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카먼 마리아 마차도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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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서 이 작품을 먼저 읽은 사람이 “39금 소설이라고 살짝 호들갑(?)을 떤 데다 여성의 몸과 욕망,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말해지지 않은 진실.”, “강렬한 페미니즘이 관통.”, “(금기시되었던) 레즈비언, 여성의 육체적 쾌락, 폭력, 그리고 주체성을 가진 몸에 대한 이야기.” 등 관심을 끄는 여러 매체의 호평도 있고 해서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읽은 작품입니다.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주제들이 무겁거나 가볍게, 혹은 기괴하거나 판타지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수록작마다 다양한 코드들이 동원돼서 그런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평론가들은 사이코 리얼리즘, SF, 개그, 공포, 판타지, 우화 등 온갖 장르를 들먹이며 도대체 이 작품을 어디에 밀어 넣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론 여성과 동성애 서사를 괴담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런 조합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 꽤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밀스런 녹색 리본을 평생 목에 매고 살며 성()에 관해 거침없고 주도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여자, 신체접촉으로 퍼지는 바이러스가 전 인류를 궤멸시키는 가운데 피난 중에도 남녀를 불문하고 육체관계를 갖는 여자, 갑자기 몸이 투명해지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져버리지만 그렇다고 죽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여자들, 그리고 동성 파트너 사이에 벌어지는 학대와 폭력 등 기담 혹은 괴담의 형식에 담긴 다양한 여성-동성애 주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에 관해 자기주도적이고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도 등장하지만, 반대로 억압받거나 무기력한 여성도 등장합니다. 동성애 코드 역시 당당하고 유쾌하게 묘사된 작품도 있고 여전히 핍박받는 소수의 비극으로 그려진 작품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뭔가를 강요하듯 주장하지도 않는 다양한 시선들은 기담 혹은 괴담이란 형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현실감을 고조시키고 공감의 폭을 넓게 해줍니다.

 

다만, 장르물을 주로 읽는 저 같은 독자에겐 좀 어렵고 난해한 대목들이 많아서 수록작 가운데 절반쯤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던 게 사실입니다. 간혹 매력적인 비유나 신선한 문장들도 눈에 띄었지만, 반대로 몇 번을 되읽어도 무슨 상황인지, 무엇에 대한 묘사인지, 작가의 의도가 뭔지 헤아릴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번역가가 산문이라기보다 시에 가깝고, 좀 과장하면 문장을 이용한 미술 또는 회화 작품에 가깝다.”고 설명한 걸 보면 원작 자체가 그런 특징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선지 각각의 수록작에 대한 해설이 꼭 첨부됐어야 할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저 같은 독자라면 해설을 꼼꼼히 읽은 뒤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정독을 해야 이 작품의 진가를 조금이나마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39금 소설도 아니고 흥미 위주로 읽을 작품도 절대 아닙니다. 지금까지 읽은 여성과 동성애를 주제로 삼은 그 어느 작품들보다 더 깊은 인상과 여운을 느낀 건 분명하지만, 스토리에만 집중하며 빠르게 페이지를 넘긴 탓에 난해함과 아쉬움이 더 많이 남기도 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나 이른바 전문가들의 해설을 좀더 접한 뒤에 꼭 한 번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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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 타임 아이스
야마다 에이미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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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여 년 전 풍장의 교실로 처음 만난 이후 늘 관심만 갖고 있었을 뿐 정작 한 편도 읽지 못한 야마다 에이미의 문제적데뷔작입니다. ‘문제적인 이유는 조금 긴 단편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문예상 수상(1985)과 함께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까지 오른데다 당시로서는 사회적 분위기에 반하는 설정 일본여성과 흑인남성의 욕망에 충실한 연애 때문에 꽤 화제가 됐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합니다. 소심한데다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하지만 클럽에서 재즈 가수로 살아가는 일본여성 과 기지에서 탈영한 미군 흑인병사 스푼이 짧은 시간동안 나눈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사랑은 지고지순함과는 거리가 먼 민낯 그대로의 욕망 덩어리입니다. 첫눈에 불이 붙은 그들은 동거에 들어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로의 육체에 탐닉합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정도의 남자를 만났다고 확신하는 은 소유욕에 가까운 집착을 스푼에게 쏟아냅니다. 반면 스푼은 오로지 의 육체를 탐닉하는데서 만족감을 느낍니다. 둘의 관계는 술과 마약과 폭력이 개입되면서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며 탈영병인 스푼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공포에 더 연연합니다.

