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룸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7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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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룸블랙박스이후 한국에 2년 만에 소개된 해리 보슈 시리즈의 신작이자 17번째 작품입니다. 원작 출간이 2014년이니 무려 7년이 지나서야 한국 독자와 만나게 된 셈인데, 미국에선(2020년 기준) ‘해리 보슈 시리즈’ 23편이자 미키 할러 시리즈’ 6편인 ‘The Law of Innocence’가 출간됐다고 하니 시리즈 팬 입장에선 아직 읽을 작품이 많이 남았다는 기대감도 들지만 동시에 너무 늦어지고 있는 한국 출간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버닝 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 출발의 인상을 주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시리즈 14나인 드래곤부터 시작됐던 개성 없는 표지들이 사라지고 강렬하고 화려한 표지가 등장한 점입니다. 개인적으론 여전히 나인 드래곤이전의 표지들이 그립지만 그래도 전집류 같은 획일적인 표지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내용면에서는 해리 보슈의 새로운 파트너 루시아 소토(이하 루시)가 등장한 점이 눈길을 끌었는데, 멕시코계 미국인, 5년도 안 된 신참, 강력계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체구 등 그동안의 보슈의 파트너들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무장 강도떼와의 총격전으로 스타덤에 오른 그녀는 럭키라는 별명처럼 행운을 몰고 다니는 것은 물론 침착하고 신중한 태도,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아는 총명함, 신참임을 무색하게 만드는 노련함 등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형사이기도 합니다. 애초 신경 쓰이는 교육생정도로 루시를 대했던 보슈는 함께 수사를 하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인재인지를 여러 차례 깨닫곤 합니다.

 

미제사건 전담반 소속의 보슈와 루시는 10년 전 광장 한복판에서 악단 연주자가 피격됐던 사건을 맡습니다. 최근 그 연주자가 사망하면서 몸 안에 박혀있던 총알을 회수할 수 있게 됐고 그 총알을 단서 삼아 범인을 찾아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정치적 거물과 그를 후원하는 재력가가 연루돼있는 탓에 두 사람의 수사는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한편 보슈는 루시가 다른 미제사건에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아냅니다. 21년 전의 방화사건이 그것인데, 루시는 당시 어린 희생자가 많았던 그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였고, 경찰이 된 뒤 언젠가 그 사건을 직접 파헤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슈는 상부에 알리지 않은 채 루시를 돕습니다. 하지만 21년이란 시간은 두 사람에겐 큰 장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리즈 15드롭에서 퇴직유예제도(DROP)를 통해 형사로서의 삶을 39개월 연장받았던 보슈는 이제 퇴직까지 겨우 12개월 남짓한 시간만을 남겨놓은 상태입니다. 오랜 시간 몸담았던 경찰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착잡함을 감출 수 없던 그에게 유능하고 예의바른 신참 루시는 새로운 희망을 심어줍니다.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자신만의 노하우를 이 똑부러진 후배에게 모두 전수해주고 싶어진 것입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끝물 고참과 쌩쌩 신참의 케미는 지금껏 맛보지 못한 해리 보슈 시리즈의 신선하고 흥미로운 대목이었습니다.

 

여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수사는 난항과 장벽에 수시로 부딪힙니다. 조기 해결을 강요하면서도 예산에는 인색한 상부,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정치가와 재력가, 하이에나 같은 언론의 관심까지 더해져 보슈와 루시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또 루시가 연루된 21년 전 방화사건 역시 좀처럼 진척을 보지 못한 채 답답한 행보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1/3지점까지는 예전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리고 처진다는 느낌을 받은 게 사실입니다.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완만한 신중함이 도드라졌고, 전광석화 같은 속도감보다는 거북이걸음 같은 꼼꼼함과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식의 디테일이 더 강조됐다는 뜻입니다.

