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불임에 따른 우울증과 폭음으로 알코올중독이 된 채 남편에게 버림받은 레이첼은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매일 기차를 타고 이미 해고된 직장으로 거짓 출퇴근을 합니다.

창밖으로는 전 남편 톰과 새 아내 애나가 살고 있는 자신의 옛집이 보이는가 하면,

늘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 찬 이웃집의 메건과 스콧 부부도 보입니다.

어느 날 메건이 낯선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곤 레이첼은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녀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알려야 된다는 강박에 빠집니다.

하지만 경찰도, 메건의 남편 스콧도 알코올중독에 빠진 레이첼의 진술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건 발생 당시 인근에서 피투성이가 된 레이첼을 봤다는 증언이 나오고,

필름이 끊긴 레이첼이 그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자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에 이릅니다.

기차 안에서 목격했던 메건 곁의 낯선 남자는 누구인지?

만취한 채 누군가에게 폭행당한 것 같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날 밤의 진실은 무엇인지?

혹시 자신이 메건의 실종에 관여된 것은 아닌지?

레이첼은 끝없이 자문하지만 알코올에 의해 사라진 기억은 전혀 되돌아올 줄 모릅니다.

 

● ● ●

 

이야기는 세 여자 레이첼, 메건, 애나가 번갈아가며 화자를 맡으며 전개됩니다.

시제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세 명의 와 그녀들의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구성은

독창적이면서도 궁금증과 긴장감을 동시에 증폭시키는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이야기는 실종사건의 진실을 찾는 미스터리의 구도를 갖췄지만

세 여자의 집착, 욕망, 기억, 거짓말 그리고 일그러진 사랑법을 그린 심리물에 가깝습니다.

알코올중독으로 망쳐버린 과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수렁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레이첼,

멈추지 않는 욕망의 화신이자 일그러진 사랑을 통해서만이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메건,

불륜을 통해 레이첼의 남자를 쟁취했지만 그녀의 광기 서린 집착이 두렵기만 한 애나 등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세 여자의 삶은 폭발 직전의 불안정한 화합물처럼 위태롭고,

어딘가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위화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 여자의 남자들 역시 비슷한 톤의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는데,

어딘가 음험해 보이기도 하고, 거침없는 욕망에 충실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의혹을 사게 됩니다.

 

인간미나 사회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들이지만

의외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집착하고 욕망하는 가치관은 사랑과 가족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가 하면

행복한 가족을 지키고 완성하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특히 사랑과 가족의 결정체인 아기가 세 여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레이첼의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은 전 남편 톰과의 불임에서 기인했고,

애나의 행복과 불행은 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귀여운 아기 때문이며,

메건의 집착과 욕망은 아기를 잃었던 비극적인 기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녀들의 욕망은 소박했지만,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고,

그 아이러니는 읽는 내내 목 안의 가시처럼 안쓰럽거나 불편하게 여겨졌습니다.

 

기찻길 옆에 자리 잡은 똑같은 모양의 집에 살며

운명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를 맺어야만 했던 세 여자의 무겁고 고단한 삶을 지켜보는 것도,

또 그 관계 속에서 벌어진 의문의 실종 사건의 진실을 캐는 일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지만,

아쉬운 점이라면 비슷한 상황과 전개가 반복되면서 약간은 피곤한 책읽기가 됐다는 점입니다.

460여 페이지는 어지간한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비하면 약소한 분량이지만

걸 온 더 트레인에 담긴 이야기의 규모에 비하면 조금은 과한 분량이라는 느낌입니다.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와 객관적인 판매량 지표를 보면서

한번쯤 고개를 갸웃했던 것도 동어반복과 분량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영미권 서평가들이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와 이 작품을 비교하며

어느 작품이 더 매력적인가, 라는 논쟁을 벌였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평하자면, 미스터리와 반전에 관한 한 나를 찾아줘가 한 수 위라고 판단되지만,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을 살린 심리물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느 작품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만큼 대등한 작품들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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랫맨
미치오 슈스케 지음, 오근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추어 밴드 선다우너의 연습 스튜디오 창고에서 이 밴드의 전직 드러머이자

히메카와 료의 연인인 히카리가 대형 앰프에 깔려 숨진 채 발견됩니다.

