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위증 1 - 사건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9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미스터리에 제대로입문하게 된 계기는 미미 여사의 모방범이었습니다. 두툼한 분량의, 그것도 세 권으로 구성된 솔로몬의 위증을 앞에 두고 보니 오래 전 모방범’ 1~3권을 지켜보며 이걸 언제 다 읽나?’ 고민했던 일이 새삼 기억이 났습니다. 물론 모방범을 완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미미 여사의 작품이라 새삼 고민할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위증을 집어 들기까지 꽤 여러 번 주저한 것이 사실입니다.

중학교에서 벌어진 연이은 사건2,000여 페이지라는 분량을 채울 만한 소재인가? 아무리 미미 여사라지만 2,000여 페이지를 채우려면 메인 스토리 외에 이런저런 주변부 이야기와 조연들을 다수 동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작품의 밀도와 재미는 희석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뒤늦게 ‘9년 간 연재됐던 원고지 8,500매의 작품이라는 출판사 소개 글을 읽고서야 이 방대한 분량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우려(?)와 선입견을 지닌 채 첫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사건(1) - 결의(2) - 법정(3)이라는 소제목대로, 1권은 조토 제3중학교에서 연이어 벌어진 사건들이 주 내용입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학교 후문에서 발견된 가시와기의 시신,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놓고 학교와 경찰, 학부모와 학생이 벌이는 갈등과 공방전, 그 와중에 날아든 익명의 고발장이 야기한 예기치 못한 사태들, 3자의 악의적 장난의 결과로 개입하게 된 매스컴과 그로 인한 대혼란, 그리고 연이은 희생자와 사고의 발발 등이 이어지면서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갑니다.

 

1권까지만 읽은 상태라서 좀 이른 감은 있지만 앞서 가졌던 선입견 중 일부는 맞아들었고, 일부는 기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분량에 관한 한 역시 두 권 정도가 알맞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나머지 2,3권을 읽은 후에 이 생각이 180도로 바뀔 수도 있지만, 1권의 템포와 구성을 감안한다면 3권까지 끌고 갈만한 동력이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거의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만 하루 만에 읽어낼 정도로 페이지터너로서의 미미 여사의 필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쉽고 간결한 문장만으로도 사건과 인물들을 사실감 있게 묘사했고, 중학교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긴장감과 몰입도는 웬만한 연쇄살인 에피소드 못지않게 팽팽하게 유지됩니다. 또한, 학생, 학부모, 교사, 경찰, 기자 등 다양한 계층의 방대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촘촘하게 사건과 연관되어 있고, 동시에 뚜렷한 개성과 특징을 지닌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1권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 중 하나는 미미 여사가 궁극적으로 이 방대한 내용을 통해 하려는 얘기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미미 여사의 작품 뿐 아니라 여느 미스터리를 막론하고 진범 찾기 과정 속에는 독자들이 응원하거나 증오할 대상이, 즉 선과 악이 선명하게 구분되기 마련이고, 반전을 감안하더라도 대체로 캐릭터에 대한 애증은 큰 혼란 없이 유지되는 편이지만, ‘솔로몬의 위증은 그런 일반적인 원칙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 이 캐릭터를 미워해야 하는 건지 응원해야 하는 건지, 이 캐릭터가 진범으로 드러났을 때 통쾌함을 느끼게 될지 찜찜함만 남을지, 사건의 진실이 어느 쪽으로 판명돼야 정의가 승리하는 건지 책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이 작품 속 모든 캐릭터는 선과 악의 양면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이기적이기 짝이 없으며, 주관과 소신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정당화에 급급한 성격일 뿐이며, 정의를 부르짖지만 남들은 동의해주지 않는 혼자만의 정의에 함몰되어 있기도 합니다.

누구도 응원할 수 없고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보니 오히려 지나치게 몰입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지켜볼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결국 대단원에 이르러 드러날 진실이 무엇이든, 진범이 누구이든 간에 이 방대한 내용에 휩쓸렸던 모든 캐릭터들에게는 평생을 안고 가야할 상처만 남을 것만 같고, 독자들 역시 깊고 묵직한 독후감을 떠안아야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이르게 됐습니다.

