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솔로몬의 위증 1 - 사건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9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일본 미스터리에 ‘제대로’ 입문하게 된 계기는 미미 여사의 ‘모방범’이었습니다. 두툼한 분량의, 그것도 세 권으로 구성된 ‘솔로몬의 위증’을 앞에 두고 보니 오래 전 ‘모방범’ 1~3권을 지켜보며 ‘이걸 언제 다 읽나?’ 고민했던 일이 새삼 기억이 났습니다. 물론 ‘모방범’을 완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미미 여사의 작품이라 새삼 고민할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위증’을 집어 들기까지 꽤 여러 번 주저한 것이 사실입니다.
‘중학교에서 벌어진 연이은 사건’이 2,000여 페이지라는 분량을 채울 만한 소재인가? 아무리 미미 여사라지만 2,000여 페이지를 채우려면 메인 스토리 외에 이런저런 주변부 이야기와 조연들을 다수 동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작품의 밀도와 재미는 희석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뒤늦게 ‘9년 간 연재됐던 원고지 8,500매의 작품’이라는 출판사 소개 글을 읽고서야 이 방대한 분량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우려(?)와 선입견을 지닌 채 첫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사건(1권) - 결의(2권) - 법정(3권)이라는 소제목대로, 1권은 조토 제3중학교에서 연이어 벌어진 사건들이 주 내용입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학교 후문에서 발견된 가시와기의 시신,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놓고 학교와 경찰, 학부모와 학생이 벌이는 갈등과 공방전, 그 와중에 날아든 익명의 고발장이 야기한 예기치 못한 사태들, 제3자의 악의적 장난의 결과로 개입하게 된 매스컴과 그로 인한 대혼란, 그리고 연이은 희생자와 사고의 발발 등이 이어지면서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갑니다.
1권까지만 읽은 상태라서 좀 이른 감은 있지만 앞서 가졌던 선입견 중 일부는 맞아들었고, 일부는 기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분량에 관한 한 역시 두 권 정도가 알맞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나머지 2,3권을 읽은 후에 이 생각이 180도로 바뀔 수도 있지만, 1권의 템포와 구성을 감안한다면 3권까지 끌고 갈만한 동력이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거의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만 하루 만에 읽어낼 정도로 페이지터너로서의 미미 여사의 필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쉽고 간결한 문장만으로도 사건과 인물들을 사실감 있게 묘사했고, 중학교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긴장감과 몰입도는 웬만한 연쇄살인 에피소드 못지않게 팽팽하게 유지됩니다. 또한, 학생, 학부모, 교사, 경찰, 기자 등 다양한 계층의 방대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촘촘하게 사건과 연관되어 있고, 동시에 뚜렷한 개성과 특징을 지닌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1권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 중 하나는 미미 여사가 궁극적으로 이 방대한 내용을 통해 하려는 얘기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미미 여사의 작품 뿐 아니라 여느 미스터리를 막론하고 진범 찾기 과정 속에는 독자들이 응원하거나 증오할 대상이, 즉 선과 악이 선명하게 구분되기 마련이고, 반전을 감안하더라도 대체로 캐릭터에 대한 애증은 큰 혼란 없이 유지되는 편이지만, ‘솔로몬의 위증’은 그런 일반적인 원칙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즉, 이 캐릭터를 미워해야 하는 건지 응원해야 하는 건지, 이 캐릭터가 진범으로 드러났을 때 통쾌함을 느끼게 될지 찜찜함만 남을지, 사건의 진실이 어느 쪽으로 판명돼야 정의가 승리하는 건지 책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이 작품 속 모든 캐릭터는 선과 악의 양면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이기적이기 짝이 없으며, 주관과 소신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정당화에 급급한 성격일 뿐이며, 정의를 부르짖지만 남들은 동의해주지 않는 ‘혼자만의 정의’에 함몰되어 있기도 합니다.
누구도 응원할 수 없고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보니 오히려 지나치게 몰입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지켜볼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결국 대단원에 이르러 드러날 진실이 무엇이든, 진범이 누구이든 간에 이 방대한 내용에 휩쓸렸던 모든 캐릭터들에게는 평생을 안고 가야할 상처만 남을 것만 같고, 독자들 역시 깊고 묵직한 독후감을 떠안아야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이르게 됐습니다.
2권의 소제목은 ‘결의’입니다. 1권의 후반부에서 “우리가 이 사건을 해결하겠어.”라는 다짐이 나온 점을 감안하면 아마 진실을 찾는 주인공들의 지난한 여정이 묘사될 것으로 보이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진실이나 진범, 사건의 전개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성장이나 변모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