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 들판에서
리스 보엔 지음, 정서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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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공습에 이어 독일군의 본토 공격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영국 전역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1941. 런던 근교 켄트의 대저택 팔리 플레이스의 웨스트햄 백작 가문은 하늘에서 떨어진 난데없는 의문의 시체 때문에 혼란에 빠집니다. 일련의 조사 끝에 모종의 목적을 갖고 침투하려던 독일 스파이라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웨스트햄 백작의 3녀인 패멀라를 흠모해온 MI5(영국 정보국) 요원 벤 크로스웰은 상부로부터 이 수상한 시체가 접선하려던 자가 누군지 비밀리에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한편 암호해독 기관에서 근무하는 패멀라는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내려와 벤 크로스웰의 조사에 동참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스파이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내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역사 미스터리 첩보물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팔리 저택과 인근에 거주하는 인물들 가운데 스파이와 접선하려던 자, 즉 나치 독일에 협조하는 배신자를 찾아내는 이야기인데, 재미있는 건 딱딱하고 무거운 첩보물이 아니라 종합선물세트같은 다양한 장르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전쟁과 스파이가 전면에 포진돼있지만 달달한 로맨스와 함께 전쟁으로 인해 억압받은 청춘들의 들끓는 욕망도 적잖은 분량과 비중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작의 3녀 패멀라를 오래 전부터 흠모해온 벤은 그녀의 마음이 온통 자신의 절친인 제레미에게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전쟁은 세 남녀를 각각 정보국(), 암호해독 기관(패멀라), 전쟁터(제레미)로 흩어놓았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팔리 플레이스로 돌아오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벤은 독일 스파이와 접선하려던 배신자를 찾기 위해, 패멀라는 연이은 야근에 시달린 뒤 반강제로 받은 휴가 때문에, 그리고 제레미는 독일군 포로가 됐다가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면서 다시금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주인공이지만 슈퍼 히어로가 아닌 탓에 벤의 미션은 다소 지루하고 답답한 행보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사랑하는 패멀러의 도움으로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해냅니다. 그 와중에도 벤은 눈앞에서 제레미와 패멀러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겪는데 이 대목은 전쟁과 스파이의 공포를 잊게 만들 정도로 달달하게 전개됩니다. 특히 귀환한 제레미가 사랑보다 자신의 육체에만 관심을 갖자 실망과 회의를 느끼는 패멀라의 불안한 심리라든가 파티와 여자만 즐기려는 타고난 금수저 한량인 제레미의 폭주는 배신자 찾기못잖게 삼각 로맨스가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배신자 찾기삼각 로맨스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던 건 욕구를 배출하지 못해 폭발 직전에 이른 당시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교계에 진출해 멋진 남자를 만나려던 명문가의 딸들은 모든 걸 금지시킨 전쟁을 원망했고, 자유연애와 방종한 성()에 눈이 벌개졌던 남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를 전쟁터로 끌려 나가야만 했습니다. 억압된 욕구는 때론 독일군의 공습이 이뤄지는 한밤중에 옥상에서 위험천만한 샴페인 파티를 벌이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왜 하필 이런 세상에 태어났을까, 라는 한숨과 자조가 생생하게 귀에 들리는 듯한 당시 청춘들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스릴 넘치는 전쟁첩보물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밋밋하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여러 장르가 재치 있게 믹스된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리스 보엔은 다수의 미스터리 시리즈를 집필한 작가라고 하는데, 검색해보니 한국에는 193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탐정 레이디 조지애나’(2012, 문학동네) 단 한 편만 출간된 상태입니다.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조지애나가 왕족 신분을 벗어던지고 탐정으로 거듭나는 코지 미스터리라는데, 딱히 제 취향은 아니지만 시대 배경도 호기심을 끌고 왠지 팔리 들판에서처럼 매력적인 캐릭터와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다른 독자의 서평에서도 언급된 내용인데, 꽤 자주 등장하는 이크!”라는 감탄사가 눈에 거슬린 게 사실입니다. 때론 분위기를 확 깨뜨리기도 했는데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었을지 궁금합니다. ‘MI5’‘MI파이브가 혼재된 건 교정의 오류로 보였고, ‘5로 표기됐더라면 좀더 이해하기 쉬웠을 제오열내부의 적을 상징한다.”는 간단한 각주나 설명조차 없어서 처음 이 단어를 접하는 독자는 다소 어리둥절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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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에 킬러가 산다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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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기숙사에 사는 코타리 토모야는 새벽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소리가 마치 칼이나 톱 따위로 시체를 자르는 것처럼 들리자 공포에 휩싸입니다. 때마침 인근에서 토막 난 여성들의 사체가 연이어 발견되자 코타리는 옆방에 사는 기분 나쁜 인상의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심을 굳히게 되고, 급기야 새벽녘 그를 미행하기에 이릅니다. 실제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코타리는 그대로 얼어붙지만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까 두려워 경찰에 신고도 못한 채 전전긍긍할 따름입니다.

