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신저 23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 옮김 / 단숨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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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고의 잠입수사관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38살의 마르틴 슈바르츠. 하지만 그의 삶은 5년 전 호화 크루즈선 술탄호에서 아내가 어린 아들을 바다에 던진 뒤 자살한 그날 이후로 모든 의미를 잃은 상태입니다. 어느 날 그에게 정체불명의 노파가 전화를 걸어 술탄호에 승선할 것을 권합니다. 아내와 아들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또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말에 마르틴은 무단결근까지 감행하며 술탄호에 오릅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건들, 의심스러운 인물들과 연이어 마주칩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와 여섯 번째 만난 작품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이 모두 12편이니 딱 절반을 읽은 셈인데, ‘패신저 23’은 지금까지 읽은 그의 난해하고 기괴한 사이코스릴러에 비해 굉장히 쉽고 편하게 읽힌 정통 범죄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매번 두통과 불쾌감을 겪으면서도 제바스티안 피체크에 탐독하는 이유 자체가 미스터리지만 어쨌든 패신저 23’은 첫 페이지를 열기 전부터 가졌던 선입견과 두려움(?)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깔끔하고 선명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패신저 23’은 과거 10년 간 크루즈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승객이 177, 즉 해마다 평균 23명이란 사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별다른 도구 없이 자살을 하기에도, 끔찍한 범죄를 자살로 은폐하기에도, 또 완전범죄에 가까운 살인을 저지르기에도 최적의 장소가 된다.”는 출판사의 소개대로 많은 사람들의 로망인 호화 크루즈선이 실은 지극히 위험천만한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꽤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또 크루즈선을 소유한 해운회사가 막대한 손해를 야기할 수 있는 살인사건보다 애틋한 비극으로 포장할 수 있는 자살을 선호하는 탓에 종종 진실이 은폐될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초반부터 이 작품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키는 긴장감 넘치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술탄호로 불러들인 노파에게서 아들이 아끼던 곰 인형을 전해 받은 마르틴은 아내와 아들의 죽음에 확실한 의문을 갖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아내와 아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8주 전 술탄호에서 사라졌던 모녀 가운데 딸 아누크가 최근 살아서 돌아온 사실까지 알게 되자 마르틴은 자살로 위장한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제기하게 되고 범인이 현재 술탄호에 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마르틴의 범인 찾기와 함께 어딘가에 갇힌 채 납치범에게 살면서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을 고백하라.”는 강요를 받는 나오미라는 여자의 끔찍한 이야기가 나란히 전개됩니다. 또 엄마 율리야와 함께 술탄호에 탔던 15살 소녀 리자가 의문의 메모만 남긴 채 사라진 것 역시 마르틴의 신경을 팽팽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더불어, 경찰이나 FBI가 개입하기 전에 살아 돌아온 소녀 아누크를 처리하려는 해운회사의 야비한 음모까지 곁들여져서 독자는 지루하거나 느슨함을 느낄 틈도 없이 대서양 한복판을 항해중인 술탄호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지금까지 읽은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 가운데 눈알수집가’, ‘눈알사냥꾼’, ‘영혼파괴자가 정통 사이코스릴러로 분류된다면, ‘패신저 23’을 비롯 내가 죽어야 하는 밤소포는 사이코스릴러와 범죄스릴러가 적절히 믹스된 흥미진진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혹시 그의 정통 스릴러에 크게 데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제가 언급한 작품들을 (속는 셈 치고) 한번쯤 만나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은 극단적인 사이코스릴러 설정 때문에 표지를 가리고 읽어도 금세 작가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차별점을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읽은 6편을 떠올려보면 왠지 매번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듯한 이질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억측이긴 하지만, 한국에 출간된 12편의 작품이 5곳의 출판사와 7명의 번역가의 손을 거친 게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입니다. 원작자의 개성이나 문장의 맛이 일관되게 옮겨지는 게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래선지 제바스티안 피체크에게 전담 출판사혹은 전담 번역가가 있었다면...”이란 아쉬움을 느끼는 건 그의 팬이라면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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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부패에서 구하소서
쯔진천 지음, 박소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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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교수이자 범죄논리학자 옌량을 앞세운 일명 추리의 왕(推理之王) 시리즈로 잘 알려진 쯔진천이 이전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이야기를 선보였습니다. 묵직하고 어두운 미스터리가 주 특기였던 그가 슬랩스틱 스릴러 혹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추리소설의 탈을 쓴 코믹 활극이라는 가볍고 통통 튀는 서사를 다룰 거라곤 예상할 수 없었기에 읽기 전부터 무척이나 흥미를 끄는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범죄 자체는 심상치 않습니다. 폭탄까지 동원하는 2인조 강도, 부와 권력을 지닌 부패한 기업가와 정치인, 그리고 적잖이 벌어지는 살인사건 등 범죄의 무게감이나 잔혹함은 여느 장르물 못잖게 심각하게 설정돼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심각한 재료들을 지지고 볶기 위한 레시피는 슬랩스틱과 코믹이라는 정반대의 코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레시피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좌충우돌 경찰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장이앙은 무능한 것인지 관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인물로 어느 날 갑자기 낙하산을 타고 싼장커우 공안국 부국장에 취임한 뒤 잇달아 강력범죄를 해결하면서 주목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어찌 보면 100% 행운에 의한 걸식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정말 뛰어난 직감과 추리력에 의한 것 같기도 해서, 마지막까지도 그의 진면목이 어떤 것인지 그저 애매모호할 따름입니다. (물론 이 애매모호함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장이앙 주위의 경찰들 역시 코믹 경찰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인데, 늘 실수만 저지르는 머저리’, 모범경찰 같지만 속물적인 근성을 지닌 자, 고위직의 조카로 현장 형사를 꿈꾸는 사고뭉치, 그리고 장이앙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고위관료들이 그들입니다.