사건이라고도, 사고라고도 확신할 수 없는 히카리의 죽음에 대해

경찰은 물론 당시 스튜디오에 있던 밴드 멤버들도 진상을 파악하려 애씁니다.

히메카와 료는 히카리의 죽음을 지켜보며 23년 전에 겪은,

그러나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비극적인 가족사를 떠올립니다.

23년 전 누나의 죽음과 히카리의 죽음은 어딘가 닮은꼴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거듭된 반전 끝에 진범이 밝혀짐과 동시에

히메카와 료는 23년 전의 누나의 죽음의 진실과도 맞닥뜨리게 됩니다.

 

● ● ●

 

정교한 퍼즐처럼 빈틈없이 직조된 미스터리와

의식의 밑바닥을 훑는 듯한 조금은 관념적인 비극이 함께 섞여있는 작품입니다.

한쪽에선 밴드 연습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히카리의 죽음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한쪽에선 히카리의 죽음으로 인해 23년 전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만

히메카와 료의 고통스럽고 복잡한 회한에 대한 묘사가 진행됩니다.

 

사실 사건 자체도, 그 해결 과정도 대단한 트릭이나 복잡한 구도를 갖고 있진 않습니다.

후반부에 격하게 몰아치며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반전이 이 작품의 백미이긴 하지만

사건이나 반전보다 랫맨의 개성과 존재감을 돋보이게 하는 진짜 미덕은

심리, 기억, 착각, 모방, 애증 등 다분히 관념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장치들을

현실의 사건들과 정교하게 결합시킨 작가의 완벽한 설계에 있습니다.

 

23년 전 누나의 죽음에 관한 히메카와 료의 기억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다만 자신과 아버지, 어머니가 누나의 죽음에 관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불확실하지만 희미한, 진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모호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데,

그 기억은 퇴색되기도, 변색되기도, 증폭되거나 축소되기도 하면서

지난 23년 동안 히메카와 료를 힘들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현재에 벌어진 히카리의 죽음은 누나의 죽음과 꼭 닮아있습니다.

아니, 히메카와 료는 두 죽음이 닮아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는 23년 동안 유기체처럼 제멋대로 자가발전해온 기억을

이제는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고 끝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자의반 타의반으로 히카리의 죽음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히메카와 료는

파국을 맞이하기 직전 예상치 못한 반전을 겪으며 사건의 진상에 눈을 뜨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우연의 힘을 통해 23년 전 누나의 죽음의 진상까지 깨닫게 됩니다.

 

미치오 슈스케는 히메카와 료의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심리 상태를

현실의 두 사건과 빈틈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연결시킵니다.

그 때문에 사건의 해결 과정은 물리적인 단서나 자백, 목격담 등이 아니라

히메카와 료의 기억과 착각,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되곤 합니다.

물론 경시청의 형사가 수사를 진행하고, 물증을 찾아내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독자는 그 형사가 아니라 히메카와 료를 통해 사건을 들여다보게 설정돼있어

그가 혼란에 빠지거나, 기억과 착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게 되면

독자 역시 똑같은 혼란과 착각을 겪게 됩니다.

 

이런 설정 탓에 독자에 따라 쉽지 않은 책읽기를 겪은 경우도 적잖을 것입니다.

마치 한편의 복잡한 심리극을 읽는 듯한 느낌도 편하지만은 않고,

관념적인 요소들을 현실의 사건들과 무리하게 연결시킨 지점에서는

정교함 대신 위화감이나 작위성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방, 흉내, 카피의 대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의 역할,

주요 인물들은 물론 조연들에게까지 부여된 불행한 가족사,

밴드가 연주하는 노래 가사 속의 다양한 상징 등은

때론 과한 인공미 때문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최근 읽은 그 어느 작품보다 서평 쓰기가 곤란했던 작품입니다.

