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아웃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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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0m급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일본 최대의 댐 오쿠토와에서 운전원으로 근무하는 도가시는 몇 달 전 절친한 동료인 요시오카와 함께 조난자를 구하러 나갔다고 홀로 살아남은 뒤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요시오카의 약혼녀였던 지아키가 요시오카의 일터이자 목숨을 앗아간 오쿠토와를 직접 보고 싶다며 찾아온다는 소식에 도가시는 그녀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할 마음의 준비를 하지만, 예기치 못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댐이 점거당하고 지아키마저 인질로 붙잡히자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도가시는 자동소총과 폭약으로 중무장한 범인들에 의해 육로와 통신이 모두 마비되어 댐이 외부와 완벽하게 고립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도가시는 오쿠토와의 산세와 댐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무기 삼아 홀로 위험천만한 싸움에 나섭니다.

 

“2,000m급 설산에서 발생한 전대미문의 테러! 테러에 맞서 싸울 무기는 오직 설산에 대한 경험뿐이다.”라는 카피만 보면 당연히 클리프 행어류의 영미권 액션 스릴러가 떠오르는데, 거대한 댐과 설산을 배경으로 한 일본 작품이라 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목인 화이트아웃짙은 안개나 눈보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자신의 손과 발도 보이지 않는데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어 허공에 뜬 느낌이 들 정도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주인공 도가시는 과거 절친인 요시오카를 잃었을 때에도, 또 홀로 테러리스트들과 맞서는 과정에서도 수차례 오쿠토와에 몰아친 극심한 화이트아웃을 겪습니다. 그때마다 말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마주치지만, 자신이 좀더 분투했다면 요시오카를 살릴 수도 있었다는 죄책감과 세상을 떠난 친구가 맡긴 사명’, 즉 그의 약혼녀 지아키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도가시는 그 숱한 화이트아웃들을 이겨냅니다.

 

큰 구도만 보면 테러리스트들이 장악한 빌딩 안에서 브루스 윌리스 혼자 총격전을 벌이며 인질들을 구해내는 (무려 30년도 넘은 영화) ‘다이 하드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도가시는 경찰도 아니고 하물며 총에 관한 한 쏴본 적은커녕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는 순수 아마추어입니다. 그의 유일한 재능은 오쿠토와의 산세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안다는 점과 댐 전문가로서의 지식과 경험뿐입니다. 그래서인지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인물입니다. 특히 눈앞의 주적은 댐을 점거한 무장 테러리스트지만, 거대한 자연의 힘이 내뿜는 폭설과 추위와 화이트아웃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와 싸우는 도가시의 결연한 각오와 분투는 단순한 액션 스릴러 이상의 의미를 독자에게 전해주곤 합니다.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설산이란 설정은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힘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사건을 단조롭게 만들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닌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하지만 가끔 540여 페이지의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건 바로 이런 단조로운 전개 때문입니다. 물론 범인과의 협상에서 난항을 겪는 경찰의 분주한 모습도 간간이 그려지고, 테러리스트 가운데 비밀을 간직한 인물의 이야기라든가 약혼자를 집어삼킨 오쿠토와를 찾았다가 인질이 된 지아키의 이야기도 나름 비중 있게 그려져서 지루할 틈은 거의 없었지만, 막판 반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도가시와 테러리스트들의 대결이 다소 동어반복적으로 느껴진 건 단조로운 전개가 낳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생각입니다. 0.5개가 빠진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99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2000년에 영화로도 제작됐다고 하는데, 어떤 경로로든 꼭 구해서 보고 싶은 욕심입니다. 설산과 댐을 배경으로 한 엄청난 재난 상황과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어떻게 영상으로 옮겨졌을지도 궁금하지만, 원작에서 느낀 단조로운 전개의 아쉬움이 어쩌면 영상에서는 어느 정도 극복됐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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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살인자 파비안 리스크 시리즈 1
스테판 안헴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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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남서부 도시 헬싱보리에서 연이어 심각하게 훼손된 사체들이 발견됩니다. 경찰은 범죄 현장에 남겨진 사진을 통해 피해자들이 학교 동창임을 알게 됩니다. 스톡홀름 범죄수사국에서 해고되듯 쫓겨나 고향인 헬싱보리로 돌아온 파비안 리스크가 이 사건 수사에 합류하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피해자들과 동창이었고, 살해된 자들이 학창 시절 지독한 학폭 가해자였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팀워크를 강조하는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파비안은 당시 두 사람의 먹잇감이었던 자가 범인이란 심증을 갖고 단독행동에 나섭니다. 하지만 일은 엉망진창으로 꼬이고 파비안은 오히려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나름 북유럽 스릴러를 무척 좋아한다고 자평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다지 높지 못한 타율(?) 때문에 조금은 피로도를 느끼는 중이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벽돌에 가까운 분량을 자랑하는 작품은 일단 피하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곤 했는데, 이 작품은 몇몇 이유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한 경우입니다. 우선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헨닝 망켈의 얼굴 없는 살인자와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기 때문인데, 같은 스웨덴 작품인데다 번역 제목까지 똑같고 심지어 두 작품 모두 시리즈의 포문을 연 첫 작품입니다. (물론 원제는 다릅니다. 헨닝 망켈의 ‘Mördare utan ansikte’는 직역해도 얼굴 없는 살인자인데 반해, 스테판 안헴의 ‘Offer Utan Ansikte’로 직역하면 얼굴 없는 희생자쯤이 됩니다.)

