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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굴 - 영화 [퇴마 : 무녀굴] 원작 소설 ㅣ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7
신진오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8월
평점 :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좋아하는 취향 덕에
모처럼 만난 토속적 요소가 강한 한국의 호러물이 반가웠습니다.
제주의 김녕사굴 전설, 연이은 의문의 실종과 죽음, 상상만 해도 끔찍한 빙의 현상,
의대 출신의 출중한 퇴마사와 가공할 영적 힘을 지닌 악신(惡神)의 대결 등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골고루 포함돼있어 읽기 전부터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보통 악신의 존재는 복수나 원념에 기반을 두기 마련이지만
‘무녀굴’ 속의 악신은 그 이상의 탐욕에 집착함으로써 더욱 오싹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복수를 넘어 운명 자체에게 복수함으로써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으려는 악신의 탐욕은 수많은 희생을 요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자들까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작가는 악신의 탐욕을 그저 사악하게만 그리지 않습니다.
물론 ‘살인의 동기’가 밝혀지지 않는 시점에서는 절대 악 그 자체로만 보일 뿐이지만,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묻혀있던 과거의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오히려 절실함과 동정심을 유발하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됩니다.
마치 죄는 미워하되, 악신은 미워하지 말라는 듯한 메시지가 내재된 느낌입니다.
한편, 악신의 탄생의 배경으로 설정된 김녕사굴 전설과 4.3항쟁의 참혹한 역사는
제주도의 특성 – 많은 굴과 다양한 종의 뱀, 섬 특유의 토속문화 등과 함께 어우러져
영적 존재가 등장하는 공포물의 허구성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현실감 있게 설정됐습니다.
제주에서 1년 정도 머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보고 들은 전설과 신화, 섬 전체를 아우르는 미묘한 정서가
작품 전반에 잘 녹아있음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호러물의 미덕과 다양한 공포 요소들의 조합으로 이야기는 술술 잘 읽힙니다.
캐릭터도 잘 만들어졌고, 악신의 엽기적인 행태는 눈앞에서 보듯 사실감 있게 그려졌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결과만 놓고 보면 큰 아쉬움이 남았는데,
그것은 악신이 노리는 궁극의 목표에 비해 ‘서론’이 너무 길었다는 점입니다.
즉, 악신은 굳이 거추장스럽게 여러 사람을 죽일 필요도 없었고,
또 자신을 방해하는 뛰어난 퇴마사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그저 타이밍만 기다렸다가 아주 간단하고 쉽게 이룰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마지막 반전을 위해
앞서 차곡차곡 잘 쌓여온 서사가 희생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기나긴 일제 강점기의 탓이지만,
토속문화의 경우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승이나 보존, 현대적인 재조명이 부족하다보니
문학에서도 매력적인 소재로 쓰이는 일이 제한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미스터리나 공포물 등 장르물 영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꼼꼼한 자료조사와 디테일한 묘사로 좋은 작품을 창작해낸 작가의 필력이
다음 작품에선 좀더 높은 수준의 이야기로 독자를 찾아줄 것을 기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