 

슬랩스틱 코믹 레시피의 또 다른 핵심요소는 우연과 필연을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되는 사건들입니다. 애초 아무 상관도 없는 인물과 사건들이 예기치 못한 우연을 통해 연결이 되고, 그 결과는 또 다른 인물과 사건에 영향을 미칩니다. 가령, 형사 장이앙과 2인조 무장강도는 이 연결고리 중 하나만 빠졌어도 절대로 만날 일이 없는 관계였지만 몇 번의 우연과 필연이 거듭된 끝에 그야말로 어이없는 상황에서 대치하게 됩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런 식의 예상치 못한 악연을 맺게 되는데 이 복잡하고 정교한 장면들은 동시에 쉴 새 없이 실소를 자아내는 코믹 요소까지 품고 있어서 이 작품이 슬랩스틱 스릴러혹은 추리소설의 탈을 쓴 코믹 활극으로 불리는 이유를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워낙 많고 사건도 그만큼 많아서 줄거리 정리가 쉽지 않아 대략적인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는데,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천재인지 운빨이 좋은 건지 알 수 없는 형사 장이앙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사건에 관여하던 중 싼장커우의 부패한 기업가, 흉포한 2인조 무장강도, 경찰과 민간인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을 잇달아 제압하는 이야기입니다. (사건의 진상은 장이앙의 노력과는 거의 무관하게 범죄자들간의 우연한 악연 덕분에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장이앙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나타난 명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이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설정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선 다만 부패에서 구하소서라는 흥미진진한 제목으로 출간됐지만 사실 이 작품의 원제는 低智商犯罪’, 즉 한국식으로 직역하면 저지능범죄입니다. 아예 제목부터 작정하고 코믹을 강조한 셈인데, 실제로 경찰과 범죄자를 막론하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풀린 듯한 저지능캐릭터에 가깝습니다. 또 쯔진천 스스로 그냥 재미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 즐겁게 읽으면 그만이다.”라고 밝힌 걸 보면 이 작품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작품이 쯔진천의 작품 세계 제2막을 여는 신호탄 격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옮긴이의 말은 조금은 우려되는(?) 대목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론 이 작품이 맛깔난 간식으로는 괜찮았지만 쯔진천이 계속 이런 스타일을 고집하는 건 그다지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 작품이 SF를 기반으로 한 범죄추리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역시 코믹을 바탕에 둔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추리의 왕 시리즈가 한 편이라도 더 나오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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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궤적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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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작가보다도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오쿠다 히데오가 죄의 궤적’()이라는 직설적인 제목의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배경은 도쿄올림픽 1년 전인 1963년이며 실제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요시노부 유괴사건을 모티브 삼은 묵직한 미스터리입니다.

