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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 아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표제작 ‘이블 아이’를 포함하여 4편의 중단편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자상하기 이를 데 없는 수십 년 연상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의 네 번째 아내가 됐지만, 악마처럼 변해버린 남자에게 예속된 채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사는 여자(‘이블 아이’) 외에, 스토킹, 존속살해, 소아성추행을 소재삼아 부부, 연인, 부모-자식, 친족 등 가까운 관계에서 파생된 공포와 비극을 묘사한 작품들이 실려 있습니다.
장르로 따지면 공포나 호러로 분류되겠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공포나 호러와는 조금 다른 색깔을 지닌 작품인데, 대놓고 무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뒤늦게 천천히 젖어드는 무서움에 가까운, 그런 독특한 느낌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잘못된 사랑이 이끌어내는 공포”, “트라우마를 안은 채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과 애정으로 얽힌 관계가 상처를 주고 공포를 자아내는 관계로 변질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와 후유증을 남긴다는 서사는 네 편의 수록작을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이며, 독자에겐 ‘뒤늦게 천천히 젖어드는 무서움’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표지 뒷면의 ‘사랑과 관계의 왜곡, 그것이 불러오는 파멸에 대한 이야기’라는 카피나 “조이스 캐롤 오츠가 그린 사랑은 단순히 엇나가는 게 아니라 폭발하고 독을 옮기고 고문하고 죽인다.”는 외국의 한줄 평은 이 작품이 그린 ‘가까운 관계에서 파생된 비극’을 잘 요약한 문장들입니다.
작가는 네 수록작 모두 공포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사람들을 ‘여자’로 설정했는데, 소위 ‘가까운 관계’라는 것이 대부분 권위적인 남성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역시 의도된 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책 소개글은 네 수록작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공통점을 잘 정리해놓았습니다.
“여자들은 '이블 아이(악마의 눈)' 같은 존재의 남자에게 위로를 찾고 영혼을 기댄다. 그러나 강한 남자들은 약한 여자들을 지배하고 위협하고, 이내 여자들은 겁먹고 무기력해진다. 그러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예속을 원한다. 그들은 가해자와 피해자일까, 아니면 악의 공범자일까.”
사실, 설정이나 캐릭터만 놓고 보면 새롭거나 파격적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소재나 이야기도 익숙하고 예측 가능하며, 반전보다는 묵직하되 정직한 전개가 눈에 띄는데, 그래서인지 브람스토커 상을 2회(1996년 ‘좀비’, 2011년 ‘악몽’)나 수상한 작가에 대한 기대가 욕심만큼 충족되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쉽고 평이한 문장에 담긴 현실적인 공포와 인간 내면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 덕분에 처음 만난 대작가의 필력을 미량이나마 맛볼 수 있었습니다.
총평하자면, 제대로 된 공포를 기대한 독자에겐 좀 심심한 여운을 남길 수 있고, 저처럼 작가의 명성을 기대하며 첫 만남을 가진 독자에겐 물음표와 함께 어중간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독자들로부터 극단적인 평을 받긴 했지만 그녀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좀비’를 먼저 읽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블 아이’로 맛보기를 끝냈으니, 머잖아 메인 요리인 ‘좀비’를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