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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 타임 아이스
야마다 에이미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10여 년 전 ‘풍장의 교실’로 처음 만난 이후 늘 관심만 갖고 있었을 뿐 정작 한 편도 읽지 못한 야마다 에이미의 ‘문제적’ 데뷔작입니다. ‘문제적’인 이유는 조금 긴 단편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문예상 수상(1985년)과 함께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까지 오른데다 당시로서는 사회적 분위기에 반하는 설정 – 일본여성과 흑인남성의 욕망에 충실한 연애 – 때문에 꽤 화제가 됐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합니다. 소심한데다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하지만 클럽에서 재즈 가수로 살아가는 일본여성 ‘킴’과 기지에서 탈영한 미군 흑인병사 ‘스푼’이 짧은 시간동안 나눈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사랑은 지고지순함과는 거리가 먼 민낯 그대로의 욕망 덩어리입니다. 첫눈에 불이 붙은 그들은 동거에 들어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로의 육체에 탐닉합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정도의 남자를 만났다고 확신하는 ‘킴’은 소유욕에 가까운 집착을 ‘스푼’에게 쏟아냅니다. 반면 ‘스푼’은 오로지 ‘킴’의 육체를 탐닉하는데서 만족감을 느낍니다. 둘의 관계는 술과 마약과 폭력이 개입되면서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킴’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며 탈영병인 ‘스푼’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공포에 더 연연합니다.
“그(스푼)는 생각하지 않는다. 몸으로 반응한 것만이 그의 말이 된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나를 구속하는 이 모든 것을. 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알코올 중독에 빠진 매춘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p36~39 발췌)
“일본인은 먹지 못하는 그런 요리를 나는 그와 같이 먹었다. 그런 음식이 스푼의 몸 일부를 이룬다는 생각을 하면 그의 몸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뻤다.” (p92~93)
사실 두 주인공은 어딘가 판타지 속의 인물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동양여자와 흑인남자의 사랑이라는 흔치 않은 설정이라든가 왠지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부여받은 듯한 익명성이 강조된 이름들 - 일본인이지만 명백히 이국적 분위기를 띄는 ‘킴’과 부적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은 숟가락 때문에 얻은 별명인 ‘스푼’ - 은 작은 원룸이란 폐쇄적인 공간에서 두 사람이 구현한 사랑의 판타지를 좀더 강렬하게 고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은연중에 독자로 하여금 ‘내가 겪고 싶진 않지만 관음증 환자처럼 몰래 지켜보고 싶은 그들만의 기이한 사랑법’을 강조하려고 이런 설정들을 동원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개인적으론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 아야세 마루의 ‘치자나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 등 다소 상식과 도덕에서 벗어난 사랑을 그린 일본소설을 좋아하는데, ‘베드 타임 아이스’ 역시 그 범주에 들 만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들은 대부분 평이 극단적으로 갈리곤 하는데, 한쪽에선 (이 작품의 ‘옮긴이의 말’에서 주장하듯) ‘순수’나 ‘맑음’이 느껴지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파괴’, ‘부도덕’, ‘더러움’으로 가득 찬 불유쾌한 변태 이야기로만 읽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베드 타임 아이스’는 노골적이고 끈적끈적한 ‘몸의 합체’를 통해 극단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어서 더욱 더 호불호를 일으킬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 술과 마약과 폭력을 감내하는 ‘킴’의 태도는 사랑이라기보다 자발적인 종속이나 예속으로 보일 수도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은 모두 18편 정도입니다. 하지만 개정판까지 포함하여 마지막으로 출간된 게 ‘사랑의 습관 A2Z’(2013년)이니 8년 동안 신간 소식이 없었던 셈인데, 검색해보면 일본에서는 꾸준하게 작품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을 순서대로 읽고 싶다는 욕심을 갖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읽은 ‘베드 타임 아이스’를 계기로 틈날 때마다 그녀의 작품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그만큼 제 취향에 아주 잘 맞는 특별한 작가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