올림픽 직전이 배경이라 혹시나 하고 찾아봤더니 한국에도 이미 소개된 올림픽의 몸값’(‘オリンピックの身代金’. 이후 양들의 테러리스트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습니다.)과 맥이 닿아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경찰 쪽 주인공이 경시청 수사15계의 오치아이 마사오라는 점, ‘죄의 궤적의 배경이 올림픽 1년 전이라면 올림픽의 몸값은 올림픽 개막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는 점입니다. (참고로 일본에서 올림픽의 몸값2008년에, ‘죄의 궤적2019년에 출간됐습니다.)

 

훗카이도 최북단의 작은 섬에 살던 빈집털이범 우노 간지가 우여곡절 끝에 도쿄에 자리를 잡습니다. 뇌 기능 장애가 있는 간지는 툭하면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기절하는 일이 잦아서 아이들에게까지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죄책감이라는 게 없다는 점입니다. 돈이 없을 땐 빈집을 터는 게 당연하며 경찰을 두려워하긴 하지만 딱히 나쁜 일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또 스스로 감정의 스위치를 조절할 수 있어서 공포심 따윈 순식간에 의식 너머로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악랄한 범죄자 또는 악의로 뭉친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도 없는 게, 그는 놀기 좋아하고 파친코를 좋아하는 평범한 20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8년차 경찰 오치아이 마사오는 경시청 수사1과 소속이 된지 1년밖에 안 된 신참입니다. 올림픽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대의 경찰이 등장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수사를 당연히 여기는, 그래서 전쟁을 겪은 선배들로부터는 비아냥을, 야쿠자들로부터는 칭찬을 듣는 묘한 위치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 오치아이가 시계상 살인사건과 소년 유괴사건에 연이어 투입되면서 우노 간지를 쫓게 됩니다. 성실한 탐문과 예리한 추리로 간지를 특정한 오치아이였지만 그를 알면 알수록 도무지 살인이나 유괴와는 거리가 멀어 보여서 혼란에 빠지는데, 더 큰 문제는 간지를 체포한 이후 어딘가 진짜 바보같으면서도 교묘하게 심문을 빠져나가는 그의 태도에 속수무책이 된 점입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괴물이 아닐까, 초조해하기도 합니다.

 