단순한 내용 언급조차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상세히 묘사할 수 없었던 탓도 있지만,

주관과 관념처럼 실체 없는 것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실 속 사건들과 결부되다보니

서평 역시 무척이나 모호하고 관념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략하게 총평하자면,

깔끔하고 선명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대놓고 추천하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인간의 심리와 기억에 관한, 묵직하고 어딘가 불온해 보이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미치오 슈스케의 반전 섞인 정교한 설계도를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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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제자들 밀리언셀러 클럽 140
이노우에 유메히토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돌연변이를 거쳐 탄생한 치사율 100%의 신종 바이러스로 고후 시 일대가 쑥대밭이 됩니다.

용뇌염혹은 드래건바이러스라 명명된 이 재난 속에서 기적적으로 네 사람만이 생존하는데

문제는 이들이 심각한 후유증, 즉 상식 밖의 능력을 지니게 됐다는 점입니다.

마음만으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염동력(念動力),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투시력,

그리고 회춘(回春)과 빙의의 힘 등 초현실적인 능력들이 그것입니다.

바이러스를 퍼뜨려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킨 주범들로 낙인찍힌 가운데

병원이 제공한 거처에 머물며 바이러스의 연구에 일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초능력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훈련을 받던 이들은

사회로 복귀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매스컴을 통해 자신들의 초능력을 선보이지만

그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참극에 빠지고 맙니다.

결국 경찰이 개입하고 이들을 체포하려 하지만 오히려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어 갑니다.

 

● ● ●

 

오래 전에 만화인지 영화인지 모르겠지만

번개를 맞고 초능력을 갖게 된 주인공이 등장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초능력까지는 아니지만 헐크 역시 연구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로 인해

초인적인 육체와 힘을 갖게 되는 캐릭터지요.

 

마법사의 제자들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은 예전의 캐릭터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야말로 슈퍼 울트라 급 능력자들입니다.

공중부양이나 과거를 투시하는 능력은 애교이고,

차를 탄 채 날아다니거나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는 것은 물론

심지어 빙의를 통해 타인을 조종하거나 산허리를 잘라낸 뒤 공중에 띄우기도 합니다.

 

치사율 100%의 신종 바이러스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물들이

초능력자가 되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 마법사의 제자들

말 그대로 현실을 넘어선 판타지 오락물이지만

얼마 전 메르스를 겪은 한국 독자들에겐 남다른 섬뜩함을 느낄 수 있는 소재입니다.

 

염동력, 투시력, 빙의와 회춘 등 위험하지만 누구나 욕망하기 마련인 다양한 초능력,

인류의 멸망까지 초래할 만큼 극도로 위험한 바이러스,

어딘가 의심스런 병원의 태도, 경찰의 무리한 진압이 불러온 유혈참사,

매스컴의 흥분과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초능력에 대한 여론 등

블록버스터 급 설정들이 다채롭게 등장한 덕분에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 갈수록 초현실성이 증폭되는 이야기들이 전개되지만

이상하게도 거부감이나 황당함은 전혀 느낄 틈이 없습니다.

 

사실 언뜻 봤을 때는 로빈 쿡의 감염이나 코마처럼 메디컬 스릴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런 내용이라고 하기엔 제목이 너무 특이해서 궁금함과 호기심이 일었는데,

막상 초능력이라는 소재가 튀어나오자 당황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호러물도 좋아하고 초현실적인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초능력을 가진 캐릭터에 대해서는 약간의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같은 경향을 가진 독자나 기본적으로 판타지나 SF물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물 흐르듯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의 필력에 한 번 발을 담그면

단숨에 끝까지 끌려갈 정도로 이야기의 흡입력은 대단합니다.

이 뒤에 남은 분량을 무슨 이야기로 채우려고 하지?”라는 의문이 들 때마다

작가는 생각지도 못한 시퀀스를 도입하면서 새로운 긴장감을 조성하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엔딩에 대해서는 아마 호불호가 좀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몇 페이지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정리하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최악으로 치닫게 만든 작가가 어떤 엔딩을 준비했는지 정말 궁금했는데,

개인적으로 100% 만족할만한 엔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인상을 찌푸릴만한 엔딩도 아니었습니다.

