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위에서 춤추다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풍신 블레이드라는 악덕 기업의 피해자들은

스스로 확신범이 되어 관계자들에게 직접 철퇴를 가하고자 한다.

제각기 사연이 있는 피해자들이 직접 경영진들을 살해함으로써 복수를 실행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긴 피해자 모임 안에서 예기치 않게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전공은 본격 미스터리라고 하는데

앞서 읽은 두 작품은 그가 잠시 외도(?)한 작품들이지만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는 점,

그리고 뒤늦게 접한 그의 전공은 앞선 작품들에 비해 아쉬움이 컸다는 점입니다.

 

절벽 위에서 춤추다는 띠지의 홍보글대로 복수극과 클로즈드 서클이 믹스된 작품입니다.

폭발적인 판매를 기록한 가정용 풍력발전기의 부작용으로 인해

가족을 잃었거나 스스로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이 사적 복수를 위해 모입니다.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갈 것이 분명한 경영진들을 직접 죽이겠다는 게 그들의 목표입니다.

살인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아지트는 해당 기업의 직원 리조트.

하지만 그들의 복수극이 절반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역시 띠지의 홍보글대로 동료가 동료를 죽이는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경찰에 알릴 수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어 저절로 클로즈드 서클이 된 리조트 안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화자가 범인을 찾아내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거론될 만큼 악덕 기업의 문제가 심각하지만

그 피해자들이 살인이라는 방법으로 직접 응징을 다짐한 설정이라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가끔 뉴스를 통해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면

그들 마음속에 살의가 생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봤기 때문인데,

정작 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는 피해자들, 아군사이에 벌어진 참혹한 살인극입니다.

 

리조트 안에 모인 피해자 모임의 멤버들은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연이어 시신이 발견되지만 단서나 증거를 통한 조사 같은 건 할 수도 없고

그저 누가, ?”라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래서인지 중반까지는 나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지만

그 후로는 논리 대결과 추정의 동어반복이 대부분이라 다소 지루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사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들의 추정은 대체로 공상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공상에 힘을 얹어줄 단서 같은 건 아예 없고,

난 이쪽 말이 맞는 것 같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식의 공허한 논쟁들이 대부분입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어느 쪽 주장이 그럴 듯 한지 촉각이 곤두서게 되지만,

희생자가 계속 나오는데도 논쟁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만 맴돕니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 작가 스스로 등장인물들의 난상토론을 통해 진상을 밝히는 것

자신만의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는데,

난상토론과 논리 싸움이라는 독특한 해법은 둘째 치고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동기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호하고 추상적이어서

앞서 벌어진 그 숱한 난상토론 자체의 무게감도 많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이시모치 아사미의 본격 미스터리 대표작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는 아직 못 읽었는데,

읽게 된다면 그의 전공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이 작품으로 이시모치 아사미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절대 실망부터 하지 말고,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를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톤과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정말 매력적으로 읽을 수 있는 미스터리이기 때문입니다.

 

(사족이지만, 작품 내용과 조금도 연관 없어 보이는 표지 디자인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 개의 잔 진구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픽션으로는 합리적 의심이후 1년 여 만에 나온 도진기 작가의 작품이지만

진구 시리즈로는 모래바람이후 무려 3년 만에 나온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작가 후기에서 급격히 나빠진 눈 때문에 집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고백을 보곤

신간이 늦어진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물론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집필을 많이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부디 쾌차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전작이자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모래바람을 읽고 썼던 서평 말미를 잠깐 인용하면...

마지막 페이지에서 묘사된 진구와 연부의 만남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두 사람의 서글픈 악연을 예고하는 것 같아

한편으론 기대감을, 또 한편으론 안쓰러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다음의 진구 시리즈에 또다시 연부가 등장한다면 꽤나 센 비극이 등장할 것 같습니다.”

 

진구의 프리퀄을 다룬 모래바람에서 중학생으로 등장한 진구와 유연부는

라이벌이면서도 살짝 로맨스 분위기까지 풍긴 10대들이었지만,

외국의 사막에서 벌어진 아버지들의 참극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맙니다.

10년이 지나 엉뚱한 사건에서 재회한 진구와 연부는 또다시 악연을 반복하게 되고

결국 연부는 깊은 증오심을 감추지 않은 채 진구에게 등을 돌리고 맙니다.