줄거리 대신 인물 소개를 길게 늘어놓았는데, 오치아이가 살인과 유괴 용의자인 간지를 추적하고 체포하고 심문한 끝에 진실에 이르는 심플한 스토리라고 간단하게 요약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정반대로 1~2권을 합쳐 84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 상세한 줄거리 정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형사 주인공인 오치아이는 다른 경찰 미스터리에서도 많이 본 적 있는 익숙한 인물이지만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용의자 우노 간지입니다. ‘미워할 수 없는 범인또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한 간지는 스스로를 바보라고 인정할 정도로 소박하기도 하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라고 자책할 정도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부정하는 안타까운 면모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죄책감이나 공포심을 전혀 못 느끼는 순도 100%의 사이코패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인증 혹은 다중인격으로 의심받기까지 하던 간지의 과거와 비밀이 드러나면서 이 작품은 단순히 범인 찾기 미스터리의 차원을 넘어 죄와 인간에 관한 묵직한 주제의식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 묘한 캐릭터는 앞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팔색조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화조차 중산층 이상의 전유물이었던 시대가 배경이라 죄의 궤적은 아날로그의 향수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또 패전 이후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앞둔 일본의 혼란한 상황 역시 미스터리만큼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현재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경찰조직 내부의 치열한 갈등은 여러 번 접했던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팽팽한 긴장감과 재미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다소 부담스런 분량에 마치 수사일지를 읽는 듯한 디테일 때문에 성질 급한 독자라면 한숨이 여러 번 나올 수도 있겠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간결하면서도 매력적인 문장들은 순식간에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어서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엔딩이 조금은 급하게 마무리됐다는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개인적으론 오치아이 마사오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꼭 한 번은 다시 만나보고 싶은데, ‘죄의 궤적은 경시청 신참 오치아이의 성장 스토리라는 또 다른 미덕을 지닌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읽어 서평이나 메모조차 남기지 않은 올림픽의 몸값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당연한 일입니다.) 과연 오쿠다 히데오가 올림픽 3부작혹은 오치아이 마사오 3부작을 완성시킬지 기대감을 갖고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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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담 - 운명적인 만남을 원한다면 목숨을 걸어라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장혜영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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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절대정의’, ‘작열’, ‘유리의 살의등 그동안 읽은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품들이 반전의 맛이 잘 살아있는 미스터리였고 이 작품의 번역제목도 결혼기담이라 당연히 결혼에 얽힌 미스터리나 기담이 수록됐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기대가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그런 쪽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은 첫 수록작 이상적인 남자뿐이었고, 나머지는 결혼에 관한 일그러지고 비틀린 독설 같은 우화들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거짓, 사기, 도촬,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는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살인을 제외하곤 (범죄성이 다분하긴 해도) 모두 재치 있는 반전으로 마감되는 소소한 이야기들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婚活中毒’(혼활중독)입니다. ‘혼활은 결혼활동을 뜻하는데, 말하자면 결혼을 결심한 사람이 상대를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기에 중독이란 단어를 붙인 건 네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본인 혹은 자식의 결혼을 위해 결혼상담소, 야외 단체미팅, TV 맞선프로그램 등에 참가하여 굉장히 적극적으로 짝을 찾아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각각 거짓, 사기, 도촬, 살인이라는 상황에 말려들거나 혹은 직접 그 행위들을 저지릅니다.

 

마흔을 코앞에 둔 여자가 결혼상담소에서 소개받은 이상적인 남자에게 반하지만 그 남자와 만났던 여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걸 알곤 당황하는 이야기(이상적인 남자), 친구의 고독사를 지켜본 남성이 결혼을 결심한 뒤 단체미팅에 나섰다가 대단한 미녀와 짝이 된 뒤 겪게 되는 당혹스런 상황들(결혼 활동 매뉴얼), 자신이 점찍은 남자를 사로잡기 위해 TV 맞선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고군분투하는 공대 출신 로봇엔지니어의 웃지 못 할 에피소드(이과 여자의 결혼 활동), 그리고 미혼 자식들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부모끼리 먼저 벌이는 단체미팅에서 예비 안사돈에게 한눈에 반한 60대 남자의 애잔하지만 위험천만한 로맨스(대리 결혼 활동) 등 모두 네 편이 수록돼있습니다.