 

뜨거운 문은 조심해야지. 불타는 방의 문을 섣불리 열면 안 되잖아.”(p187)

 

하지만 신참 루시의 캐릭터와 활약 덕분에 이 모든 아쉬움들이 어느 정도 상쇄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장래 경찰을 꿈꾸는 보슈의 17살 딸 매디의 미래를 보는 것 같기도 해서 더 이입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마이클 코넬리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루시는 다음 작품인 ‘The Crossing’까지만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루시가 보슈 곁을 떠나는 상황은 두세 가지 정도로 예상할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그저 아쉬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경찰로서의 삶이 12개월 남짓 남은 보슈가 LA경찰국 미제사건 전담반으로 활약할 작품은 잘 해야 두 편 정도일 것 같은데, 언제나 그랬듯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지 않은 버닝 룸의 결말이 잘 해야 두 편 정도일 것 같은 보슈의 남은 경찰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벌써부터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입니다. 부디 다음 작품 ‘The Crossing’의 한국 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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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몬스터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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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북클럽과 크로스로드의 공동 이벤트를 통해 받은 가제본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정식 출간된 책에는 시소 몬스터스핀 몬스터등 두 편이 수록돼있는데, 가제본에는 첫 편인 시소 몬스터만 실려 있어서 아래 서평에는 스핀 몬스터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시소 몬스터는 이사카 고타로와 열 번째 만난 작품입니다. 고백하자면 사신 치바외에는 대부분 별 3~4개 정도의 평범한 만족감 또는 아쉬움을 느낀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가치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매번 신작이 나올 때면 저도 모르게 눈길이 끌리곤 해왔습니다.

시소 몬스터는 탄생 과정 자체가 독특한 작품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에 따르면 일본 민간전승인 바다 일족과 산 일족의 대립이라는 규칙에 따라 여러 작가가 원시시대부터 미래까지 각 시대의 이야기를 쓰는 프로젝트 참가작 중 한 편으로, 이른바 충돌과 변화, 화해와 공존이라는 거창하고 무거운 주제가 녹아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특유의 유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이 부담스러운 주제를 잘 믹스시켰습니다.

 

거품이 절정에 달한 1980년대 후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시소 몬스터는 전직 첩보원이자 현재는 전업주부인 미야코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와의 합가 이후 시작된 고부갈등은 심리전에 능했던 전직 첩보원 미야코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릅니다. 그러던 중 사고사인 줄 알았던 시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미야코는 오랫동안 시어머니 주위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실을 발견하곤 더 이상 시어머니를 평범한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특히 잇달아 괴한들에게 공격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미야코는 예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만의 은밀한 조사를 시작합니다.

 

고부갈등을 다룬 가족드라마에 첩보+액션+고발+사회파가 한데 버무려진 버라이어티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고부갈등을 겪는 미야코가 한때 엘리트 첩보원이었다는 설정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거기에다 자신을 위협하는 용의자가 상극과도 같은 시어머니가 아닐까, 의심하면서 이야기는 흥미에 흥미를 더합니다. 막판 액션 시퀀스에서 밝혀지는 반전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지만 결과를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흠뻑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또 애초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프로젝트의 취지에 걸맞게 바다 일족과 산 일족의 대립’, ‘충돌과 변화, 화해와 공존이라는 규칙과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판타지에 가까운 신비한 인물(보험회사 직원)이 등장하여 미야코와 시어머니 사이의 충돌과 공존에 대해 선문답 같은 말을 풀어놓는 대목은 다소 낯설고 뜬금없었지만 이사카 고타로만의 독특한 감성을 엿볼 수 있어서 나름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다만, 독자에 따라 이 대목이 미야코의 스토리와 잘 섞이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충돌이니 공존이니 하는 심오한 주제를 전직 첩보원이자 현직 전업주부인 미야코의 흥미 위주의 스릴러 속에 억지로 끼워 넣은 느낌이랄까요? 실제로 이사카 고타로가 방점을 찍은 곳이 신비한 보험회사 직원을 통해 강조되는 규칙과 주제였는지,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에 충실한 미야코의 스토리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어려운 주제에 신경 쓰지 말고 미야코의 뒤만 따라가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읽기가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

 