그리고 (‘모래바람서평에서의 예상대로) 둘은 또다시 악몽 같은 재회를 겪게 됩니다.

(유연부에 대해 더 언급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쯤에서 멈추겠지만,

이 작품의 맛을 좀더 제대로 만끽하려면 모래바람을 먼저 읽어볼 것을 추천합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출판사 소개글을 확인해보니 웬만큼 중요한 내용은 모두 감춰놓았습니다.

본문 가운데 48페이지까지의 상황, 즉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까지의 내용만 소개해놓았는데

덕분에 서평 쓰는 입장에서 아주 난감해지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소개하자니 스포일러가 될 것 같고, 안 하자니 쓸 이야기가 거의 없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에서 두루뭉술하게만 소개하자면...

 

진구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큰 위기에 빠진 끝에 구치소에 갇히고 마는데,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조직의 실체와 목적을 알아내곤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번득이는 추리와 무모해 보이는 정면대결을 통해 가까스로 자신을 구해냅니다.

하지만 그 끝은 결코 개운하지도, 해피하지도 않은 씁쓸함만 가득 남게 됩니다.

 

, 과하게 두루뭉술한가요?

아무튼... ‘진구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진구와 연부의 재회가 궁금할 것이고,

고진 시리즈까지 읽은 독자라면 이탁오 박사의 등장 소식에 귀가 솔깃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이탁오 박사의 경우 그다지 많은 분량도 아니지만 이야기의 큰 흐름을 좌지우지하는데다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불분명한,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아주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변호사 고진 역시 빛나는 카메오로서 활약하고 있고,

진구의 연인 해미는 묵직하고 빠른 스릴러 속에서 균형감을 잡아주는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여느 진구 시리즈보다 액션물의 성격이 강한 점도 매력적이고,

철저히 감춰진 비밀을 집요하게 캐내는 진구의 명탐정 캐릭터도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작가는 진구를 비롯, 고진이나 이탁오의 마무리를 위해 갈 길이 멀다는 후기를 남겼는데,

부디 이들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진행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웨스트코스트 블루스
장파트리크 망셰트 지음, 박나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파트리크 망셰트는 한국 독자에겐 다소 생소한 작가지만

프랑스 누아르 장르를 혁신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1976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누아르 혹은 범죄소설이라고도, 복수 스릴러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간략하게 요약하면, 범죄와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던 한 평범한 남자가

본의 아니게 킬러들의 타깃이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멋지게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화려한 액션과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 등

온갖 현란한 누아르와 범죄물에 익숙해진 2020년의 독자에게

웨스트코스트 블루스는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고전의 맛이라든가 작품 자체가 갖는 특별한 위상을 음미하는 것도 유의미한 경험이라

1970년대의 시대상과 함께 프랑스 누아르를 혁신했다는 이 작품의 가치를 맛보기로 했습니다.

 

주인공 조르주 제르포는 음습한 뒷골목이나 흉악한 범죄와는 무관한 기업 임원입니다.

어느 날 밤 우연히 누군가를 도운 일로 인해 그의 일상은 순식간에 악몽으로 변합니다.

이유도 모른 채 수차례나 킬러들에게 쫓기다가 살해당할 뻔 한 조르주는

끝내 자신의 힘으로 모든 진실을 알아내고 복수에 성공합니다.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독특한 작품입니다.

위기는 쉴 새 없이 닥쳐오고, 생존을 위한 조르주의 투쟁은 가련하고 가혹하지만

복수를 위한 그의 여정은 다소 무리없이 예상대로 전개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접하기 힘든 프랑스 범죄소설이라는 특별함과 함께

역시 프랑스답군!”이란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게 만드는 낯선 서사에 있습니다.

 

어딘가 일상적이지 않아 보이는 독특한 말투와 행동,

분위기 묘사를 위해 동원되는 묘한 뉘앙스의 음악과 술과 음식들,

그리고 바로 앞까지 전개된 맥락을 파괴하며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깜놀할 만한 문장 등

영미권 장르물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낯선 서사들이 작품 전반에 배어있다는 뜻입니다.

 

다소 의외인 점은 난해한 문장과 전위적(?) 묘사가 먼저 떠오르는 프랑스 작품답지 않게

아주 심플하고 슬림하고 선명한 알맹이만 잔뜩 든 작품이란 점인데,

분위기나 배경 묘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워낙 쉴 틈 없이 빠른 속도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김용언 미스테리아편집장의 군살이 조금도 없이 뼈만 발라낸 듯한 날렵한 이야기

아마도 이런 특징을 잘 포착한 평이란 생각입니다.