주인공 캐릭터도 비슷해서 둘 다 40대 중반을 향해가는 베테랑들이며, 주 활동지역 역시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주로 엇비슷합니다. 또 아내와 자식들과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마음고생을 한다는 점까지도 닮았습니다. 다만, 헨닝 망켈의 주인공 쿠르트 발란데르가 배 나온 아저씨스타일에 어딘가 살짝 허술해 보인다면, 스테판 안헴의 주인공 파비안 리스크는 10년은 젊어 보이는 외모에 마르고 민첩한 몸을 지녀 외모만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긴 합니다.

 

서론이 좀 길어졌지만 이런 이유로 648페이지라는 부담스런 분량에도 불구하고 스테판 안헴의 얼굴 없는 살인자를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별 3개밖에 줄 수 없을 정도로 저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범죄의 잔혹성이라든가 주인공 캐릭터만 놓고 보면 개인적인 취향에 딱 들어맞는 편이지만, 수시로 페이지 수를 들여다보게 할 정도로 장황하고 산만한 전개 때문에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00페이지 정도까지만 해도 기대감에 들뜨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점점 핵심보다는 곁가지 위주로 흐르기 시작했고,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그에 비례해서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거의 주인공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는 불행한 가족사는 너무 뻔해서 지루하게 읽혔고, 결국 막판에 가족이 사건에 휘말리겠구나, 라는 예상까지 쉽게 하게 만들었습니다. , 인접한 덴마크의 경찰을 끌어들인 것 자체는 괜찮았지만 그들만의 사건이 적잖이 분량을 차지하면서 오히려 메인 스토리에 방해가 되기만 했습니다. 사소한 예지만 큰 역할도 없는 단역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위해 몇 페이지씩 할애한 대목에선 그냥 통째로 넘긴 적도 있습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들을 겪을 때마다 자꾸만 페이지 수를 보게 되곤 했는데, 언제 648페이지까지 가나, 싶은 생각에 한숨만 나온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가장 아쉬웠던 건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동기입니다. , , , , 자궁 등 수많은 동창생의 몸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한 범인 치곤 그래서 죽였다고?”라는 의문을 자아낼 정도로 다소 어이없는 동기를 밝히는데, 이 대목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예전에 벽돌 책도 두려워하지 않고 덤비던 시절엔 스티그 라르손이나 요 네스뵈의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스릴러도 하루 안에 읽어내곤 했지만, 요즘은 조급증이 생긴 탓인지 일단 600페이지가 넘어간다 싶으면 읽으면서도 마음이 바빠집니다. 그래도 이야기가 흐트러지지 않고 밀도 있게 쭉 달리면 어떻게든 읽긴 하지만, 스테판 안헴의 얼굴 없는 살인자는 스릴러 자체보다도 곁가지들 때문에 지치고 만 작품입니다. 주인공, 조연, 사건 모두 흥미로워서 조금만 슬림했더라면 좋은 인상은 물론 후속작까지 기대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으로선 비슷한 분량(632페이지)의 시리즈 2편지의 심판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인터넷서점의 독자 서평은 대부분 호평 일색입니다. 제 서평이 극히 예외적인 소수 의견일 수 있으니 다른 독자들의 호평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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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식범 케이스릴러
노효두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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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식범은 고즈넉이엔티의 케이스릴러27번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11번째 만난 작품인데, 다소 편차는 있더라도 그동안 읽은 작품들 모두 개성과 매력을 갖춘 수작들이긴 했지만, ‘면식범은 탄탄한 이야기와 매력적인 미스터리 스릴러가 잘 조합된 명품으로 그 어느 케이스릴러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전직 경찰이자 지금은 유명한 범죄 심리학자인 도경수는 어느 날 갑작스런 교통사고 후 누군가에게 납치됩니다. 감금된 채 자신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들을 떠올리던 도경수는 얼마 후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합니다. 