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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에서 춤추다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풍신 블레이드라는 악덕 기업의 피해자들은
스스로 확신범이 되어 관계자들에게 직접 철퇴를 가하고자 한다.
제각기 사연이 있는 피해자들이 직접 경영진들을 살해함으로써 복수를 실행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긴 피해자 모임 안에서 예기치 않게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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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전공’은 본격 미스터리라고 하는데
앞서 읽은 두 작품은 그가 잠시 외도(?)한 작품들이지만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는 점,
그리고 뒤늦게 접한 그의 ‘전공’은 앞선 작품들에 비해 아쉬움이 컸다는 점입니다.
‘절벽 위에서 춤추다’는 띠지의 홍보글대로 복수극과 클로즈드 서클이 믹스된 작품입니다.
폭발적인 판매를 기록한 가정용 풍력발전기의 부작용으로 인해
가족을 잃었거나 스스로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이 사적 복수를 위해 모입니다.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갈 것이 분명한 경영진들을 직접 죽이겠다는 게 그들의 목표입니다.
살인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아지트는 해당 기업의 직원 리조트.
하지만 그들의 복수극이 절반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역시 띠지의 홍보글대로 ‘동료가 동료를 죽이는’ 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경찰에 알릴 수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어 저절로 클로즈드 서클이 된 리조트 안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화자가 범인을 찾아내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거론될 만큼 악덕 기업의 문제가 심각하지만
그 피해자들이 ‘살인’이라는 방법으로 직접 응징을 다짐한 설정이라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가끔 뉴스를 통해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면
그들 마음속에 ‘살의’가 생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봤기 때문인데,
정작 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는 피해자들, 즉 ‘아군’ 사이에 벌어진 참혹한 살인극입니다.
리조트 안에 모인 피해자 모임의 멤버들은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연이어 시신이 발견되지만 단서나 증거를 통한 조사 같은 건 할 수도 없고
그저 “누가, 왜?”라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래서인지 중반까지는 나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지만
그 후로는 ‘논리 대결과 추정의 동어반복’이 대부분이라 다소 지루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사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들의 추정은 대체로 공상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공상에 힘을 얹어줄 단서 같은 건 아예 없고,
“난 이쪽 말이 맞는 것 같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식의 공허한 논쟁들이 대부분입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어느 쪽 주장이 그럴 듯 한지 촉각이 곤두서게 되지만,
희생자가 계속 나오는데도 논쟁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만 맴돕니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 작가 스스로 “등장인물들의 난상토론을 통해 진상을 밝히는 것”이
자신만의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는데,
난상토론과 논리 싸움이라는 독특한 해법은 둘째 치고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동기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호하고 추상적이어서
앞서 벌어진 그 숱한 난상토론 자체의 무게감도 많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이시모치 아사미의 본격 미스터리 대표작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는 아직 못 읽었는데,
읽게 된다면 그의 ‘전공’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또, 이 작품으로 이시모치 아사미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절대 실망부터 하지 말고,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를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톤과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정말 매력적으로 읽을 수 있는 미스터리이기 때문입니다.
(사족이지만, 작품 내용과 조금도 연관 없어 보이는 표지 디자인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