 

서문옮긴이의 말에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가 언급되는데,

각각 말타의 매’, ‘안녕 내 사랑한 편씩 밖에 못 읽어서 자세한 비교는 하기 어렵지만,

이 작품을 통해 소위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연상되는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하드보일드와는 전혀 결이 다른 작품이긴 하지만

두 작가의 스타일이나 주인공 캐릭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의외로 장파트리크 망셰트과 궁합이 잘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쉬웠던 점은 주인공 조르주를 위기에 빠뜨리는 킬러들과 그 배후의 캐릭터였는데,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악당 치곤 조금은 싱겁고 가볍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그런 탓에 조르주의 위기가 나이브하게 읽히기도 했고,

마지막 복수의 과정 역시 다소 쉬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1970년대 유럽의 사회경제적 분위기가 이 작품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소개글을 봤는데,

너무 알맹이 위주의 군살 없는 서사라서 그런지

수정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물결 같은 시대적 배경이 제대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주인공 조르주의 위기가 좀더 입체적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영화로 만들면 괜찮았겠다, 는 생각을 했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실제로 1980년에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주인공 조르주가 두 번 다시 이런 악몽을 겪을 리는 없을 테니 후속작은 없었을 것 같지만

장파트리크 망셰트의 작품이 추가로 한국에 소개된다면 한번쯤 더 만나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라피포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 중고서점을 배회하다가 분명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인데 낯선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검색해보니 원제가 ララピポ(라라피포)’2005년 작품으로

2006년 한국에 처음 소개될 때만 해도 원제 그대로 출간됐는데

1년 만에 개정판이 나오면서 내 인생, 니가 알아?’라는, 이상한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한 건, 2006년 초판 라라피포는 지금도 인터넷 서점에서 19금 소설인데,

2007년 개정판 내 인생, 니가 알아?’는 아무 제한 없이 구매할 수 있게 돼있다는 점입니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일단 오쿠다 히데오가 ‘19금 소설?”이라는, 소박한 의문과 한없는 호기심에

개정판 대신 19금 딱지가 붙은 초판을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좀 많이 놀랐습니다.

수록된 여섯 개의 에피소드 모두 성()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단순히 야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척이나 폭력적이고 지독히 변태적인,

그러니까 어떻게 번역을 해도 ‘19금 딱지를 피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꽉 차 있습니다.

어떻게 개정판을 냈기에 ‘19금 딱지를 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쿠다 히데오의 팬이라면 몇 배는 더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지만 등장인물들이 서로 교차하며 등장하는 연작집입니다.

여섯 명의 주인공은 작품에 실린 표현에 따르면 패배자들입니다.

명문대 출신이지만 대인공포증과 함께 변태적인 관음증을 지닌 프리랜서 기자,

여자를 등쳐먹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카바레 클럽 스카우트맨,

43살의 나이에 권태로운 일상에서 탈출하여 에로비디오 배우가 된 중년주부,

거절할 줄 몰라 스스로 자멸하고 마는 아르바이트생,

한때 유망한 소설가였지만 지금은 관능소설로 먹고 사는 50대 작가,

90kg의 몸무게에 추한 외모를 지닌 탓에 평생 뚱땡이라 불려온 여자 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성()을 매개로 서로 관계를 맺거나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습니다.

또 대부분 자의반 타의반으로 주위와 고립된, 일종의 섬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성()을 대하는 방식은 다분히 파괴적이고 변태적입니다.

2층에서 들리는 신음소리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거나

뒤늦게 깨달은 오르가즘에 물불 안 가리고 남자를 사냥하거나

자신의 공허함을 달래고자 딸보다 어린 또래와 거침없이 원조교제를 일삼거나

추한 남자들을 능욕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받으려 합니다.

 

첫 수록작을 읽곤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가 떠올랐는데.