납치범 중 한 명의 얼굴이 자신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납치당한 이유가 6년 전 한 소녀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지금 당장 이 상황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가족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들어간 페이스 스릴러라는 표현 때문에 자칫 이 작품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독자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페이스 스릴러가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건 맞지만 결코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등장인물 모두의 심장을 한없는 무게로, 그것도 영원히 짓누를 죄와 벌에 관한 서사라는 게 더 정확한 설명입니다.

6년 전, 한 소녀의 죽음에서 시작된 두 가족의 비극은 오해와 은폐와 복수와 절망이라는 어둡고 긴 여정을 거쳐 마지막 페이지에서 거대한 마침표를 찍게 되지만, 실은 훨씬 더 고통스러울 남은 날들을 위한 쉼표일 뿐 진짜 마침표는 아닙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족을 지키려던 자에게도,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분노를 복수로 어루만지려던 자에게도 해피엔딩이란 어울리지 않으며, 더 무겁고 가혹한 굴레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여정 속에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는 페이스 스릴러도 포함되고, “누가? ? 어떻게?”라는 범인 찾기 미스터리도 끼어들지만, 그런 것들보다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심리 이기심, 분노, 복수심, 두려움, 욕망 등 에 좀더 관심을 두고 읽는다면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비극에 말려든 모든 인물은 6년 전 사건에 대해 각자만의 처지와 감정을 끌어안고 있지만, 그것들은 이야기 속 인물 그 누구에게든 쉽게 털어놓을 수도, 이해받거나 용서받을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괴로움과 고통은 독자를 향해 발산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독자는 이야기 못잖게 각각의 인물의 처지와 감정에 더욱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다소 거친 면도 있고, 시비를 걸자고 작정하면 몇몇 흠결을 지적할 수도 있지만 면식범은 그것들을 다 덮을 만큼의 매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서평을 보면 독자마다 평가가 엇갈리는 걸 알 수 있는데, 그중엔 단지 이 작품이 한국산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이유만으로 편견 섞인 시선을 드러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준 이하의 작품들을 무더기로 쏟아내거나 잔인하기만 할뿐 온통 억지로 가득 찬 일부 외국 작품들에 비하면 면식범은 충분히 호평 받고도 남을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언급된 작가의 전작 찾고 싶다를 당장 읽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동시에 이 작가가 앞으로 잘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 역시 그에 못잖게 간절합니다. 지금은 톱클래스에 오른 도진기나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든 여러 신인들의 매력적인 데뷔작처럼 면식범역시 그만한 인상과 여운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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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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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올해(2021) 꽤 눈여겨봤을 작가 중 한 명이 아시자와 요입니다. 이전까지 한국에 소개된 작품이 아마리 종활 사진관’(2017, 엘리) 단 한 편이었는데, “영정사진을 둘러싼 네 가족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린 연작 미스터리라서 그런지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진 못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무려 네 편의 작품을 한국에 출간하며 슬슬 화제성과 유명세에 시동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독특한 연작 괴담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2)을 시작으로 학교폭력과 복수의 문제를 다룬 죄의 여백’(4), 일상에 깃든 농도 짙은 공포를 소재로 한 단편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11)까지 매번 색다른 장르와 소재를 능숙하게 다루는 그의 필력은 왜 이제야 그의 작품들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작품보다 한 달 앞선 10월에 출간된 나의 신은 아직 못 읽었습니다.)