 

(스푼)는 생각하지 않는다. 몸으로 반응한 것만이 그의 말이 된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나를 구속하는 이 모든 것을. 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알코올 중독에 빠진 매춘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p36~39 발췌)

 

일본인은 먹지 못하는 그런 요리를 나는 그와 같이 먹었다. 그런 음식이 스푼의 몸 일부를 이룬다는 생각을 하면 그의 몸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뻤다.” (p92~93)

 

사실 두 주인공은 어딘가 판타지 속의 인물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동양여자와 흑인남자의 사랑이라는 흔치 않은 설정이라든가 왠지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부여받은 듯한 익명성이 강조된 이름들 - 일본인이지만 명백히 이국적 분위기를 띄는 과 부적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은 숟가락 때문에 얻은 별명인 스푼’ - 은 작은 원룸이란 폐쇄적인 공간에서 두 사람이 구현한 사랑의 판타지를 좀더 강렬하게 고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은연중에 독자로 하여금 내가 겪고 싶진 않지만 관음증 환자처럼 몰래 지켜보고 싶은 그들만의 기이한 사랑법을 강조하려고 이런 설정들을 동원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개인적으론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 아야세 마루의 치자나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등 다소 상식과 도덕에서 벗어난 사랑을 그린 일본소설을 좋아하는데, ‘베드 타임 아이스역시 그 범주에 들 만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들은 대부분 평이 극단적으로 갈리곤 하는데, 한쪽에선 (이 작품의 옮긴이의 말에서 주장하듯) ‘순수맑음이 느껴지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파괴’, ‘부도덕’, ‘더러움으로 가득 찬 불유쾌한 변태 이야기로만 읽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베드 타임 아이스는 노골적이고 끈적끈적한 몸의 합체를 통해 극단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어서 더욱 더 호불호를 일으킬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 술과 마약과 폭력을 감내하는 의 태도는 사랑이라기보다 자발적인 종속이나 예속으로 보일 수도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은 모두 18편 정도입니다. 하지만 개정판까지 포함하여 마지막으로 출간된 게 사랑의 습관 A2Z’(2013)이니 8년 동안 신간 소식이 없었던 셈인데, 검색해보면 일본에서는 꾸준하게 작품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을 순서대로 읽고 싶다는 욕심을 갖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읽은 베드 타임 아이스를 계기로 틈날 때마다 그녀의 작품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그만큼 제 취향에 아주 잘 맞는 특별한 작가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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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몰자의 날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6 미치 랩 시리즈 5
빈스 플린 지음, 이영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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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테러 부문 수석보좌관 미치 랩과 CIA국장 아이린 케네디는 각각 미국에 대한 심상치 않은 테러 조짐을 감지합니다. 비밀리에 특수부대와 함께 파키스탄 국경지대로 날아간 랩은 알카에다 핵심들의 회의 장소에서 워싱턴을 통째로 날려 보낼 끔찍한 핵폭탄 공격 계획을 발견합니다. 랩의 정보는 워싱턴을 발칵 뒤집어놓지만 문제는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며 랩의 발목을 잡는다는 점입니다. 재선을 앞두고 9.11 이후 제정됐던 강력한 테러대책법을 완화하려는 대통령, 혼란을 야기할 안이한 대책만 내놓는 장관들, 백악관의 정치적 타격만 걱정하는 수석보좌관 등을 지켜보며 랩의 분노는 극에 달합니다.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던 CIA 특수부대 암살자 미치 랩은 야비한 정치꾼들로 인해 그 신분이 노출된 이후 이른바 대테러 부문 수석보좌관이라는 사무직을 맡게 됐지만 사건이 터질 때마다 현장으로 달려가 직접 일을 해치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선 현장요원이나 다름없는 맹활약을 펼치며 미국에 대한 핵폭탄 테러를 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매번 그랬듯이 이번에도 랩은 잔혹한 현실에 대해 1도 모르면서 그저 이해타산적인 정치술수와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워싱턴 관료들의 작태에 격분합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그는 예전과는 급이 다른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하는 장관이나 보좌관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물론 언제나 끝까지 자신을 믿어줬던 대통령마저 재선에 눈이 멀어 제대로 된 판단을 못 내리자 랩은 넘어선 안 될 선마저 넘어서며 거친 공격을 퍼붓습니다. 핵폭탄이라는 미증유의 테러가 코앞에 닥친 상태에서 결국 랩은 모든 절차와 규약을 무시한 채 고문과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도 마다하지 않기로 작심합니다.