 

2권의 소제목은 결의입니다. 1권의 후반부에서 우리가 이 사건을 해결하겠어.”라는 다짐이 나온 점을 감안하면 아마 진실을 찾는 주인공들의 지난한 여정이 묘사될 것으로 보이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진실이나 진범, 사건의 전개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성장이나 변모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크 플레이스
길리언 플린 지음, 유수아 옮김 / 푸른숲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19851, 캔자스의 시골 농장에서 일가족이 참혹하게 피살된 채 발견됩니다. 어머니 패티와 두 딸이 피살됐고 막내딸 리비는 겨우 목숨을 건졌으며 맏아들 벤은 가족 살해범으로 체포됩니다. 그렇게 24년이 흐른 어느 날, 리비는 벤의 무죄를 믿는 추종자들의 연락을 받습니다. 그들은 사건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사건과 관련된 물건을 넘겨주거나 자신들이 조사했던 내용을 토대로 수감 중인 벤과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주면 비용은 물론 사례까지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과거였고 벤이 무죄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당장 생계가 막막했던 리비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24년 전 참사와 관련 있는 인물들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만남이 진행될 때마다 새로운 단서와 낯선 이름들이 등장하고 리비는 가족의 비극 뒤에 지금껏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숨어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야기의 구성은 과거(사건 발생 당일)와 현재가 교차로 진행되는 방식이며 과거의 경우 어머니 패티와 오빠 벤의 챕터로 다시 나뉩니다. 필요에 따라 다른 인물들의 챕터가 간간히 등장하기도 하지만, 관련 인물들을 찾아다니는 현재의 리비의 이야기에 맞춰 24년 전 사건 당일의 이야기가 맞물리듯 교차되면서 긴장감을 높입니다.

 

나를 찾아줘를 읽었을 때의 느낌도 그랬지만, 길리언 플린의 작품은 묵지근한데다 후유증을 길게 남기는 특징이 있습니다. 평범한 개인이 겪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참담함을 집요하리만치 디테일하게 파고들 뿐 아니라 크고 작은 비밀들과 그것이 남기는 충격 역시 억지스럽게 과장하거나 강조하기 보다는 태연스러울 만큼 담담하게 묘사해서 오히려 독자들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1980년대 중반 캔자스의 황량한 농장과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리비 가족에 대한 묘사, 오빠 벤과 그 주변 인물들의 사건 당일 행적에 대한 묘사, 리비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오랜 상처 일명 다크 플레이스’ - 에 대한 묘사, 그리고 현재의 그녀의 눈에 비친, 24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암울한 소도시의 황폐함에 대한 묘사 등 길리언 플린의 냉정하면서도 섬세한 문장들은 들여다봐서는 안 될 심연의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호기심을 동시에 전해주는 일종의 중독성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서사 때문에 속도감이 다소 떨어지고 대목에 따라 장황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24년 전의 진실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라는 선입견이 들기도 했고, 리비 역시 영민하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캐릭터가 아니라 가난하고, 투명인간 같고, 스스로 삶을 폐쇄시킨 채 살아온 평균 이하의 여자이다 보니 읽는 내내 긴박한 미스터리보다는 고통스러운 진실 찾기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길리언 플린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러다가 중반부에 이르러 본색을 드러내며 속도감과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리비가 가족의 비극의 진실에 한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저절로 빨라지고 길리언 플린만의 중독성 강한 매력들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다크 플레이스2013년 최고의 작품으로 꼽기도 하지만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은 독자들도 있습니다. 길리언 플린의 작품이 내뿜는 무겁고 어둡고 긴 후유증에 대한 호불호 때문이겠지만, 사건보다 캐릭터에 천착하는 작품을 선호하는 독자라면 한번쯤은 고통스러운 책읽기에 동참해볼 것을 권해보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인 오스틴 왕실 법정에 서다 제인 오스틴 미스터리 1
스테파니 배런 지음, 이경아 옮김 / 두드림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절친 이소벨의 결혼을 축하하는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카그레이브 백작의 저택을 찾은 제인 오스틴은 연이어 벌어진 살인사건의 주요 목격자이자 참고인이 되어 얼떨결에 사건에 휘말립니다. 더구나 절친 이소벨과 그녀가 흠모하는 피츠로이 페인이 용의자로 지목되자 제인은 그들의 결백을 확신하며 관계자들에 대한 은밀한 탐문을 시작합니다. 무도회가 열린 스카그레이브 가문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꼼꼼히 조사하지만 막연한 심증만 늘어갈 뿐 명쾌하게 걸려드는 단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 이소벨과 피츠로이 페인은 귀족의 범죄를 다루는 왕실법정으로 소환되고, 제인은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 상태에서 드디어 왕실법정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예상치 못한 절체절명의 위기와 진실규명의 기회를 동시에 맞이합니다.