가제본에 없는 두 번째 수록작 스핀 몬스터2050년을 무대로 한 SF 추격극이라고 합니다. 비밀스럽고 중요한 정보일수록 아날로그 방식으로 처리하는 역설적인 관습이 자리 잡은 가운데 손편지 배달부인 미토가 한 과학자의 비밀편지를 배달하면서 겪게 되는 미래 감시사회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에 따르면 충돌과 공존이라는 주제가 좀더 강하게 깃든 이야기 같은데 사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을 끄는 설정이라서 (조금은 난해해 보이는 주제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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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분립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4 미치 랩 시리즈 3
빈스 플린 지음, 이영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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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 랩 시리즈세 번째 작품인 권력의 분립은 실은 두 번째 작품인 3의 선택과 한 편이나 마찬가지인 작품입니다. 상하권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만큼 이야기가 연결돼있어서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3의 선택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CIA 대테러센터의 비공식 비밀조직인 오리온 팀의 수석요원이자 최고의 능력을 지닌 암살자 미치 랩은 미드 ‘24’의 잭 바우어와 영화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을 합쳐놓은 듯한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캐릭터입니다. 시리즈 첫 편인 권력의 이동에서 백악관을 습격한 테러리스트를 제압하며 대통령을 구해낸 그였지만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대통령과 직속상관인 CIA 대테러센터 수장 아이린 케네디 등 몇몇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랩이 작전 수행 중 동료요원에 의해 살해될 뻔한 사건이 전편에서 펼쳐졌고 이 작품에선 랩이 자신을 죽이고 CIA를 파멸로 이끌려 한 배후인물을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권력의 분립은 꽤 많은 사건이 동시에 전개되는 복잡한 구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통령에 의해 최초로 여성 CIA 수장으로 지명된 케네디를 낙마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CIA를 수중에 넣은 뒤 궁극적으로는 대권을 거머쥐려는 유력 정치인의 음모가 벌어지는가 하면, 사담 후세인이 곧 핵무기를 손에 넣을 거라는 정보를 접한 헤이즈 대통령이 대규모 공습과 함께 핵무기를 무력화하려는 위험천만한 작전을 전개하는 이야기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거기다가 암살자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연인인 애너 릴리와의 평범한 삶을 꿈꾸던 랩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배후인물의 단서를 쥔 옛 연인이자 모델 출신 청부업자와 맞닥뜨리는 과정에서 애너의 격한 오해를 사는 것은 물론 둘 사이의 관계마저 위태로워지는 안타까운 멜로 에피소드까지 곁들여져서 그야말로 철철 넘칠 정도의 다양한 서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겨우 시리즈 세 번째 작품까지만 읽은 상태지만 권력의 분립은 앞선 두 작품에 비해 거의 모든 면에서 빈틈을 찾아보기 힘든 완벽에 가까운 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첩보, 전쟁, 액션, 멜로, 정치, 음모 등 적잖은 코드가 뒤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밀도나 퀄리티 면에서 처지지 않는 힘을 발휘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각각의 코드를 잘 살려낸 빈스 플린의 팔색조와 같은 문장들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파국을 맞이한 랩과 애너의 절절한 멜로부터 마치 전장 한복판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준 생생한 군사작전 장면이라든가 비정한 권모술수가 판치는 워싱턴 정가의 긴장감은 어느 챕터를 막론하고 한시도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과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다양하고 복잡한 모든 사건들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돼버린 랩의 사정은 말 그대로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자신을 살해하고 CIA를 무력화시키려는 배후인물을 찾는 와중에 랩은 말할 수 없는 비밀 탓에 연인에게 비난받고, 낙마 위기에 처한 직속상관을 염려해야 하고, 급작스런 대규모 공습에 랩이 참전하기를 원하는 대통령의 부탁까지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랩은 때론 현명하게, 때론 냉철하게 이 숱한 위기 상황들을 헤쳐 나가는데,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라는 소설 제목이 떠오를 정도로 점점 더 강하고 단단해지는 랩을 수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애정할 수밖에 주인공이라고 할까요?

 