 

나쁜 이슬람을 응징하는 미국식 영웅 만들기라는 프레임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의 안이한 행태를 지켜보고 있으면 랩의 참을 수 없는 격분과 극단적인 행태에 100%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현장요원들이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동안 백악관은 재선 전략에만 몰두하거나 외국정상들까지 참석한 화려한 연회를 즐깁니다. 분초를 다투는 싸움을 두고 절차와 허가를 운운하며 권위만 앞세우거나 오히려 독이 되는 무모한 대안만 강요합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증오심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랩은 기어이 폭발하고 맙니다. 덕분에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암살자로서의 랩의 매력이 유감없이 발산되는데, 그 매력은 핵폭탄 테러라는 엄청난 사태와의 시너지 효과로 인해 그야말로 절정에 이릅니다.

 

정치색이라곤 조금도 없는 랩이지만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문과 살인을 자행하는 모습에선 다소 극단적인 신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핵폭탄을 터뜨리기 위해 미국에 잠입한 테러리스트를 두 번째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신념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려 애쓰며 나름의 균형 잡힌 서사를 전개시킵니다. 물론 다소 맹목적이고 과격하며 적개심으로 가득 찬 위험천만한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번 작품에서 랩은 단독 주인공으로서의 비중이 좀 부족한 편입니다. 초중반까지는 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작전을 펼치느라 정작 워싱턴의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에는 끼어들지 못합니다. 또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FBI 특수수사관 스킵 맥마흔, 에너지국 핵 비상지원팀의 폴 라이머, CIA 최고의 심문관 바비 아크람 등 카리스마 넘치는 조연들의 도움을 많이 받기 때문에 원톱으로서의 매력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입니다. 하지만 이들과의 협업을 이끌어가는 랩을 지켜보는 일 역시 색다른 흥미를 전해줍니다.

다음 작품에도 등장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야심찬 30대 법무부 부차관보 페기 스텔리가 눈길을 끌었는데, 핵폭탄 문제를 놓고 랩과 크게 충돌하면서도 그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느끼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랩이 유부남인 것 따윈 상관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여서 다음 작품에서 어떤 사고를 칠지 기대감이 만발하는 캐릭터입니다. (상대적으로 랩의 발목만 잡던 아내 애너가 거의 등장하지 않은 점은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전몰자의 날미치 랩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한국에는 모두 일곱 편이 출간됐으니 이제 읽을 작품이 두 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작품들이 출간되지 않은 게 그저 아쉬울 수밖에 없는데 언제라도 좋으니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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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게임 마니악스 밀실살인게임 3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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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게임 왕수비차잡기’, ‘밀실살인게임 2.0’에 이은 우타노 쇼고의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마지막 편입니다. (이 작품이 2011년에 출간된 뒤 더는 신작이 없었습니다.)