실존했던 작가를 픽션 속 주인공으로 설정한 특이한 형식, 19세기 초반의 영문학을 들여다보는 듯한 고전미 넘치는 문장, 그리고 연쇄살인의 진범 찾기가 함께 버무려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도 김탁환의 백탑파 시리즈가 젊은 실학자들을 실명으로 등장시킨 연쇄살인 미스터리를 선보인 바 있지만, ‘제인 오스틴, 왕실 법정에 서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사랑받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삶 자체를 픽션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을 뿐 아니라 원탑 주인공으로서 손색없는 활약을 부여함으로써 여자 셜록 홈즈라 불릴만한 당대의 탐정 캐릭터를 만들어냈습니다. 말하자면 팬픽(fan fiction)의 정수라고나 할까요?

 

오만과 편견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할 정도로 오래 전에 읽었고, ‘엠마는 영화로만 보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제인 오스틴이 스테파니 배런을 통해 우리 곁에 온 게 틀림없다.” 라는 미국 소설가의 평에 전적으로 공감할 정도로 마치 제인 오스틴 본인이 쓴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미스터리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순간순간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면서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고, 필요할 때마다 상대방의 맹점을 야무지게 톡 쏘는 듯한 영국식 위트와 유머가 살아있으며 남녀 관계에 관한 한 요즘과는 확연히 다른 고전 영문학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장점들은 원작의 맛을 잘 살려낸 번역가의 힘에도 크게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미스터리로서의 장점도 잘 갖추고 있는데, 무엇보다 편지와 인편 외에는 달리 통신 수단이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덕분에 오롯이 탐정의 명민한 두뇌와 부지런한 발품에 의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함 없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장점은 셜록 홈즈와 그 시대를 풍미했던 고전 탐정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엽기적인 잔혹함이나 롤러코스터를 탄 듯 현란한 구성은 없지만 고전적인 추리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묵직하고 집요하게 파헤치는 것만으로 독자들을 열광시켰던 그들의 활약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고전적인 미덕만 갖춘 작품은 결코 아닙니다. 특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후반부는 페이지터너로서의 매력이 가득하고, 초반부의 예열을 거쳐 서서히 가속이 붙는 이야기의 전개 속도도 꽤나 스피디합니다. 이 작품이 제인 오스틴 시리즈의 첫 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후 발간될 시리즈를 통해 셜록 홈즈라는 남자에 필적하는 여자 탐정 제인 오스틴의 탄생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채로운 구성과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매력적인 주인공까지 더해진 덕분에 모처럼 즐거운 책읽기의 시간을 선사해준 제인 오스틴 시리즈가 한국에도 계속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가 죽은 밤 닷쿠 & 다카치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닷쿠와 다카치를 비롯한 아쓰키 대학의 친구들은 플로리다에서의 홈스테이를 위해 다음 날 출국 예정인 미오의 환송파티를 엽니다. 엄격한 규율에 갇혀있던 미오는 부모님의 부재를 틈타 열렸던 환송파티를 마치고 들뜬 마음에 귀가했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피를 흘린 채 바닥에 쓰러진 낯선 여인이었습니다. 당연히 경찰이나 구급차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미오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립니다. 얼떨결에 사건에 연루된 닷쿠와 다카치는 미오의 집에서 발견된 여인의 정체부터 알아내려 하지만, 아무런 능력도 권한도 없는 그들에겐 시작부터 온 사방이 막다른 골목일 뿐입니다. 엉뚱한 상상력과 빈곤한 수사력만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던 그들 앞에 갖가지 시련이 닥치지만, 닷쿠와 다카치는 기어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말 덕분에 닷쿠 일행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타임루프라는 특이한 소재를 거듭된 반전과 독특한 형식미로 잘 버무렸던 일곱 번 죽은 남자덕분에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팬이 되었습니다. 신작의 출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불과 한 달 만에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가웠고, 기대를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 때문에 더 반가웠습니다.

닷쿠&다카치 시리즈의 첫 편인 그녀가 죽은 밤SF적 설정을 주로 차용하던 니시자와 야스히코가 현실을 무대로 삼아 좀더 대중성을 확보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주인공들은 대학교 2학년인 청춘들이고, 연이어 벌어지는 기이한 살인사건만 빼면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며, 인생의 최고 미덕을 술이라 주장하는 닷쿠와 슈퍼모델 급 외모를 지닌 얼음장 같은 다카치, 그리고 두 사람의 주위에 포진한 개성 만점의 캐릭터들은 쉴 새 없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을 발휘하며 긴장과 웃음을 함께 전해줍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밤은 그저 밝고 달달한 청춘 미스터리는 결코 아닙니다. 팬티스타킹 속의 잘린 머리카락과 함께 발견되는 피살자들, 사랑에 눈이 멀고 탐욕에 찌들대로 찌든 치명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밝혀지는 그 밤의 진실 등 잔혹하고 독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좌충우돌 캐릭터들이 펼치는 롤러코스터 같은 전개에도 불구하고 에필로그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나면 작가가 짜놓은 논리적 구성이 얼마나 촘촘한지 새삼 경탄하게 됩니다. ‘일곱 번 죽은 남자에서도 익히 느꼈던 바지만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영역 롤러코스터 식 전개와 논리적 구성 을 전혀 위화감 없이 조합해낸 작가의 필력은 후속작들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주고 있습니다.