거만한 세계의 경찰인 미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진 않은데다 이 시리즈의 큰 서사 중 하나가 미국의 그런 면을 부각시킨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미치 랩이 대책 없는 애국주의자 람보가 아닌 다음에야 픽션으로 충분히 즐겨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간혹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긴 해도 독자가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이만큼 흥미로운 스릴러를 굳이 외면할 이유는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악당들이 응징되고 진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막판에 다소 급하게 막을 내린 엔딩은 너무 아쉬웠습니다. 100페이지 정도 남았을 때만 해도 랩이 맡은 미션들 대부분이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야기가 폭주하더니 그 미션들 대부분이 신속-간략-깔끔하게 마무리됐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50페이지 정도라도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아마 저만의 느낌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이제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게 된 랩이 다음 작품인 집행권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너무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더불어 랩 주변의 매력적인 조연들도 각각의 스탠스에 크고 작은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그 역시 어떻게 그려질지 무척 관심이 가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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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매탐정 조즈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5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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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가 고게쓰 시로는 아끼던 후배가 살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영매 조즈카 히스이와 파트너가 됐고 그 이후로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몇몇 살인사건을 함께 해결합니다. 북유럽의 피를 물려받은 듯한 비취색 눈동자를 지닌 조즈카는 어려서부터 신비한 능력을 지녀왔지만 누구도 믿어주지 않은 것은 물론 영시(靈視)를 통해 알아낸 진실을 어떻게도 입증할 길이 없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믿고 도와주겠다는 고게쓰의 말에 감동을 받곤 그의 파트너를 자청한 것입니다. 한편 4년에 걸쳐 젊은 여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유기해온 범인이 여전히 활개 치는 가운데 고게쓰는 조즈카와 함께 그 사건에 도전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반전과 함께 고게쓰와 조즈카는 충격적인 상황을 맞이합니다.

 

대부분의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영매가 등장하는 상황은 웃지 못 할 코미디 혹은 무능한 경찰의 막다른 선택 등 무척 냉소적이거나 황당한 형태로 그려진 게 사실입니다. 타인의 물건에 손을 대어 소유자의 정보를 읽어내는 사이코메트리는 그나마 전문직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 산 자와 연결시켜주는 영매는 분명 사기꾼이란 이미지가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에게 영매탐정이란 타이틀을 붙인 이 작품이 과연 영매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설득력있게 그렸을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영매란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존재죠. 그렇다면 저는 논리를 이용해 조즈카 히스이 씨의 힘이 현실과 이어질 수 있게 돕겠습니다.” (p111)

 

조즈카를 믿고 파트너가 되는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애초 영 능력자라는 것을 그다지 믿지 않던 추리소설가 고게쓰입니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서 조즈카의 힘과 능력을 목격한 뒤 기꺼이 그녀의 파트너가 될 것을 다짐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대사 그대로 심령과 논리를 조합해 진실을 제시한다.”라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때론 자신들이 머물던 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나 경찰이 헤매고 있는 미제 사건들을 멋지게 해결합니다. 물론 대외적으로 조즈카는 고게쓰의 조수 혹은 수사자문으로 소개될 뿐이지만 조즈카의 힘과 능력에 대한 고게쓰의 신뢰는 나날이 깊어지고 두터워집니다. 비취색 눈동자를 지닌 미인 조즈카의 매력은 고게쓰로 하여금 불쑥불쑥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키게 하는데, 두 사람 사이의 로코 분위기는 색다른 흥미와 재미를 주기도 합니다.

 

연쇄살인범의 독백을 담은 인터루드’(막간극)를 제외하고 모두 네 편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앞선 세 편의 이야기는 조즈카-고게쓰 콤비의 첫 만남과 살인사건 해결과정을 그리고 있고, 마지막 편에선 4년 동안 젊은 여성들을 살해하고 유기한 연쇄살인범과의 최후의 대결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이 최후의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독자는 깜짝 놀랄 첫 번째 반전과 맞닥뜨립니다. 초반 혹은 중후반쯤 이 반전을 눈치 챈 독자도 있겠지만, 이어지는 또 다른 반전은 작가의 엄청나고 빈틈없는 설계와 함께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기막힌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 부분까지 예상한 독자는 거의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살짝 억지로 끼워 맞추는 본격의 향기가 느껴진 점이나 연쇄살인범의 동기가 다소 모호하게 그려진 점은 아쉬운 대목이었지만 본편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시금 앞의 이야기들을 뒤집는 반전의 떡밥을 만날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머릿속이 얼얼해지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손바닥 위에 독자를 올려놓고 마음대로 조종하는 듯한 작가의 공력에 여러 번 속수무책으로 당한 느낌이랄까요?

