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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코스트 블루스
장파트리크 망셰트 지음, 박나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6월
평점 :
장파트리크 망셰트는 한국 독자에겐 다소 생소한 작가지만
“프랑스 누아르 장르를 혁신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1976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누아르 혹은 범죄소설이라고도, 복수 스릴러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간략하게 요약하면, 범죄와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던 한 평범한 남자가
본의 아니게 킬러들의 타깃이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멋지게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화려한 액션과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 등
온갖 현란한 누아르와 범죄물에 익숙해진 2020년의 독자에게
‘웨스트코스트 블루스’는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고전의 맛이라든가 작품 자체가 갖는 특별한 위상을 음미하는 것도 유의미한 경험이라
1970년대의 시대상과 함께 프랑스 누아르를 혁신했다는 이 작품의 가치를 맛보기로 했습니다.
주인공 조르주 제르포는 음습한 뒷골목이나 흉악한 범죄와는 무관한 기업 임원입니다.
어느 날 밤 우연히 누군가를 도운 일로 인해 그의 일상은 순식간에 악몽으로 변합니다.
이유도 모른 채 수차례나 킬러들에게 쫓기다가 살해당할 뻔 한 조르주는
끝내 자신의 힘으로 모든 진실을 알아내고 복수에 성공합니다.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독특한 작품입니다.
위기는 쉴 새 없이 닥쳐오고, 생존을 위한 조르주의 투쟁은 가련하고 가혹하지만
복수를 위한 그의 여정은 다소 무리없이 예상대로 전개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접하기 힘든 프랑스 범죄소설이라는 특별함과 함께
“역시 프랑스답군!”이란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게 만드는 ‘낯선 서사’에 있습니다.
어딘가 일상적이지 않아 보이는 독특한 말투와 행동,
분위기 묘사를 위해 동원되는 묘한 뉘앙스의 음악과 술과 음식들,
그리고 바로 앞까지 전개된 맥락을 파괴하며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깜놀할 만한 문장 등
영미권 장르물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낯선 서사들이 작품 전반에 배어있다는 뜻입니다.
다소 의외인 점은 난해한 문장과 전위적(?) 묘사가 먼저 떠오르는 프랑스 작품답지 않게
아주 심플하고 슬림하고 선명한 ‘알맹이만 잔뜩 든 작품’이란 점인데,
분위기나 배경 묘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워낙 쉴 틈 없이 빠른 속도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김용언 ‘미스테리아’ 편집장의 “군살이 조금도 없이 뼈만 발라낸 듯한 날렵한 이야기”는
아마도 이런 특징을 잘 포착한 평이란 생각입니다.
‘서문’과 ‘옮긴이의 말’에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가 언급되는데,
각각 ‘말타의 매’, ‘안녕 내 사랑’ 한 편씩 밖에 못 읽어서 자세한 비교는 하기 어렵지만,
이 작품을 통해 소위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연상되는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하드보일드와는 전혀 결이 다른 작품이긴 하지만
두 작가의 스타일이나 주인공 캐릭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의외로 장파트리크 망셰트과 궁합이 잘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쉬웠던 점은 주인공 조르주를 위기에 빠뜨리는 킬러들과 그 배후의 캐릭터였는데,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악당 치곤 조금은 싱겁고 가볍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그런 탓에 조르주의 위기가 나이브하게 읽히기도 했고,
마지막 복수의 과정 역시 다소 쉬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1970년대 유럽의 사회경제적 분위기가 이 작품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소개글을 봤는데,
너무 알맹이 위주의 ‘군살 없는 서사’라서 그런지
수정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물결 같은 시대적 배경이 제대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주인공 조르주의 위기가 좀더 입체적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영화로 만들면 괜찮았겠다, 는 생각을 했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실제로 1980년에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주인공 조르주가 두 번 다시 이런 악몽을 겪을 리는 없을 테니 후속작은 없었을 것 같지만
장파트리크 망셰트의 작품이 추가로 한국에 소개된다면 한번쯤 더 만나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