혼 생활 등... 그런 스모토 앞에 나타난 작은 스낵바의 종업원 료코는 한줄기 빛 같은 존재였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내보일 수 있었고, 언제든 위로받을 수 있는 안락한 도피처였으며, 죄책감이나 수치심 없이 몸을 섞을 수 있는 파트너였습니다.

 

료코의 가족사와 과거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하지 않겠지만, “기구하다라는 표현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캐릭터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모토에게 있어 료코가 인생에서 처음 만난 해방구 같은 존재였다면, 료코에게 있어 스모토는 과거를 잊게 해줄 마지막 남자이길 바랐던 상대였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를 스모토의 곁에서 떼어낸 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캐릭터는 단단하고, 서사는 빈틈없으며, 사건은 반전을 거듭하며 진실을 토해냅니다. 장점과 미덕이 많은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역시 그만큼의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두 가지만 얘기하자면, 하나는 분량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미스터리의 해법입니다.

다 읽고 돌아보면 그리 많은 분량을 할애할 이유가 없었던 에피소드가 여럿 생각나는데, 그런 부분들을 정리했다면 500페이지 내외에서 충분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사건의 규모나 막판에 밝혀진 진실의 실상을 감안하면 역시 688페이지는 좀 과해 보였습니다.

 

미스터리의 해법이 아쉬웠던 이유는 후반에 이르러 독자들이 따라잡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스모토의 추리가 폭주하기 때문입니다. 한 장의 사진을 통해, 한 줄의 진술을 통해 진상을 알 것 같다.”는 모습이 종종 나오는데, 충분한 단서나 개연성이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실을 설명하는 스모토의 추리는 몇 번을 되읽어도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했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홀로 앞서갑니다. 특히 결정적인 반전에 관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런 폭주 추리는 엔딩에서 만끽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상당 부분 감소시킨 것이 사실입니다.

 

좀더 슬림했으면, 좀더 친절한 엔딩이었으면, 하는 두 가지 아쉬움 외에는 제물의 야회이후 대체로 만족스러운 가노 료이치와의 재회였습니다. 한국에는 이 두 편밖에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 다양한 작풍의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세계를 넓히고 있다.”는 소개글이 있긴 하지만, 그의 주 무기인 하드보일드 풍의 작품이 좀더 많이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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