 

17번째로 만난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입니다. 한국 출간작이 26편인데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 ‘법의학교실 시리즈를 제외하곤 스탠드얼론까지 모두 읽은 셈입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을 과하게 읽다 보면 피로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라 그의 작품을 좀 쉬엄쉬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매번 신간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게 사실인데, 분량(348p)도 얼마 안 되고 제목이나 표지로 보아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번에도 결국 그의 마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은 (매번 만점을 줄 수는 없었지만) 나름 신선하고 충격적인 막판 반전이 매력적이었던 탓에 주인공이 일찌감치 이웃의 연쇄살인마를 인지해버린 이 작품의 경우 남은 분량을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갈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직접 범죄현장을 목격한 코타리가 공포에 휩싸이는 것 말곤 딱히 할 일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코타리를 위해 두 가지 큰 설정을 준비합니다. 하나는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코타리의 비밀스런 과거이고, 또 하나는 연애라고까진 할 수 없어도 코타리가 소중히 여기며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사내 동료 베츠미야 사호리입니다.

감춰야만 하는 과거 때문에 경찰과의 만남을 두려워한 코타리는 익명의 신고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경찰의 심문까지 피하진 못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경찰의 의심을 사게 되면서 코타리의 공포는 점점 더 극심해지고 맙니다. 더구나 자신의 의심을 눈치 챈 듯한 이웃남자가 어쩌면 자신이 아끼는 사호리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 코타리는 단독으로 사호리를 경호하기로 결심하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이웃의 연쇄살인마에 대한 공포 외에 코타리에게 부여된 감춰야 할 과거지켜야 할 연인이란 두 가지 설정 덕분에 이야기는 꽤 촘촘하고 찰지게 전개됩니다. 또 나카야마 시치리의 트레이드마크인 막판 반전을 감안하면 이웃의 연쇄살인마 외에 분명 누군가 독자의 뒤통수를 칠 의외의 인물이 있을 게 분명하기에 그 인물을 찾으며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답지 않게 중후반부쯤 진범의 정체와 범행동기를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고, 그 예상대로 흘러간 엔딩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준 건 사실이지만 작품 자체가 가벼워 보여서 그랬는지 크게 위화감이 들거나 불만족스럽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만 보면 중편이면 충분했을 이야기를 장편으로 늘린 부작용이 곳곳에서 보여서 살짝 지루해지기도 했는데, 과도하게 부풀려진 사족들(코타리의 과거, 경찰을 비롯한 조연들의 역할 등)이라든가 비슷한 상황의 동어반복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출판사에 대한 불만을 한두 가지만 언급하고 싶은데, 최소한의 교정조차 안 한 것 같은 숱한 줄 바꾸기 오류는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고, 인터넷 서점에 원작 제목(はシリアルキラー)과 일본 출간시점(2020)을 소개하지 않은 건 무성의해 보였습니다. , 오프라인 서점에서라면 집어 드는 것 자체가 주저될 것 같은 유치한 표지는 차라리 원작 표지를 그대로 갖고 오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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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복수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단숨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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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관절 마디마디가 부러진 나탈리의 시신이 발견되지만 경찰은 그녀가 매춘부라며 마약중독자의 사고사로 단정합니다. 하지만 현장출동팀의 발터 풀라스키 형사는 타살의 가능성을 직감하곤 단독수사에 착수합니다. 문제는 나탈리의 엄마 미카엘라가 따라붙었다는 점. 딸의 살해범을 찾겠다는 일념에 빠진 미카엘라는 수시로 풀라스키의 수사를 방해하지만 때론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확인한 풀라스키는 단서를 찾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합니다. 마침 빈에서는 (전작 여름의 복수에서 풀라스키와 호흡을 맞췄던) 변호사 에블린 마이어스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있습니다. 자신의 의뢰인이 연쇄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 것입니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 풀라스키와 에블린은 결국 기이하고 끔직한 사건 앞에서 재회하게 됩니다.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천재 프로파일러 슈나이더와 매력적인 여형사 자비네가 활약하는 슈나이더 시리즈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발터 풀라스키 시리즈역시 서사나 캐릭터는 물론 잔혹함에 있어서도 거의 비슷한 톤과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작인 여름의 복수도 마찬가지였지만, 기괴한 형태로 발견되는 희생자들, 소시오패스적인 욕망과 망상에 휩싸여 참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 그리고 진실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두 주인공 등 가을의 복수는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개성과 함께 독일(또는 북유럽) 스릴러의 전형성을 고루 갖춘 작품입니다.

