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카르테 4 - 의사의 길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김수지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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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文豪) 나쓰메 소세키를 사랑하는 괴짜 내과의사 구리하라 이치토가 ‘24시간 365일 진료를 내세운 혼조병원에 근무하다가 더 나은 의사가 되기 위해 시나노대학 의학부에 들어간지도 벌써 2. 대학원생이자 의사로서 바쁜 나날들을 보내는 그는 환자를 끌어당기는 구리하라라는 별명답게 시나노대학에 온 이후로도 유독 환자복(?)이 많은 신세. 4내과 3팀에서 실질적인 리더를 맡고 있는 구리하라는 정의감에 불타는 후배 의사들에게 공감하면서도, 모순투성이의 대학병원이라는 조직에도 나름대로 순응하려 한다. 하지만 생애 마지막을 가족과 보내고 싶어 하는 29세의 췌장암 환자 후타쓰기 씨의 치료법을 둘러싸고, 의국의 실권을 장악한 우사미 준교수와 격하게 부딪치고 마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나쓰카와 소스케의 신의 카르테를 처음 만난 건 2011년 봄(당시 출판사는 작품’)의 일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줄거리 자체는 가물가물하지만,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시리즈나 일본 드라마 하얀 거탑과는 사뭇 다른 따뜻하고 감동적인 의사 이야기라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미스터리에 열중하던 저로서는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2011년 가을 신의 카르테 2’까지 출간되곤 이후 오랫동안 후속작 소식이 없었는데, 2018년에 아르테에서 앞선 두 편의 개정판은 물론 신의 카르테 3’, ‘신의 카르테 0’까지 한꺼번에 출간돼서 잠시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뒤늦게 신의 카르테 4’를 통해서야 거의 10년 만에 나쓰카와 소스케와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10년 전 내가 읽었던 그 구리하라 이치토가 맞나?”라는 의문이 들곤 했는데, 열정과 따뜻한 품성을 지녔지만 아직은 의사로서 미숙한 캐릭터로만 기억하고 있던 그가 어느 새 산전수전과 풍파를 겪은 끝에 베테랑의 품격까지 갖춘 멋진 의사로 성장해있었기 때문입니다. (31살에 시리즈 첫 편을 출간했던 현직 의사인 작가 본인도 이 작품이 출간된 2019년에는 41살의 베테랑이 돼있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환자를 끌어당기는 구리하라라는 별명답게 시나노대학 소화기 제4내과 3팀의 실질적 리더를 맡은 구리하라는 만만치 않은 환자들을 쉴 새 없이 받아들입니다. 오로지 환자에만 집중하는 구리하라는 조직의 논리와 효율적인 운영만을 우선시하는 의국과 사사건건 부딪히면서도 끝내 자신의 고집을 관철시키는 진정한 의사의 모습을 수시로 보여줍니다.

 

다양한 에피소드가 시추에이션 드라마처럼 전개돼서 장편이라기보다는 연작단편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중에서도 메인 스토리라 부를 만한 것은 29살의 췌장암 말기 환자 후타쓰기를 전력으로 치료하는 구리하라의 분투입니다. 무의미한 치료를 거부하고 집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그녀를 진심을 다해 설득하여 병원으로 데려온 구리하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지만, 끝내 죽음은 집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그녀의 간절함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하지만 대학병원의 경직된 규칙과 가이드라인이 그녀의 희망을 짓밟고 퇴원을 가로막자 구리하라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은 구리하라 본인도 깜짝 놀랄 만한 충격적인 결과를 불러옵니다.

 

대학병원을 부조리와 불합리와 모순이라는 세 개의 기둥을 세우고 권위라는 커다란 지붕을 얹은 곳.”(p36)으로 여기면서도 구리하라는 나름 그곳의 규칙에 적응하려고 애씁니다. 대학병원은 그곳 나름대로의 역할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 탓에 정의감에 휩싸인 열혈 후배에게 의심어린 눈초리를 받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대학병원의 병폐를 깨뜨리는데 가장 앞장서는 것은 다름 아닌 구리하라 본인입니다. 대학병원 안팎에는 이런 구리하라를 지지하는 아군들이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응원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흐뭇하고 가슴 벅찬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작품에는 유독 서평에 인용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만큼 공감되는 문장도 많았고, 구리하라의 품격을 돋보이게 만드는 멋진 문장도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진지함이란 진검승부라는 뜻.”이라는, 구리하라가 종종 인용한 나쓰메 소세키의 명문입니다. 의국 상층부에게 진지함이란 그저 조직을 위해 규칙과 가이드라인을 성실히 지키겠다는 마음가짐에 불과하지만, 구리하라에겐 목숨을 내걸 수 있는 진심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구리하라가 그에게 의지하는 모든 환자들은 물론 병원 안팎의 인물들에게 신망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진지함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부제인 의사의 길은 어쩌면 구리하라의 진지함이라고 바꿔 써도 무방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역설적으로 그에게 큰 위기와 고난을 안겨 주는 것 역시 바로 이 진지함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쓴 서평만 놓고 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내 무겁고 시니컬한 분위기의 메디컬 스토리로 오해할 수 있는데, 실은 수시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해학과 유머가 풍부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맛깔스런 조연들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고, 구리하라와 그의 가족이 머무는 오래된 여관 온타케소가 내뿜는 블랙코미디와 낭만 역시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현모양처로 그려져서 남자인 저조차 살짝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든든한 버팀목이자 조언자의 역할을 맡은 구리하라의 아내 하루나와 태어나면서 고관절에 문제를 지녔지만 밝고 씩씩하게 성장하는 딸 고하루 역시 대학병원의 숨 막히는 분위기를 적절히 상쇄시켜주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인물들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당장 이 시리즈를 첫 편부터 순서대로 읽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주위에 이런 의사가 한 명쯤 존재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만드는 구리하라 이치토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됐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진지함이란 것이 어떻게 다져지고 뭉쳐졌는지, 거기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친 조연들은 어떤 모습들이었는지도 찬찬히 지켜보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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