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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피포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 중고서점을 배회하다가 분명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인데 낯선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검색해보니 원제가 ‘ララピポ(라라피포)’인 2005년 작품으로
2006년 한국에 처음 소개될 때만 해도 원제 그대로 출간됐는데
1년 만에 개정판이 나오면서 ‘내 인생, 니가 알아?’라는, 이상한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한 건, 2006년 초판 ‘라라피포’는 지금도 인터넷 서점에서 19금 소설인데,
2007년 개정판 ‘내 인생, 니가 알아?’는 아무 제한 없이 구매할 수 있게 돼있다는 점입니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일단 “오쿠다 히데오가 ‘19금 소설’을?”이라는, 소박한 의문과 한없는 호기심에
개정판 대신 19금 딱지가 붙은 초판을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좀 많이 놀랐습니다.
수록된 여섯 개의 에피소드 모두 성(性)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단순히 ‘야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척이나 폭력적이고 지독히 변태적인,
그러니까 어떻게 번역을 해도 ‘19금 딱지’를 피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꽉 차 있습니다.
어떻게 개정판을 냈기에 ‘19금 딱지’를 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쿠다 히데오의 팬이라면 몇 배는 더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지만 등장인물들이 서로 교차하며 등장하는 연작집입니다.
여섯 명의 주인공은 작품에 실린 표현에 따르면 ‘패배자들’입니다.
명문대 출신이지만 대인공포증과 함께 변태적인 관음증을 지닌 프리랜서 기자,
여자를 등쳐먹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카바레 클럽 스카우트맨,
43살의 나이에 권태로운 일상에서 탈출하여 에로비디오 배우가 된 중년주부,
거절할 줄 몰라 스스로 자멸하고 마는 아르바이트생,
한때 유망한 소설가였지만 지금은 관능소설로 먹고 사는 50대 작가,
90kg의 몸무게에 추한 외모를 지닌 탓에 평생 뚱땡이라 불려온 여자 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성(性)을 매개로 서로 관계를 맺거나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습니다.
또 대부분 자의반 타의반으로 주위와 고립된, 일종의 섬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성(性)을 대하는 방식은 다분히 파괴적이고 변태적입니다.
2층에서 들리는 신음소리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거나
뒤늦게 깨달은 오르가즘에 물불 안 가리고 남자를 사냥하거나
자신의 공허함을 달래고자 딸보다 어린 또래와 거침없이 원조교제를 일삼거나
추한 남자들을 능욕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받으려 합니다.
첫 수록작을 읽곤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가 떠올랐는데.
그 작품 역시 수록된 첫 단편이 충격적일 정도로 지독한 성애 묘사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어진 작품들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의도가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했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분명 마음을 착잡하게 만드는 뭔가가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라라피포’ 역시 그러지 않을까, 싶어 계속 읽어나갔는데,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툭툭 날리는 잽 같은 문장들은 구보 미스미와는 전혀 다른 전개,
즉, 갈수록 폭력과 변태와 관음의 수위가 높아지기만 할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어느 시점부터 폭력과 변태와 관음 이면의 뭔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다 읽은 지금도 그 ‘뭔가’가 무엇이라 딱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무척 불편하면서도 동시에 서늘함을 전해주는 미묘한 느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오해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아닐까, 여겨지는 대목이 있었는데...
세상에는 성공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뭔가를 달성하지도 못했고 남한테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보지도 못한 사람들.
타고난 재능도 없고 용모도 받쳐주지 않고 특별히 뭐 하나 자랑할 거라곤 없는 사람들.
그런데도 인생은 계속되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살고 있을까. 다들 행복할까?
생각해도 소용이 없다. 울건 웃건 어차피 인생은 계속되는 것. 내일도 모레도... (p315, 343)
여섯 명의 주인공 중 이 문구와 어울리는 인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마이너’인 여섯 주인공이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대부분’이라고 주장하는데,
원제인 ‘라라피포’가 작품 속 한 인물이 ‘A lot of people’을 잘못 알아들은 결과물인 걸 보면
그 주장을 제목에서부터 대놓고 펼쳐놓은 게 아닌가 추정되기도 합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삐딱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듯한 블랙 유머라고 할까요?
누군가는 계속 폭력과 변태와 관음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갈 것이고,
혹시 그들이 다른 삶의 경로를 선택한다 해도 그다지 나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또, 그들의 비루한 삶과 변태적인 언행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지, 앞으로 행복할지 불행할지 궁금해 할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쿠다 히데오는 이들의 삶의 단편을 지독할 정도로 파괴적으로 그렸는데,
독자마다 천차만별의 반응을 보일 것 같아 그 반응 하나하나가 무척 궁금해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