 

주인공 발터 풀라스키는 작가의 또 다른 주인공 슈나이더와 비교하면 참 초라해 보입니다. 50대의 나이에, 천식을 앓는 이유로 수사와는 거리가 먼 현장출동팀에 머물고 있는 그는 외형만 보면 은퇴 직전의 사람 좋은 아저씨에 불과하지만, 경찰로서의 열정, 추리력, 판단력에 관한 한 슈나이더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풀라스키 못잖은 활약을 펼치는 희생자의 어머니 미카엘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인물이자 실질적인수사를 진행하는 정말 독특한 인물인데, 굳이 비교하자면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거칠고 정의로운 여전사와 비견할 만한 캐릭터입니다. 번번이 풀라스키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며 독단적으로 수사를 벌이는 그녀의 행동은 처음엔 민폐 캐릭터처럼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뒤로 갈수록 풀라스키에게 이보다 더 멋진 파트너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진화합니다.

풀라스키와 미카엘라의 활약이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세컨드 주인공인 변호사 에블린 마이어스는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인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차고 집요한 캐릭터는 전작에 못잖게 매력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하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아쉬운 대목은 범인의 범행동기입니다. 독일과 북유럽 작품 중 형이상학적 또는 주술적 목적을 지닌 범인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데 이런 설정은 공감하기 어려운 신비주의 또는 억지 설정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가을의 복수의 범인 역시 다분히 그런 냄새를 풍기는데, 그런 탓에 이야기에 100% 몰입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만점에서 별 1개가 사라진 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주인공도 스릴러도 매력이 철철 넘치는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 작품(한국출간 2017) 이후로 더는 발터 풀라스키 시리즈를 한국에서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검색해보니 원작 자체도 겨울의 복수’(Rachewinter, 2018) 한 편만 더 출간된 걸로 나오는데, 이 작품이라도 조만간 한국 독자들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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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죄 : 검은 강 심리죄 시리즈
레이미 지음, 이연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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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 팡무는 자신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공안국 부국장 싱즈썬이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자 큰 충격을 받는다. 싱즈썬은 아동 인신매매 조직 수사를 위해 부하를 위장잠입 시켰는데 그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인신매매 조직의 함정에 빠지고 만 것. 하지만 CCTV는 물론 싱즈썬의 무고함을 밝혀줄 단서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 팡무는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경찰 내의 분위기마저 우호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팡무는 싱즈썬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 납치된 여자아이들이 해외로 팔려 나가는 정황을 파악하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프로파일링’, ‘교화장에 이은 심리죄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주인공 팡무는 학생 시절부터 천재적인 프로파일링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서 벌어진 끔찍한 연쇄살인을 해결한 바 있고(‘프로파일링’), 졸업 후 경찰이 된 직후에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범죄 집단을 응징한 적도 있습니다.(‘교화장’)

이 작품 속 팡무에게선 이제 제법 베테랑의 품격까지 느낄 수 있는데, 그런 탓인지 그가 마주한 사건 역시 스케일도 커지고 비극이나 잔혹성의 깊이는 전작들보다 훨씬 더 깊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던 싱즈썬의 무고를 밝히고 그를 함정에 빠뜨린 아동 인신매매 조직을 쫓는 팡무의 여정은 외로움과 고달픔 그 자체입니다. 싱즈썬의 혐의를 벗길 만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자 경찰 내부에선 딱히 적극적인 수사를 벌이지도 않는 것은 물론 일부 간부들은 그의 자리를 탐내는 속내를 감추지 않기도 합니다. 더구나 자신의 행보가 번번이 누군가에게 간파당하자 팡무는 경찰 내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맙니다.