살인게임에 참가한 다섯 명은 각각 두광인, 044APD, aXe, 잔갸 군, 반도젠 교수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으며 특이한 가면을 쓰거나 흐릿한 화면 효과로 자신의 얼굴을 감춘 채 채팅에 참가합니다. 이들의 게임은 한 명이 살인사건에 관한 문제를 내고 나머지 네 명이 탐정이 되어 진상을 밝히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문제는 그 살인사건이 가상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더구나 문제를 낸 사람이 직접 저지른 살인이란 점입니다. 말하자면 아무런 동기도 없이 단지 문제를 내기 위해 살인이 실행되고, 거기에 동원된 트릭 밀실, 알리바이, 미싱링크 등 을 다른 살인마들이 맞히는 게임으로, 그야말로 우타노 쇼고 식 상상력의 끝판왕인 셈입니다.

 

사실 이 시리즈는 순서대로, 그것도 가급적 연이어 읽어야 각 작품 사이에 설치된 반전과 속임수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각 작품에 수록된 단편들, 즉 게이머들이 내놓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인) ‘문제와 그 해법보다는 각 작품에 걸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게이머들의 정체와 행태가 훨씬 더 매력적이란 생각입니다. 가면이나 흐릿한 화면효과 뒤에 숨은 게이머들의 정체는 계속해서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일등공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수록된 단편들의 재미와 만족도는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처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 별 3(우타노 쇼고가 아니었다면 1~2개에 그쳤을 수도 있었습니다.)라는 야박한 평점을 준 건 문제로 등장한 살인사건과 트릭들이 하나 같이 황당하거나 비현실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너무 올드하거나, 너무 미래적이거나, 너무 억지스러워서 웃음조차 안 나오는 트릭들은 실망감 그 자체였습니다.

 

이 작품과 앞선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외부인이 인터넷에 올라온 게이머들의 채팅 동영상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즉 자기들끼리 익명의 채팅방에서 벌이던 살인게임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면서 자랑질에 가까운 현시욕을 숨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살인마들에겐 무척이나 대담한 도전이자 위험한 시도인데 바로 이 설정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반전을 불러일으키는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다 읽은 뒤에 생각해보면 살짝 위화감이 들었던 대목들마다 작가의 힌트가 교묘하게 숨어있던 걸 깨달을 수 있는데, 이 뛰어난 설계능력만큼은 확실히 우타노 쇼고의 매력이자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우타노 쇼고답게 쉽게 예상하기 힘든 반전으로 시리즈를 마무리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게이머들의 살인과 그 미스터리 해법이 별 3개 수준이라 전체적으로는 이래저래 아쉬움이 더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이 시리즈를 읽고 싶은 독자에겐 첫 편인 밀실살인게임 왕수비차잡기정도만 추천하고 싶은데, 첫 편을 읽고 나면 자연스레 후속편인 밀실살인게임 2.0’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긴 합니다만, 그 궁금증의 결과까지는 제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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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 이스케이프 Escape 1
척 호건 지음, 최필원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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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주 진하고 묵직한 느와르의 진수를 만끽했습니다. ‘Prince of Thieves’, 도둑들의 왕자라는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악당입니다. “보스턴의 이웃이지만 행복한 가족사진에서 잘려나간 사생아처럼 이 도시의 모든 지도에서 자취를 감춰버린찰스타운의 토박이 4인조 은행강도, 그중에서도 10대 시절 유망한 하키 선수였지만 망가지고 망가진 끝에 위험천만한 무장강도로 전락한 더글러스 매크레이(이하 더그)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으며, 더그 일당의 습격을 받아 자신이 지점장으로 일하던 은행이 초토화된 것은 물론 납치까지 당해 큰 충격에 빠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건 이후 더그와 사랑에 빠진 클레어 키시, 그리고 더그 일당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집요한 수사를 벌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클레어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 FBI요원 애덤 프롤리가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찰스타운 토박이 친구들인 일당과 함께 은행강도를 일삼던 더그는 피해자인 지점장 클레어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낍니다. 더그의 정체를 알 리 없는 클레어는 사건 후유증 때문에 괴로워하던 중 더그의 따뜻한 위로와 안식에 푹 빠집니다. 한편, 찰스타운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은행강도에 주목하던 FBI요원 프롤리는 더그 일당을 의심하지만 확실한 증거나 단서가 없어 그들의 꼬리를 잡기 위해 집요한 수사를 벌입니다.