 

음산한 분위기를 내뿜는 고딕 이미지부터 여리고 순수하고 눈물 많은 소녀 이미지, 소름 돋게 만드는 냉혹한 악녀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팔색조처럼 변신하는 조즈카의 매력은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으뜸 공신입니다. 후속작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매탐정 조즈카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더욱 강렬하게 발휘하는 미스터리로 독자들을 다시 찾아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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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저편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김세화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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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실종됐던 세 어린이의 유골이 용무산에서 발견됩니다. 당시 경찰 수색에 참여했던 사회부 기자 김환은 이 잡듯 벌어졌던 수색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유골이 너무나 평범한 곳에서 발견된 점에 의문을 가집니다. 기자로서의 사명감 이상의 책임감을 느껴온 김환은 경찰과 법의학자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 애쓰는 한편 스스로 과거의 취재영상들을 재검토하며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그러던 중, 실종사건과 간접적으로 관련 있던 한 건설업자가 살해되자 김환은 두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미스터리 속 피해자가 어린이들인 경우 사건의 비극성은 심연 같은 분위기를 갖기 마련입니다. 유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이든 언론이든 사건에 개입한 사람들의 참담함이나 분노 역시 말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게 됩니다. 10년 전 세 어린이의 실종사건 보도를 담당했던 사회부 기자 김환은 오랜 시간동안 그 무게에 짓눌리면서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넘어 막대한 부채감까지 끌어안고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런 김환에게 10년 만에 발견된 어린이들의 유골은 남다른 의미와 함께 반드시 진실을 찾아내라는 강한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10년은 진실이 훼손되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입니다. 아무리 경찰 이상의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회부 기자라도 막연한 책임감과 사명감만으로 진실을 찾겠다고 뛰어들기 힘든 조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갑작스런 살인사건이 끼어들면서 김환에게 아주 작은 실마리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폴리스라인으로 봉쇄된 사건현장에 잠입하는 무모함까지 발휘하면서 김환은 기어이 10년 전의 진실을 찾아냅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살인사건 전문기자 잭 매커보이의 활약을 보면 의외로 경찰이나 탐정 못잖게 기자라는 직업이 미스터리와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총기가 난무하고 잔혹한 연쇄살인이 수시로 벌어지는 미국과는 환경 차이가 꽤 크지만 어쨌든 사회부 기자라는 직업은 강력사건 수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민간인이라는 점에서 미스터리 해결사로서 활약할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김환은 관할서 형사과장은 물론 인연이 있는 법의학자를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얻는가 하면, 직접 발로 뛰어가며 10년 동안 자신이 놓친 게 있는지 확인하는 열혈 사회부 기자입니다. 부상을 입어가며 범행현장을 조사하는 행동력도 있고 입수한 단서들을 통해 차곡차곡 퍼즐을 완성해가는 추리력도 겸비한 인물입니다. 잭 매커보이만큼 엄청난 사건을 대한 건 아니지만 그의 성실한 활약은 충분히 눈길을 끌만했습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사실 그만큼 아쉬움도 많은 작품이었는데, 무엇보다 다소 엉성해 보이는 몇몇 설정들이 초반부터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습니다. 매장된 상태에서 유골이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사인은 저체온증이라는 황당한 추정을 합니다. 유골이 흐트러진 채 발견됐는데도 그 누구도 그 사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 허술한 대처들은 나중에 김환에 의해 모두 바로 잡히는데, 아무리 봐도 김환의 능력을 부각시키기 위한 억지 설정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막판에 김환의 추리가 조금은 비약에 가까웠던 점이나 (등장인물 스스로 고백했듯) 경찰서 형사과장을 부하처럼 좌지우지하는 장면, 그리고 중반에 뜬금없이 나열된 과거의 황당한 제보들도 아쉬웠고, 김환이 방송국 내에서 겪는 갖은 핍박과 모욕은 그 맥락을 잘 알 수 없어서 그저 눈요기에 그쳤다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한국 미스터리 작가를 만난 건 무척 반가운 일이었지만 사회부 기자 김환이 시리즈 캐릭터로 자리 잡으려면 지금보다는 더 치밀한 설계와 함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는 문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김환은 좀더 매력적이어야 하고, 올드하거나 단선적인 문장들도 다듬어져야 할 것 같고, 사건 자체는 물론 그 해법 과정도 호기심과 공감을 끌어낼 수 있게 설계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국 미스터리를 아끼고 응원하는 마음은 늘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까지 무조건 감쌀 수는 없는 일이기에 개인적으론 책 뒤편에 실린 적잖은 추천사들이 조금은 난감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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