죄의 여백’(일본 출간 2012)으로 데뷔한 이래 가장 최근작인 悪手’(일본 출간 20215)에 이르기까지 모두 13편의 장단편을 출간했으니 1년에 한 편 이상씩 꾸준히 활동한 셈인데,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 8편이나 된다는 것도 잘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물론 덕분에 그만큼 아시자와 요와 자주 만나게 될 것 같다는 기대감도 갖게 됐으니 어쩌면 다행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표제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를 비롯하여 모두 5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장르와 소재 모두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라면 (그것이 사건이든 사고든)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서늘한 공포가 깃들어있다는 점과 주인공들의 동기에 대한 독자의 예측을 뒤집어버리는 매력적인 막판 반전입니다. 특히 뒤통수를 맞은 것 같지만 실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을 맛보게 만드는 독특한 반전은 (출판사 소개글대로) 단정하고 서늘한 아시자와 요의 필치 덕분에 더욱 큰 힘을 발산합니다.

 

18년 전 살인자가 된 외할머니의 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사소한 실수를 덮기 위해 벌인 행동이 야기한 돌이킬 수 없는 파국(‘목격자는 없었다’), 9살 손녀에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강요해온 할머니가 마주한 예상 밖의 종말(‘고마워, 할머니’), 세 살 딸을 학대한 끝에 죽음으로 내몬 여자의 이야기(‘언니처럼’), 그리고 지옥도나 다름없는 그로테스크한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던 한 여류 화가의 비극(‘그림 속의 남자’) 등 모두 개성 강한 색채를 지녔지만 어딘가 하나의 실로 꿰어질 듯한 기묘한 이야기들이 수록돼있습니다.

형식 역시 다양해서 작은 단서에서 출발하여 진실을 찾아내는 미스터리도 있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 속의 공포를 다룬 작품도 있고, 그 외에 서술트릭이나 그로테스크 호러 등 말 그대로 팔색조 같은 재미를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단편집입니다.

 

대체로 장편을 선호하는 취향이지만 아시자와 요는 단편 혹은 연작단편을 제대로 맛깔나게 요리할 줄 아는 작가라서 앞으로도 그의 단편이라면 고민 없이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우선은 올해 출간된 나의 신을 먼저 읽을 예정인데, 내년에도 아시자와 요의 작품들을 여러 편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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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홈즈
전건우 지음 / 몽실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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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선주공아파트에 사는 네 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주부탐정단. 수개월 간 곳곳에서 출몰한 성추행범 쥐방울을 잡기 위해 결성됐지만, 아파트 쓰레기통에서 여성의 잘린 손목과 함께 2년 간 경기도에서 일어난 미제 연쇄살인사건(일명 스마일 맨 사건)의 상징이 발견되면서 주부탐정단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쥐방울의 범행이 대범해졌을 수도 있고, 연쇄살인마 스마일 맨이 활동 영역을 서울로 옮겼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주부탐정단은 본격적으로 살인범 찾기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탐정단의 막내가 한밤중에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단순가출로 치부하는 경찰에게 격분한 주부탐정단은 위험천만한 단독수사를 결심합니다.