 

이노우에 유메히토는 작년 여름 러버 소울로 처음 만났는데,

그때도 뛰어난 필력과 반전으로 기대 이상의 매력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러버 소울을 읽은 후 그와 도쿠야마 준이치가 콤비작으로 내놓은

클라인의 항아리에 큰 관심을 갖게 됐었는데

절판 상태라 중고서점에서라도 찾아야지, 해놓고 금세 1년이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또 공수표가 될 수도 있지만, 읽는 건 나중이라도 어떻게든 구매라도 시도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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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굴 - 영화 [퇴마 : 무녀굴]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7
신진오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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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좋아하는 취향 덕에

모처럼 만난 토속적 요소가 강한 한국의 호러물이 반가웠습니다.

제주의 김녕사굴 전설, 연이은 의문의 실종과 죽음, 상상만 해도 끔찍한 빙의 현상,

의대 출신의 출중한 퇴마사와 가공할 영적 힘을 지닌 악신(惡神)의 대결 등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골고루 포함돼있어 읽기 전부터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보통 악신의 존재는 복수나 원념에 기반을 두기 마련이지만

무녀굴속의 악신은 그 이상의 탐욕에 집착함으로써 더욱 오싹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복수를 넘어 운명 자체에게 복수함으로써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으려는 악신의 탐욕은 수많은 희생을 요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자들까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작가는 악신의 탐욕을 그저 사악하게만 그리지 않습니다.

물론 살인의 동기가 밝혀지지 않는 시점에서는 절대 악 그 자체로만 보일 뿐이지만,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묻혀있던 과거의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오히려 절실함과 동정심을 유발하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됩니다.

마치 죄는 미워하되, 악신은 미워하지 말라는 듯한 메시지가 내재된 느낌입니다.

 

한편, 악신의 탄생의 배경으로 설정된 김녕사굴 전설과 4.3항쟁의 참혹한 역사는

제주도의 특성 많은 굴과 다양한 종의 뱀, 섬 특유의 토속문화 등과 함께 어우러져

영적 존재가 등장하는 공포물의 허구성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현실감 있게 설정됐습니다.

제주에서 1년 정도 머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보고 들은 전설과 신화, 섬 전체를 아우르는 미묘한 정서가

작품 전반에 잘 녹아있음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호러물의 미덕과 다양한 공포 요소들의 조합으로 이야기는 술술 잘 읽힙니다.

캐릭터도 잘 만들어졌고, 악신의 엽기적인 행태는 눈앞에서 보듯 사실감 있게 그려졌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결과만 놓고 보면 큰 아쉬움이 남았는데,

그것은 악신이 노리는 궁극의 목표에 비해 서론이 너무 길었다는 점입니다.

, 악신은 굳이 거추장스럽게 여러 사람을 죽일 필요도 없었고,

또 자신을 방해하는 뛰어난 퇴마사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그저 타이밍만 기다렸다가 아주 간단하고 쉽게 이룰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마지막 반전을 위해

앞서 차곡차곡 잘 쌓여온 서사가 희생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기나긴 일제 강점기의 탓이지만,

토속문화의 경우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승이나 보존, 현대적인 재조명이 부족하다보니

문학에서도 매력적인 소재로 쓰이는 일이 제한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미스터리나 공포물 등 장르물 영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꼼꼼한 자료조사와 디테일한 묘사로 좋은 작품을 창작해낸 작가의 필력이

다음 작품에선 좀더 높은 수준의 이야기로 독자를 찾아줄 것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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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치
로렌조 카르카테라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멤버들 모두의 캐릭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현세 님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거나 낙오된 자들이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이뤄낸다는 이야기로,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던 작품입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퇴출된 야구선수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였다면,

아파치는 한때 최고의 능력자였으나 작전 수행 도중 심각한 부상을 당해

이제는 더는 쓸모없어진 경찰들이 목숨을 걸고 벌이는 한판의 부활극입니다.

