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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죽이다 ㅣ 데이브 거니 시리즈 3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고백하자면, 제 책장에는 존 버든의 ‘데이브 거니 시리즈’ 1, 2권인
‘658 우연히’와 ‘악녀를 위한 밤’이 몇 년째 대기상태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몇 번이고 손이 갔다가도 늘 ‘다음’을 기약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일단은 분량이었습니다.
물론 ‘해리 홀레 시리즈’를 탐독했던 걸 생각해보면, 저의 변명이 좀 구차해 보입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앞선 시리즈를 읽지 못한 상태에서
시리즈 3권인 ‘기꺼이 죽이다’가 출간됐다는 소식에, 저도 모르게 손이 가고 말았습니다.
책장에서 자기 순서만 기다리고 있던 1, 2권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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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봄. 자칭 ‘착한 양치기’라는 자에 의한 희대의 연쇄살인극이 벌어집니다.
그는 벤츠의 플래그쉽 모델을 소유한 부자들을 죽인 뒤 세상을 향해 선언문을 발표합니다.
“돈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부자를 죽이는 것으로 정의를 이룩할 수 있다.”
10명의 희생자가 나왔지만, 경찰과 FBI는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무력하게 물러서고 맙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착한 양치기 사건’의 유족들을 인터뷰하는 다큐멘터리가 기획됩니다.
한 야심찬 여대생의 기획에서 출발한 이 다큐멘터리의 자문을 맡은 퇴직형사 데이브 거니는
유족들을 만나고, 당시 사건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의문을 갖게 됩니다.
FBI의 반박과 은근한 협박에도 불구하고 데이브 거니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자마자 유족들이 차례로 살해당하는 참극이 벌어집니다.
동시에 데이브 거니와 그의 가족에게도 명백한 위협이 가해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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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성적이고 사색적이지만, 동시에, 섬세하고 끈질기게 분석하는 퇴직 형사
- 부당한 권위와 권력에 저항하는 합리적인 반골
- 가족들의 소소한 위로에 눈물 흘릴 줄 아는 따뜻하고 소심한 남자
출판사의 소개글과 제가 받은 인상을 편집해서 정리해본 데이브 거니의 캐릭터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적이면서도 제대로 일할 줄 아는 형사’랄까요?
많은 영웅적 캐릭터들이 그렇듯 그에게도 아버지와 가족으로 인한 상처가 있지만,
그것이 스스로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 정도로 거대하거나 작위적이지 않습니다.
많은 영웅적 캐릭터들과 달리 그는 마초 같은 기질도 없고, 자학적인 고뇌도 없습니다.
냉소적이지도 않고, 비관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영웅 대접이 불편한 겸손한 인물입니다.
어쩌면 주인공 캐릭터로서는 좀 심심해 보이는, 심지어 건전해보이기까지 한 데이브 거니지만
그가 가진 또 다른 일면, 즉 끈질긴 분석과 과감한 결정, 그리고 합리적인 반골 기질 덕분에
그가 이끄는 이야기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차분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전개됩니다.
본의 아니게 ‘착한 양치기 사건’의 유족들을 인터뷰하는 다큐멘터리 자문을 맡게 됐지만,
거니는 그 과정에서 그동안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착한 양치기 사건’의 이면을 발견합니다.
그 당시 수사 관련자 대부분이 FBI와 범죄심리학자가 가리킨 한쪽 방향만 쳐다보느라
정작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는 점을 간파합니다.
왜 벤츠를 소유한 부자들만, 그것도 어마어마한 총으로 얼굴을 날려버렸을까?
왜 희생자들 근처에 동물 인형을 놓아뒀을까?
왜 6건의 사건으로 10명의 사상자를 내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착한 양치기’는 정말 돈과 부자를 혐오한 로빈 후드였을까?
거니는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조심히 움직입니다.
퇴직형사라는 신분상의 제약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FBI의 결론을 뒤집거나 심지어 정면대결을 할 수도 있다는 부담 때문입니다.
이런 핸디캡 때문에 독자에 따라 거니의 조사가 무척 답답하고 느려 보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범인과 FBI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퇴직형사’ 설정은 무척 흥미로워 보였습니다.
그는 현직에 있는 동료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고, 유족들의 인터뷰에서 단서를 구합니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와 발견되지 않은 퍼즐들을 찾기 위해 느리지만 집요하게 움직입니다.
그리고, 끈질긴 분석을 통해 확신을 얻은 거니는 이제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범인과 FBI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것입니다.
5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분량에 어울리게 작품 속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포진돼있습니다.
전작의 사건에서 입은 몸과 마음의 상처로 인해 무기력한 날들을 보내는 중년의 거니가
아내와 아들과 겪는 갈등과 화해의 과정도 크진 않지만 묵직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살인사건마저 시청률의 제물로 바치려는 쓰레기 같은 미디어의 횡포라든가,
연쇄살인마에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감당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트라우마 등
작가는 메인스토리와 연결된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굳이 아쉬움을 꼽자면, 우선, 데이브 거니가 외부의 도움에 너무 많이 의존한다는 점입니다.
동료였던 잭 하드윅이 정보원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거니의 수사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퇴직형사라는 핸디캡 때문이긴 하지만, 때론 과하다는 인상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더불어, 착한 양치기가 거니의 수사를 돕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작위적인 설정이나 장치들이 간간이 등장하는데,
크게 거슬리진 않지만 왠지 거니의 수사가 편의적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작품 내용과는 무관한 것인데, 번역 제목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원제가 ‘Let the Devil Sleep’인데, ‘기꺼이 죽이다’라는 번역 제목이
과연 원제의 의미를 잘 담아냈는지, 작품 내용과 매끄럽게 연결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꺼이 죽이다’ 덕분에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시리즈 1, 2권을 곧 꺼내 읽게 될 것 같습니다.
‘기꺼이 죽이다’ 속에 데이브 거니가 겪은 예전 사건들이 종종 언급되곤 하는데,
그 짧은 언급만으로도 호기심과 기대감이 불쑥불쑥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죽이다’가 작가 나이 70에 집필됐다고 하니, 후속작을 기대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데이브 거니의 활약을 좀더 맛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