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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잊지 마
미셸 뷔시 지음, 임명주 옮김 / 달콤한책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아랍인이며 장애인이란 이유로 편견 속에 살아온 서른 살 청년 자말.
어느 겨울, 노르망디 작은 해안마을의 절벽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투신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자말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빨간 스카프를 건넸지만 그녀는 스카프를 쥔 채 추락하고 만다.
문제는 추락사 한 그녀의 목에 자말이 건넨 스카프가 단단히 묶여있었다는 점,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스카프에서 자말의 DNA가 무수하게 발견됐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된다.
본인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자말은 당황하지만, 그의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10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두 건의 미제사건까지 뒤집어쓰게 될 운명에 처한다.
똑같은 수법, 똑같은 흉기, 똑같은 범행대상.. 모든 게 동일범의 소행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 그에게 과거 사건의 정보가 담긴 이상한 편지를 연이어 보내온다.
마치 그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듯, 또는, 그에게 진실을 밝혀내라고 요구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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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독자는 ‘왜?’, ‘어떻게?’, ‘말도 안 돼!’라는
의아함을 가지고 질주하는 수밖에 없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작가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때까지 주인공 자말은 물론
독자까지 현실과 망상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세워놓고 마음껏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추락하던 여자가 불과 몇 초 사이에 자기 목에 스카프를 묶은 것인가?
왜 이 끔찍한 사고는 작은 지역마을의 언론에 한 줄도 기사화되지 않는 것인가?
자말에게 10년 전에 발생한 미제사건의 정보를 익명 우편으로 보내는 자는 누구인가?
왜 하필 평생 이곳에 와본 적도 없는 자말이 이런 황당한 상황을 겪어야 하는가?
분명 미셸 뷔시가 판타지 스릴러를 집필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명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현실세계로의 틈새를 발견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자말에게 쳐놓은 망상의 그물은 너무나 촘촘하고,
경찰과 검시관과 목격자들의 증언은 자말이 전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탄탄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누구도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자말이
경찰서를 빠져나와 직접 수사에 나서는 이야기가 하나이고,
10년 전 살해당한 두 여인의 이야기와 수사기록이 나머지입니다.
하지만 자말의 직접 수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꼬여만 갑니다.
사람을 만나고, 기록을 접할수록 진실은 점점 현실세계에서 멀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절벽에서 투신한 여자의 정체도, 10년 전 희생자들의 정체도,
그리고 그녀들의 유가족은 물론 자말과 함께 해안가에서 시신을 지켜본 목격자들조차
자말에게서 현실감을 잃은 채 신기루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자말은 ‘정말 내가 그녀들을 죽인 건 아닐까?’라는 망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독자 역시 ‘진짜 자말이 범인인 건가?’라는 의문을 수차례 반복하게 됩니다.
그나마 ‘누군가’ 자말에게 계속 보내오는 이상한 편지들만이
이 이야기가 판타지나 망상이 아님을 독자와 자말에게 환기시켜줄 뿐입니다.
자말의 직접수사는 결국 장벽에 부딪히고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기 속에서 자말은 드디어 끔찍한 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과연 자말은 혐의를 벗고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될까요?
10년 동안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두 여인의 죽음은 진상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세 여인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똑같은 수법으로 참혹하게 살해당해야 했을까요?
미셸 뷔시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때까지 절대 쉽게 답을 내주지 않습니다.
사소한 장치들까지 철저히 계산에 넣어둔 그의 정교한 설계 덕분에
독자는 함부로 예단하기도 어렵지만, 그만큼 막판의 짜릿함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자말을 현실과 망상의 경계선 위에 올려놓았던 덫의 실체는
어쩔 수 없는 작위감과 함께 결과에 대한 변명처럼 느껴져 무척 아쉽게 읽혔습니다.
그 덫은 “진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기 위해선 과거를 뒤흔들어야 했어.”라는,
나름의 대의명분을 갖고 있지만, 100% 공감하기 어려운 억지스러움을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만 매끄럽게 전개됐다면 ‘절대 잊지 마’는
별 5개와 함께 제 독서목록에서 2017년 상반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작품까지 국내 출간된 미셸 뷔시의 네 작품을 모두 읽었는데,
개인적인 호감은 ‘그림자소녀’ - ‘절대 잊지 마’ - ‘검은 수련’ - ‘내 손 놓지 마’ 순입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그림자소녀’가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수작이라면,
‘절대 잊지 마’는 대중성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춘 작품이고,
‘검은 수련’은 예술을 소재 삼아 무게감과 작품성을 중시한 작품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내 손 놓지 마’는 별 3.5개에 그칠 정도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노르망디를 배경으로 매번 색다른 분위기의 스릴러를 내놓는 미셸 뷔시가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고 찾아올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