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신저 23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 옮김 / 단숨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최고의 잠입수사관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38살의 마르틴 슈바르츠. 하지만 그의 삶은 5년 전 호화 크루즈선 술탄호에서 아내가 어린 아들을 바다에 던진 뒤 자살한 그날 이후로 모든 의미를 잃은 상태입니다. 어느 날 그에게 정체불명의 노파가 전화를 걸어 술탄호에 승선할 것을 권합니다. 아내와 아들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또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말에 마르틴은 무단결근까지 감행하며 술탄호에 오릅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건들, 의심스러운 인물들과 연이어 마주칩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와 여섯 번째 만난 작품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이 모두 12편이니 딱 절반을 읽은 셈인데, ‘패신저 23’은 지금까지 읽은 그의 난해하고 기괴한 사이코스릴러에 비해 굉장히 쉽고 편하게 읽힌 정통 범죄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매번 두통과 불쾌감을 겪으면서도 제바스티안 피체크에 탐독하는 이유 자체가 미스터리지만 어쨌든 패신저 23’은 첫 페이지를 열기 전부터 가졌던 선입견과 두려움(?)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깔끔하고 선명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패신저 23’은 과거 10년 간 크루즈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승객이 177, 즉 해마다 평균 23명이란 사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별다른 도구 없이 자살을 하기에도, 끔찍한 범죄를 자살로 은폐하기에도, 또 완전범죄에 가까운 살인을 저지르기에도 최적의 장소가 된다.”는 출판사의 소개대로 많은 사람들의 로망인 호화 크루즈선이 실은 지극히 위험천만한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꽤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또 크루즈선을 소유한 해운회사가 막대한 손해를 야기할 수 있는 살인사건보다 애틋한 비극으로 포장할 수 있는 자살을 선호하는 탓에 종종 진실이 은폐될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초반부터 이 작품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키는 긴장감 넘치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술탄호로 불러들인 노파에게서 아들이 아끼던 곰 인형을 전해 받은 마르틴은 아내와 아들의 죽음에 확실한 의문을 갖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아내와 아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8주 전 술탄호에서 사라졌던 모녀 가운데 딸 아누크가 최근 살아서 돌아온 사실까지 알게 되자 마르틴은 자살로 위장한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제기하게 되고 범인이 현재 술탄호에 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마르틴의 범인 찾기와 함께 어딘가에 갇힌 채 납치범에게 살면서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을 고백하라.”는 강요를 받는 나오미라는 여자의 끔찍한 이야기가 나란히 전개됩니다. 또 엄마 율리야와 함께 술탄호에 탔던 15살 소녀 리자가 의문의 메모만 남긴 채 사라진 것 역시 마르틴의 신경을 팽팽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더불어, 경찰이나 FBI가 개입하기 전에 살아 돌아온 소녀 아누크를 처리하려는 해운회사의 야비한 음모까지 곁들여져서 독자는 지루하거나 느슨함을 느낄 틈도 없이 대서양 한복판을 항해중인 술탄호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지금까지 읽은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 가운데 눈알수집가’, ‘눈알사냥꾼’, ‘영혼파괴자가 정통 사이코스릴러로 분류된다면, ‘패신저 23’을 비롯 내가 죽어야 하는 밤소포는 사이코스릴러와 범죄스릴러가 적절히 믹스된 흥미진진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혹시 그의 정통 스릴러에 크게 데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제가 언급한 작품들을 (속는 셈 치고) 한번쯤 만나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은 극단적인 사이코스릴러 설정 때문에 표지를 가리고 읽어도 금세 작가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차별점을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읽은 6편을 떠올려보면 왠지 매번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듯한 이질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억측이긴 하지만, 한국에 출간된 12편의 작품이 5곳의 출판사와 7명의 번역가의 손을 거친 게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입니다. 원작자의 개성이나 문장의 맛이 일관되게 옮겨지는 게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래선지 제바스티안 피체크에게 전담 출판사혹은 전담 번역가가 있었다면...”이란 아쉬움을 느끼는 건 그의 팬이라면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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