 

사족으로... 워낙 이야기의 전개가 빠르고 챕터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줄거리를 소개하기가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잘못하면 너무 많은 정보를 흘릴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어정쩡한 설정 소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 읽은 후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최소한 초반부의 재미를 희석시킬 만큼 너무 많은 이야기를 소개해놓았습니다. 일종의 셀프 스포나 마찬가지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가능하면 사전 정보 없이 본편과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주의 인물
수잔 최 지음, 박현주 옮김 / 예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60대 한국계 수학자 리(Lee)는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작은 대학의 교수입니다. 교수로서의 입지나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사교성마저 없는데다 두 번의 이혼을 거친 후 휑한 주택에서 홀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재능과 젊음 덕분에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옆방의 헨들리를 무시하는 척 하지만 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어느 날, 헨들리에게 배달된 사제 폭탄이 터지면서 리의 삶은 휘청거리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복잡한 심경의 리에게 발신자 이름이 없는 편지가 도착합니다. 발신자는 헨들리 폭사 사건을 거론하면서 리에 대한 협박 메시지를 전합니다. 리는 젊은 날 절교했던 게이더가 발신자라고 확신했고, 그와의 불편한 과거사 때문에 수사관에게 편지에 관해 거짓 진술을 했는데, 그로 인해 갑자기 요주의 인물이 되고 맙니다. 즉 헨들리 폭사의 준 용의자로 의심받게 된 것입니다. 뒤늦게 편지에 관해 모든 것을 털어놓고 게이더를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주지 않습니다.

 

올해 읽은 미스터리와 스릴러 가운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던 작품입니다.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자체보다는 당초 예상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의 성격때문이었습니다.

우선 일반적인 기준의 미스터리나 스릴러 장르로 분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진범 찾기가 밑바탕에 깔려있긴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노교수 리의 지나온 삶과 거기에 연루됐던 다양한 인물들, 그리고 대체로 불행했던 그들 간의 관계에 대한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날, 외톨이였던 리에게 손을 내밀어준 게이더, 짧지만 불꽃처럼 리와 사랑을 나누었던 게이더의 아내 아일린, 그리고 결국 아일린을 아내로 맞이한 리. 이렇게 세 사람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조연들이 등장합니다. 공통점이라면, 주조연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불행과 고립을 자초한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 캐릭터들이라는 점입니다.

 

작가는 인물 뿐 아니라 그들이 함께 겪었던 시간들을 집요하리만치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단지 있었던 일뿐 아니라 인물 하나하나의 심리적 변화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덕분에 이야기는 가볍게 날아다니지 않고, 인물들의 사실감은 극에 달합니다. 정교하게 짜인 서사와 함께 고통스런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보는 리의 행적과 심리는 지적 미스터리라는 간판보다는 오히려 묵직한 고전의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들도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한자리에서 맴맴 도는 듯했고, 심리 묘사의 경우 표정 하나를 위해 여러 페이지를 할애하기까지 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길고 긴 고해성사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원작 자체가 그랬을 수도 있지만 곳곳에서 마주쳤던 현학적인 번역도 책읽기를 어렵게 만든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역자 후기에 참을성 있는 독자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주는 작품이란 언급이 있는데, 개인적으론 절반 정도만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즉 참을성 있는 모든 독자가 충분한 보상을 받는 작품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렸는데도 보상받지 못하는 독자가 조금은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게 저의 솔직한 의견입니다. 특히 속도감과 반전을 기대했던 미스터리나 스릴러 독자라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는 것 자체가 꽤 힘들 수도 있습니다.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아메리카의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던 남자, 절친한 친구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에 이르지만 결국 불행한 삶을 살아야했던 남자,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 아무에게도 곁을 주지 못한 채 홀로 말라가다가 기어이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과거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남자. 이 남자의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게 게이더나 아일린 같은 존재는 없었는지? 그만큼 상처를 줬거나 상처를 받았거나 기억하고 싶거나 반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존재는 없었는지?

그동안 빠르고 가파른 책읽기에만 전념했던 습관 덕분에 요주의 인물은 완독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작품이었지만, 새삼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 돼주기도 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