 

결혼할 뜻 자체가 없는 20~30대가 늘어가는 한국의 상황을 감안하면 결혼에 거의 목매다시피 하는 작품 속 주인공들이 다소 낯설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오래 전 작품이라면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이 작품이 출간된 게 2017년이니 어쩌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결혼에 관한 관점 자체가 많이 다른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전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키요시 리카코의 결혼기담은 가벼운 블랙코미디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요한 통과의례에 대한 조언 혹은 경고장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반나절이면 충분한 분량에 재미는 기본으로 갖춘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만나보실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정말 사소한 문제지만, 세 개 정도밖에 안 되는 간단한 주석(갸루, 단카이 세대, 고타츠)을 책 맨 뒷장에 실은 건 좀 무성의한 편집으로 보였습니다. 단어 옆에 괄호로 묶어 표시하거나 페이지 하단에 각주로 실으면 됐을 텐데 왜 이렇게 불편한 방식을 택한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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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시간 스토리콜렉터 9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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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삼킨 소녀’, ‘끝나지 않는 여름에 이은 셰리든 그랜트 3부작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독일의 명품 스릴러 타우누스 시리즈의 작가인 넬레 노이하우스가 10대 소녀의 성장통을, 그것도 미국을 배경으로 그렸다는 것 자체가 무척 특이한 일인데, 앞선 두 작품 모두 (출판사가 명명한) ‘미스터리 로맨스이상의 재미와 긴장감, 그리고 묵직한 여운을 남긴 덕분에 셰리든 그랜트의 마지막 여정이 너무 궁금하고 기대됐던 게 사실입니다.

 

1990년대 중반, 주민 1,500명에 불과한 네브라스카 주 소도시 페어필드에서 무자비하고 잔혹한 10대 시절을 보낸 셰리든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지만 그 여정은 시작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이후 그녀의 삶은 21살이 되기까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시련으로 채워지고 맙니다. (여기까지가 앞선 두 편의 대략의 내용입니다.)

성실한 외과의사 폴을 만나 가까스로 안식처를 찾은 듯 보였지만 셰리든의 심장은 그 안식처가 절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리고 실은 자신이 집과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돌아온 탕아같은 모습으로 5년 만에 페어필드로 돌아온 셰리든은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지만 이내 다시 불안과 혼란에 빠져듭니다. 그런 그녀에게 기적 같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진정한 사랑을 나눌 남자가 나타났고, 그녀의 음악적인 재능을 알아본 거대 음반회사의 러브콜이 도착합니다. 하지만 셰리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과거의 끔찍한 사건들은 언제든 그녀의 기적을 박살 낼 태세로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내 심장은 나에게 실수를 반복하게 했다.”


뒷표지에 실린 이 카피는 셰리든의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한마디로 잘 압축해놓은 문장입니다. 10대 시절부터 누구보다 강렬한 카리스마와 의지를 지녔지만 그녀의 삶은 늘 타인에 의해 뒤흔들렸고,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한 채 끊임없는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스스로를 만신창이로 만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출생의 비밀이 안긴 엄청난 충격, 전국적인 뉴스거리가 된 의붓오빠의 광란의 살인, 결코 잊지 못할 강간의 악몽은 셰리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은 물론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들이었고, 21살이 된 현재까지도 여전히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름을 삼킨 소녀가 세 번의 여름에 걸친 10대 소녀 셰리든의 고통스런 성장기였다면, ‘끝나지 않는 여름은 그녀가 고향을 떠난 뒤에 겪은 악몽 같은 나날들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폭풍의 시간은 롤러코스터처럼 번갈아 벌어지는 극과 극의 사건들을 이겨낸 셰리든이 가까스로 사랑과 안식을 찾아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는 단순히 10대 소녀의 성장통 혹은 미스터리 로맨스라는 말랑말랑한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잔혹한 서사들이 등장합니다. 살인, 폭력, 매춘, 강간, 연쇄살인범 등 끔찍하고 가혹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어지간한 범죄스릴러를 능가하는 긴장감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넬레 노이하우스 특유의 미스터리와 범죄스릴러 코드가 제대로 녹아있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폭풍의 시간은 앞선 두 작품에 등장했던 사건들과 셰리든의 10대 시절을 부족하지 않게 설명해주고 있지만, 그 작품들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조금은 감정이입이 쉽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앞선 두 작품에서 축적된 셰리든의 실수와 실패들이 폭풍의 시간속의 그녀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다면 여름을 삼킨 소녀끝나지 않는 여름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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