 

경찰들이 잘하는 것과 주부들이 잘하는 것은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냥 지나쳤던 중요한 장면을 찾아낼 수도 있으리라.” (p113)

 

고백하자면 할머니 탐정’, ‘학생 탐정’, ‘바리스타 탐정’, ‘어린이 탐정등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사건 자체도 덜 독하고, 해법 역시 주인공 캐릭터에 맞춰 아마추어 냄새를 풍기거나 감동 코드가 강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맥주집 가나리야의 주방장 구도가 손님들의 미스터리한 사연을 듣는 단편집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같은 예외가 있기도 합니다.) 2년 전에 출간된 살롱 드 홈즈를 외면해온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인데, 이 작품이 프랑스에 진출했다는 소식에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는 걸까, 라는 호기심에 뒤늦게 찾아보게 됐습니다.

 

네 명의 주부탐정단의 중심인물은 30대 후반의 주부 공미리입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탐정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그녀는 지금은 우울증에 걸린 초라한 중년이 됐지만 여전히 탐정에의 꿈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또래이자 세 자리 수에 육박하는 몸무게를 지닌 추경자, 장차 프랑스 풍 카페를 꿈꾸는 광선슈퍼의 주인 60대 전지현, 대학 중퇴 후 친정에 살며 아기를 키우는 싱글맘 박소희가 주부탐정단의 멤버로 가세합니다. 이들은 주부들이 잘하는 것의 힘을 발휘하며 작은 단서에서부터 차곡차곡 미스터리를 풀어나갑니다.

 

초반에 바바리맨 성추행범 쥐방울을 잡는 것이 목표일 때만 해도 역시나...”라는 편견을 가졌던 게 사실인데, 범인이 화자인 챕터를 읽고 그녀들이 마주할 사건의 규모와 잔혹성을 깨달은 뒤론 어지간한 미스터리를 읽을 때처럼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작가는 평범한 이들이 비범한 사건과 만나 아등바등하는 이야기라고 소박하게 표현했지만, 주부탐정단이 마주한 사건은 잔혹한 소시오패스 살인극입니다. 언뜻 영화 세븐과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초반에 도쿄의 공원 쓰레기통에서 여자의 오른팔과 핸드백이 발견됩니다.)이 연상되는 연쇄살인은 치졸하고 무능한 남편들에게 무시당하고 사회의 주류에서 내쳐진 주부탐정단 멤버들에게 그저 비범한 사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가혹하고 끔찍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부탐정단이 유명한 주인공들처럼 빛나는 추리와 화려한 액션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주부의 눈에만 보이는 사소하지만 명확한 단서들을 포착해내고, ‘함께 있으면 든든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자들만의 소속감과 유대감과 우정을 통해 경찰 못잖은 협업을 이뤄내며, 순수한 분노의 에너지를 앞세워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아줌마 스타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부 캐릭터 때문에 한계가 분명했던 건 사실입니다. 경찰이 놓친 결정적 단서를 찾아내긴 했지만 그건 주부탐정단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주인공들을 위해 태만하거나 모자라게 설정된 경찰 캐릭터 덕분입니다. 리더인 공미리의 추리는 분명 반짝반짝 빛나긴 했지만 (리얼리티 때문인지) 역시 아마추어 이상의 내공을 발휘하진 못했고, 잔인한데다 용의주도해 보인 범인이 다소 허술한 최후를 보인 점도 중반까지 잘 유지돼온 긴장감을 흐트러뜨린 요인입니다.

 

작은 규모의 광선주공아파트에서 또다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질 것 같진 않기에 이들의 활약을 다시 보기는 어렵겠지만 어쩌면 작가는 다른 동네를 설정해서라도 혹은 주인공 격인 공미리를 이사를 시켜서라도 제2의 주부탐정단을 조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반에 인용한 문장처럼 주부들이 잘하는 것은 경찰 혹은 명탐정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설정이기에 실제로 제2의 주부탐정단이 결성된다면 두 팔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응원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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