 

가장 빨리 금배지 형사로 진급한 기록을 갖고 있는 지오바니 부머프론티에리,

할렘 출신의 흑인으로 사격의 달인인 데이비드 데드아이윈스롭,

뛰어난 추리와 범인 검거율로 콜롬보 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메리 실베스트리,

인디언의 피를 물려받은 폭발물 전문가 델가도 제로니모로페즈,

어릴 적부터 전자기기에 열광했던 도청전문가 지미 핀스라이언,

한때 지독한 마약중독자였으나 어머니를 잃은 뒤 경찰이 된 일명 짐 목사바비 스카포니 등

뉴욕 경찰국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던 6명의 경찰은

제각각 비극적인 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뒤 불명예스러운 은퇴를 강요받았고,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비참한 여생만을 끌어안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액션이 빠진 삶은 그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총알 하나면 좌절과 고통을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총에서 발사된 총알 하나.

 

무위도식하는 백수부터 컴퓨터 수리, 보험설계사, 아파트 문지기 등

예전의 명성과는 거리가 먼 불우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집니다.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부머는 예전의 파트너 데드아이와 함께

오랜만에 경찰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여 위험천만한 마약중독자와 소아성애자를 잡아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규모는 물론 흉악한 수법으로 유명한 마약 카르텔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부머는 최후의 일전에 목말라있는 산송장들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안합니다.

경찰마저 쉽게 손댈 수 없는 철옹성 같은 마약 카르텔을 향해

자신들의 능력을 끌어모아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최후의 일격을 날리자고..

 

마약 카르텔을 박살낸다고 누가 메달을 내려줄 것도 아니었고,

실패할 경우 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살아남아도 범죄자로 낙인찍혀야 했고,

오히려 성공할 경우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물론

FBI와 뉴욕 경찰이 그 공을 다 차지한다는 시나리오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딱한 영혼에 평화를 주기 위해미션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아파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합니다.

 

아파치는 쉽고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불구가 된 전직 경찰들과 절대악인 마약 카르텔의 대결이라는 구도 하에

잔혹한 범죄 장면과 긴장감 넘치는 액션 장면이 쉴 새 없이 등장합니다.

뛰어난 반전이나 예상외의 범인처럼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설정은 없지만

정의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들의 출중한 능력과 비극적인 사연,

재미 하나를 위해 끝까지 돌직구처럼 날아가는 쉽고 간결한 스토리,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을 향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화력의 향연 등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좋아할만한 미덕을 모두 갖춘 블록버스터입니다.

안 그래도 더운 날, 작가가 꼬아놓은 미스터리 때문에 두뇌를 혹사시키기 싫은 독자나

속 시원한 액션물 한 편을 찾는 독자에겐 더없이 적당한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아파치가 텅 빈 서사에 오락성만 가득 채운 작품이란 뜻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300여 페이지의 분량 중 1/3 정도가 할애된 아파치 멤버들의 과거사는

이 작품을 다이 하드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경찰 영웅이야기와 차별시키는 대목입니다.

언제나 역경을 딛고 1100의 싸움에서도 의연히 살아남는 비현실적 영웅이 아니라

100% 리얼한 현실 속에서, 때론 어처구니없는 실수 하나로, 때론 범죄자의 악행으로 인해

경찰로서의 삶을 통째로 잃어버리게 되는 평범한 인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작가는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경찰,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켰습니다.

물론 후반부의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식 전개를 피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진정성이 독자에게 이입된 덕분에

흔한 액션물과는 차별화된 느낌과 여운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족히 5~600페이지는 나왔을 법한 분량을 300여 페이지에 우겨넣은(?) 편집 스타일입니다.

비용의 문제인지 취향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의 경향과는 다르게 글자 크기는 너무 작고, 줄 간격은 빡빡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물론 읽는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처음에 책을 받고 펼치자마자 저절로 헉~ 소리가 났던 것도 사실입니다.

10여 군데 발견된 오타도 아쉬웠지만 왠지 편집에서의 인색함(^^;)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대작답게 5~600페이지로 편집했다면 작품의 무게감도 훨씬 살아났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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