그 작품 역시 수록된 첫 단편이 충격적일 정도로 지독한 성애 묘사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어진 작품들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의도가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했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분명 마음을 착잡하게 만드는 뭔가가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라라피포역시 그러지 않을까, 싶어 계속 읽어나갔는데,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툭툭 날리는 잽 같은 문장들은 구보 미스미와는 전혀 다른 전개,

, 갈수록 폭력과 변태와 관음의 수위가 높아지기만 할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어느 시점부터 폭력과 변태와 관음 이면의 뭔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다 읽은 지금도 그 뭔가가 무엇이라 딱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무척 불편하면서도 동시에 서늘함을 전해주는 미묘한 느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오해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아닐까, 여겨지는 대목이 있었는데...

 

세상에는 성공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뭔가를 달성하지도 못했고 남한테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보지도 못한 사람들.

타고난 재능도 없고 용모도 받쳐주지 않고 특별히 뭐 하나 자랑할 거라곤 없는 사람들.

그런데도 인생은 계속되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살고 있을까. 다들 행복할까?

생각해도 소용이 없다. 울건 웃건 어차피 인생은 계속되는 것. 내일도 모레도... (p315, 343)

 

여섯 명의 주인공 중 이 문구와 어울리는 인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마이너인 여섯 주인공이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대부분이라고 주장하는데,

원제인 라라피포가 작품 속 한 인물이 ‘A lot of people’을 잘못 알아들은 결과물인 걸 보면

그 주장을 제목에서부터 대놓고 펼쳐놓은 게 아닌가 추정되기도 합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삐딱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듯한 블랙 유머라고 할까요?

 

누군가는 계속 폭력과 변태와 관음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갈 것이고,

혹시 그들이 다른 삶의 경로를 선택한다 해도 그다지 나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 그들의 비루한 삶과 변태적인 언행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지, 앞으로 행복할지 불행할지 궁금해 할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쿠다 히데오는 이들의 삶의 단편을 지독할 정도로 파괴적으로 그렸는데,

독자마다 천차만별의 반응을 보일 것 같아 그 반응 하나하나가 무척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분의 일
기노시타 한타 지음, 김혜영 옮김 / 오후세시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초라한 인생을 한 방에 역전시키자며 의기투합하여 은행을 턴 세 사람.

운 좋게 강도질은 성공했지만 도주에 실패해 클럽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 와중에도 한 푼이라도 더 가지려고 머리를 굴리는 주인공들과

용케도 돈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하이에나떼들의 방해가 더해지며

이야기는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전개로 치닫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기노시타 한타의 악몽의 엘리베이터를 읽은 건 대략 10년 전쯤의 일입니다.

그때만 해도 이 작가의 작품이라면 무조건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작 그 뒤로 너무 무심했던 탓에 2014년에 출간된 이 작품을 이제야 읽게 됐습니다.

 

삼분의 일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그 자체인 작품입니다.

인생 막장에 다다른 끝에 은행 강도라는, 본인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짓을 벌인 3인조,

그들의 배후에서 2억 엔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탐내는 무시무시한 악당과 마녀,

그리고 승자 독식이라는 위험천만한 목표를 달성시키려는 마리아 등

다분히 영화적이고 톡톡 튀는 캐릭터들로 가득한 이야기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악몽의 엘리베이터의 줄거리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도 시종일관 업다운이 급격한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었는데,

삼분의 일역시 번번이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연이은 반전과 예상치 못한 전개 덕분에

마치 잘 만들어진 초고속 B급 액션물을 만끽한 느낌이었습니다.

 

2억 엔이라는 거금을 놓고 벌어지는 3인조의 연이은 협력과 배신의 합종연횡도 매력적이고,

그들을 꼭두각시 삼아 열매를 독차지하려는 거물급 악당들의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성도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입니다.

특히 이 모든 계획의 설계자이자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마리아는

첫 등장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활약하는데

과연 그녀의 계획이 완성될지 여부를 지켜보는 일이야말로 삼분의 일의 백미입니다.

 

기노시타 한타의 대표 시리즈는 악몽의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악몽 시리즈인데,

국내에는 악몽의 관람차까지 두 편밖에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또 검색해보니 삼분의 이’, ‘오분의 일’, ‘칠분의 일등 다양한 분수 시리즈가 출간됐고,

악몽 시리즈역시 드라이브’ ‘수족관등 몇 편 더 출간된 것으로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어느 출판사에서든 기노시타 한타의 작품을 전부 출간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가장 최근에 국내 출간된 ‘GPS 시리즈는 전혀 그답지 않은 실망감을 주긴 했지만

적어도 악몽 시리즈분수 시리즈만큼은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운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