애초 위장잠입을 시켰던 부하 외에 싱즈썬이 아무하고도 수사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음을 의아하게 여겼던 팡무는 뒤늦게 싱즈썬이 말할 수 없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고 그 때문에 사적인 복수를 도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곤 상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단독수사에 나섭니다. 그리고 몇 차례나 목숨이 날아갈 위기를 겪은 끝에 진실을 찾아내고 악의 세력들을 일망타진합니다.

 

사실 심리죄 시리즈는 전반적으로 선명하고 명쾌한 구조의 작품들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주인공 팡무가 프로파일러라 그런지 범죄 자체도 기괴하고 범행동기나 심리 역시 다소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작품인 검은 강은 전작들에 비하면 악당들의 캐릭터나 범행 자체가 구체적인데다, 팡무의 활약도 프로파일러보다는 물불 안 가리는 열혈형사에 가까워서 수월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물론 곳곳에서 프로파일러 팡무의 맹활약도 맛볼 수 있어서 여러 가지 재미가 골고루 담겨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범죄조직의 수법과 범행 스케일, 그리고 팡무의 목숨을 건 활약들 가운데 다소 사실감이 떨어지는 설정들이 자주 발견돼서 읽는 동안 여러 차례 위화감 또는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 없어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런 아쉬움들이 적잖이 쌓인 탓에 높은 평점을 주기는 어려웠습니다.

막다른 벽에 가로막힌 팡무의 다음 행보를 위한 단서들은 때론 너무 쉽게, 때론 느닷없는 조력자에 의해 제공됐고, 몇 차례 팡무의 목숨을 위협했던 극단의 위기들은 조금은 억지스럽게 해소되곤 합니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의 단독수사에 임한 팡무가 막판에 악당들을 예상외의 방법으로 궤멸시키는 대목은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한 나머지 허구의 냄새가 과하게 풍긴 점도 아쉬움 중 하나였습니다. , 소녀들을 해외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조직의 범행 수법도 그 규모나 잔악함에 비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질 정도로 어수룩하거나 허술해 보여서 현실감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몇몇 아쉬움은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전작들에 비해 페이지터너로서의 위력은 가장 매력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쓰며 숱한 위기를 넘긴 팡무가 프로파일러를 넘어 뛰어난 현장 전문가로 성장하는 대목도 계속 눈길을 끌었는데, 덕분에 과연 다음에는 팡무가 어떤 사건들과 마주하게 될지 무척 기대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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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카르테 4 - 의사의 길 아르테 오리지널 9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김수지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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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文豪) 나쓰메 소세키를 사랑하는 괴짜 내과의사 구리하라 이치토가 ‘24시간 365일 진료를 내세운 혼조병원에 근무하다가 더 나은 의사가 되기 위해 시나노대학 의학부에 들어간 지도 벌써 2. 대학원생이자 의사로서 바쁜 나날들을 보내는 그는 환자를 끌어당기는 구리하라라는 별명답게 시나노대학에 온 이후로도 유독 환자복(?)이 많은 신세. 4내과 3팀에서 실질적인 리더를 맡고 있는 구리하라는 정의감에 불타는 후배 의사들에게 공감하면서도, 모순투성이의 대학병원이라는 조직에도 나름대로 순응하려 한다. 하지만 생애 마지막을 가족과 보내고 싶어 하는 29세의 췌장암 환자 후타쓰기의 치료법을 둘러싸고, 의국의 실권을 장악한 우사미 준교수와 격하게 부딪치고 마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나쓰카와 소스케의 신의 카르테 1’을 만난 건 2011년 봄(당시 출판사는 작품’)의 일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줄거리 자체는 가물가물하지만,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 & 시라토리트 시리즈나 일본 드라마 하얀 거탑과는 사뭇 다른 따뜻하고 감동적인 의사 이야기라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미스터리에 열중하던 저로서는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2011년 가을 신의 카르테 2’까지 출간되곤 이후 오랫동안 후속작 소식이 없었는데, 2018년에 아르테에서 앞선 두 편의 개정판은 물론 신의 카르테 3’, ‘신의 카르테 0’까지 한꺼번에 출간돼서 잠시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뒤늦게 신의 카르테 4’를 통해서야 거의 10년 만에 나쓰카와 소스케와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10년 전 내가 읽었던 그 구리하라 이치토가 맞나?”라는 의문이 들곤 했는데, 열정과 따뜻한 품성을 지녔지만 아직은 의사로서 미숙한 캐릭터로만 기억하고 있던 그가 어느 새 산전수전과 풍파를 겪은 끝에 베테랑의 품격까지 갖춘 멋진 의사로 성장해있었기 때문입니다.

