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랫맨
미치오 슈스케 지음, 오근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추어 밴드 선다우너의 연습 스튜디오 창고에서 이 밴드의 전직 드러머이자
히메카와 료의 연인인 히카리가 대형 앰프에 깔려 숨진 채 발견됩니다.
사건이라고도, 사고라고도 확신할 수 없는 히카리의 죽음에 대해
경찰은 물론 당시 스튜디오에 있던 밴드 멤버들도 진상을 파악하려 애씁니다.
히메카와 료는 히카리의 죽음을 지켜보며 23년 전에 겪은,
그러나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비극적인 가족사를 떠올립니다.
23년 전 누나의 죽음과 히카리의 죽음은 어딘가 닮은꼴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거듭된 반전 끝에 진범이 밝혀짐과 동시에
히메카와 료는 23년 전의 누나의 죽음의 진실과도 맞닥뜨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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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퍼즐처럼 빈틈없이 직조된 미스터리와
의식의 밑바닥을 훑는 듯한 조금은 관념적인 비극이 함께 섞여있는 작품입니다.
한쪽에선 밴드 연습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히카리의 죽음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한쪽에선 히카리의 죽음으로 인해 23년 전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만
히메카와 료의 고통스럽고 복잡한 회한에 대한 묘사가 진행됩니다.
사실 사건 자체도, 그 해결 과정도 대단한 트릭이나 복잡한 구도를 갖고 있진 않습니다.
후반부에 격하게 몰아치며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반전이 이 작품의 백미이긴 하지만
사건이나 반전보다 ‘랫맨’의 개성과 존재감을 돋보이게 하는 진짜 미덕은
심리, 기억, 착각, 모방, 애증 등 다분히 관념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장치들을
현실의 사건들과 정교하게 결합시킨 작가의 완벽한 ‘설계’에 있습니다.
23년 전 누나의 죽음에 관한 히메카와 료의 기억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다만 자신과 아버지, 어머니가 누나의 죽음에 관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불확실하지만 희미한, 진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모호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데,
그 기억은 퇴색되기도, 변색되기도, 증폭되거나 축소되기도 하면서
지난 23년 동안 히메카와 료를 힘들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현재에 벌어진 히카리의 죽음은 누나의 죽음과 꼭 닮아있습니다.
아니, 히메카와 료는 두 죽음이 닮아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23년 동안 유기체처럼 제멋대로 자가발전해온 기억을
이제는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고 끝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자의반 타의반으로 히카리의 죽음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히메카와 료는
파국을 맞이하기 직전 예상치 못한 반전을 겪으며 사건의 진상에 눈을 뜨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우연의 힘을 통해 23년 전 누나의 죽음의 진상까지 깨닫게 됩니다.
미치오 슈스케는 히메카와 료의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심리 상태를
현실의 두 사건과 빈틈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연결시킵니다.
그 때문에 사건의 해결 과정은 물리적인 단서나 자백, 목격담 등이 아니라
히메카와 료의 기억과 착각,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되곤 합니다.
물론 경시청의 형사가 수사를 진행하고, 물증을 찾아내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독자는 그 형사가 아니라 히메카와 료를 통해 사건을 들여다보게 설정돼있어
그가 혼란에 빠지거나, 기억과 착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게 되면
독자 역시 똑같은 혼란과 착각을 겪게 됩니다.
이런 설정 탓에 독자에 따라 쉽지 않은 책읽기를 겪은 경우도 적잖을 것입니다.
마치 한편의 복잡한 심리극을 읽는 듯한 느낌도 편하지만은 않고,
관념적인 요소들을 현실의 사건들과 무리하게 연결시킨 지점에서는
정교함 대신 위화감이나 작위성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방, 흉내, 카피의 대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의 역할,
주요 인물들은 물론 조연들에게까지 부여된 불행한 가족사,
밴드가 연주하는 노래 가사 속의 다양한 상징 등은
때론 과한 인공미 때문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최근 읽은 그 어느 작품보다 서평 쓰기가 곤란했던 작품입니다.
단순한 내용 언급조차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상세히 묘사할 수 없었던 탓도 있지만,
주관과 관념처럼 실체 없는 것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실 속 사건들과 결부되다보니
서평 역시 무척이나 모호하고 관념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략하게 총평하자면,
깔끔하고 선명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대놓고 추천하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인간의 심리와 기억에 관한, 묵직하고 어딘가 불온해 보이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미치오 슈스케의 반전 섞인 정교한 설계도를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