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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아웃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1월
평점 :
절판
2,000m급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일본 최대의 댐 오쿠토와에서 운전원으로 근무하는 도가시는 몇 달 전 절친한 동료인 요시오카와 함께 조난자를 구하러 나갔다고 홀로 살아남은 뒤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요시오카의 약혼녀였던 지아키가 요시오카의 일터이자 목숨을 앗아간 오쿠토와를 직접 보고 싶다며 찾아온다는 소식에 도가시는 그녀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할 마음의 준비를 하지만, 예기치 못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댐이 점거당하고 지아키마저 인질로 붙잡히자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도가시는 자동소총과 폭약으로 중무장한 범인들에 의해 육로와 통신이 모두 마비되어 댐이 외부와 완벽하게 고립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도가시는 오쿠토와의 산세와 댐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무기 삼아 홀로 위험천만한 싸움에 나섭니다.
“2,000m급 설산에서 발생한 전대미문의 테러! 테러에 맞서 싸울 무기는 오직 설산에 대한 경험뿐이다.”라는 카피만 보면 당연히 ‘클리프 행어’류의 영미권 액션 스릴러가 떠오르는데, 거대한 댐과 설산을 배경으로 한 일본 작품이라 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목인 ‘화이트아웃’은 ‘짙은 안개나 눈보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자신의 손과 발도 보이지 않는데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어 허공에 뜬 느낌이 들 정도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주인공 도가시는 과거 절친인 요시오카를 잃었을 때에도, 또 홀로 테러리스트들과 맞서는 과정에서도 수차례 오쿠토와에 몰아친 극심한 화이트아웃을 겪습니다. 그때마다 말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마주치지만, 자신이 좀더 분투했다면 요시오카를 살릴 수도 있었다는 죄책감과 ‘세상을 떠난 친구가 맡긴 사명’, 즉 그의 약혼녀 지아키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도가시는 그 숱한 화이트아웃들을 이겨냅니다.
큰 구도만 보면 테러리스트들이 장악한 빌딩 안에서 브루스 윌리스 혼자 총격전을 벌이며 인질들을 구해내는 (무려 30년도 넘은 영화) ‘다이 하드’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도가시는 경찰도 아니고 하물며 총에 관한 한 쏴본 적은커녕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는 순수 아마추어입니다. 그의 유일한 재능은 오쿠토와의 산세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안다는 점과 댐 전문가로서의 지식과 경험뿐입니다. 그래서인지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인물입니다. 특히 눈앞의 주적은 댐을 점거한 무장 테러리스트지만, 거대한 자연의 힘이 내뿜는 폭설과 추위와 화이트아웃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와 싸우는 도가시의 결연한 각오와 분투는 단순한 액션 스릴러 이상의 의미를 독자에게 전해주곤 합니다.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설산이란 설정은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힘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사건을 단조롭게 만들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닌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하지만 가끔 540여 페이지의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건 바로 이런 단조로운 전개 때문입니다. 물론 범인과의 협상에서 난항을 겪는 경찰의 분주한 모습도 간간이 그려지고, 테러리스트 가운데 비밀을 간직한 인물의 이야기라든가 약혼자를 집어삼킨 오쿠토와를 찾았다가 인질이 된 지아키의 이야기도 나름 비중 있게 그려져서 지루할 틈은 거의 없었지만, 막판 반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도가시와 테러리스트들의 대결이 다소 동어반복적으로 느껴진 건 단조로운 전개가 낳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생각입니다. 별 0.5개가 빠진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99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2000년에 영화로도 제작됐다고 하는데, 어떤 경로로든 꼭 구해서 보고 싶은 욕심입니다. 설산과 댐을 배경으로 한 엄청난 재난 상황과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어떻게 영상으로 옮겨졌을지도 궁금하지만, 원작에서 느낀 단조로운 전개의 아쉬움이 어쩌면 영상에서는 어느 정도 극복됐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