클레어를 만난 뒤로 더 이상 찰스타운에서의 피폐한 삶을 견딜 수 없었던 더그는 FBI의 움직임을 감지하자 마지막 한탕을 저지른 뒤 클레어와 함께 찰스타운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더그의 계획은 점점 엉망이 돼갑니다. 클레어와의 관계를 눈치 챈 일당들과의 갈등, 언제 클레어에게 정체를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끈질기게 뒤를 쫓는 FBI요원 프롤리와의 대결 등 시한폭탄 같은 암초들이 하나둘씩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줄거리는 좀 장황하지만 사실 이야기의 얼개는 단순합니다. 자신이 공격하고 납치한 피해자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FBI요원과 대결하는 은행강도 더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 동원된 것은 작가가 방점을 찍은 지점이 은행강도와 FBI요원의 대결, 즉 액션 스릴러나 느와르 자체보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감정과 심리, 그리고 이야기의 주 무대인 찰스타운을 지배하는 우울하고 불온한 분위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찰스타운 토박이인 더그와 그의 일당은 하나같이 불행한 가족사를 지닌 것은 물론 아버지들의 뒤를 이어 범죄의 세계에 뛰어든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또 빈곤했지만 각별한 정서를 간직했던 찰스타운에 대한 애정과 향수를 품고 있습니다. 성격은 제각각이고 가끔 큰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들의 우정은 쉽게 깨지지 않는 결속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클레어에게 푹 빠진 더그가 흔들리자 무적의 은행강도의 위용도, 탄탄했던 우정도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더그 일당의 뿌리인 찰스타운은 옛 모습을 잃은 채 말끔하고 세련된 도시로 탈바꿈 중입니다. 특히 1996년이라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 선 찰스타운은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이면서 더그 일당에게 상실감과 증오심을 일으킵니다. 더그는 가장 찬란했던 순간과 가장 악몽 같은 순간을 제공해온 고향 찰스타운을 떠나고 싶어 하고, 일당 중 일부는 찰스타운의 옛 모습을 지키겠다며 무모한 행각을 일삼습니다. 말하자면 더그와 그 일당의 삶은 찰스타운 그 자체의 흥망성쇠와 꼭 닮은 모습이란 뜻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아름다운 고독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느와르 영화 한밤의 암살자’(장 피에르 멜빌)와 많이 닮아 있다고 합니다. 그 영화를 못 본 탓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읽는 내내 영웅본색으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가 자주 떠올랐습니다. 비극이 예견된 남녀 주인공의 사랑, 적절한 타이밍에 터지는 악당 주인공의 범죄액션, 평생을 쌓아온 탄탄했던 우정의 파열, 모든 것을 걸고 범죄자를 쫓는 수사관 등 홍콩 느와르의 치명적인 매력들이 작품 곳곳에 닮은꼴처럼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타운을 포함) 모두 네 편의 척 호건의 작품이 검색되는데, 아쉬운 건 타운만이 유일한 그의 단독 집필작이고 나머지 세 편은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와 공동집필한 뱀파이어 3부작이란 점입니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척 호건은 화제의 데뷔작 스탠드오프’(1995)타운’(2004)을 비롯 2010년까지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을 낸 걸로 나오는데, ‘타운외의 작품들이 한국에 더 이상 소개되지 않은 건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뒤늦게라도 그의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다면 반가운 마음으로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물론 데뷔작 스탠드오프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의 원제를 살펴보면 타운같은 느와르보다는 뱀파이어 장르로 의심(?)돼서 한국에 소개되더라도 읽을 가능성이 별로 없긴 하지만 말입니다.)

 

척 호건의 출간목록

-The Standoff (1995)

-The Blood Artists (1998)

-Prince of Thieves (‘타운’, 2004)

-The Killing Moon (2007)

-The Strain (뱀파이어 3부작, 2009)

-The Fall (뱀파이어 3부작, 2010)

-The Devils In Exile (2010)

-The Night Eternal (뱀파이어 3부작,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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