환자를 끌어당기는 구리하라라는 별명답게 시나노대학 소화기 제4내과 3팀의 실질적 리더를 맡은 구리하라는 만만치 않은 환자들을 쉴 새 없이 받아들입니다. 오로지 환자에만 집중하는 구리하라는 조직의 논리와 효율적인 운영만을 우선시하는 의국과 사사건건 부딪히면서도 끝내 자신의 고집을 관철시키는 진정한 의사의 모습을 수시로 보여줍니다.

 

다양한 에피소드가 시추에이션 드라마처럼 전개돼서 장편이라기보다는 연작단편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중에서도 메인 스토리라 부를 만한 것은 29살의 췌장암 말기 환자 후타쓰기를 전력으로 치료하는 구리하라의 분투입니다. 무의미한 치료를 거부하고 집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그녀를 진심을 다해 설득하여 병원으로 데려온 구리하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지만, 끝내 죽음은 집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그녀의 간절함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하지만 대학병원의 경직된 규칙과 가이드라인이 그녀의 희망을 짓밟고 퇴원을 가로막자 구리하라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은 구리하라 본인도 깜짝 놀랄 만한 충격적인 결과를 불러옵니다.

 

대학병원을 부조리와 불합리와 모순이라는 세 개의 기둥을 세우고 권위라는 커다란 지붕을 얹은 곳.”(p36)으로 여기면서도 구리하라는 나름 그곳의 규칙에 적응하려고 애씁니다. 대학병원은 그곳 나름대로의 역할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 탓에 정의감에 휩싸인 열혈 후배에게 의심어린 눈초리를 받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대학병원의 병폐를 깨뜨리는데 가장 앞장서는 것은 다름 아닌 구리하라 본인입니다. 대학병원 안팎에는 이런 구리하라를 지지하는 아군들이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응원을 보내줍니다. 독자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흐뭇하고 가슴 벅찬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작품에는 유독 서평에 인용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만큼 공감되는 문장도 많았고, 구리하라의 품격을 돋보이게 만드는 멋진 문장도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진지함이란 진검승부라는 뜻.”이라는, 구리하라가 종종 인용한 나쓰메 소세키의 명문입니다. 의국 상층부에게 진지함이란 그저 조직을 위해 규칙과 가이드라인을 성실히 지키겠다는 마음가짐에 불과하지만, 구리하라에겐 목숨을 내걸 수 있는 진심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구리하라가 자신에게 의지하는 모든 환자들은 물론 병원 안팎의 인물들에게 신망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진지함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부제인 의사의 길은 어쩌면 구리하라의 진지함이라고 바꿔 써도 무방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역설적으로 그에게 큰 위기와 고난을 안겨 주는 것 역시 바로 이 진지함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쓴 서평만 놓고 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내 무겁고 시니컬한 분위기의 메디컬 소설로 오해할 수 있는데, 실은 수시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해학과 유머가 풍부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맛깔스런 조연들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고, 구리하라와 그의 가족이 머무는 오래된 여관 온타케소가 내뿜는 블랙코미디와 낭만 역시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든든한 버팀목이자 조언자의 역할을 맡은 구리하라의 아내 하루나와 선천적으로 고관절에 문제를 지녔지만 밝고 씩씩하게 성장하는 딸 고하루 역시 대학병원의 숨 막히는 분위기를 적절히 상쇄시켜주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인물들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당장 이 시리즈를 첫 편부터 순서대로 읽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주위에 이런 의사가 한 명쯤 존재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만드는 구리하라 이치토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됐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진지함이란 것이 어떻게 다져지고 뭉쳐졌는지, 거기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친 조연들은 어떤 모습들이었는지도 찬찬히 지켜보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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