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주의 인물
수잔 최 지음, 박현주 옮김 / 예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60대 한국계 수학자 리(Lee)는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작은 대학의 교수입니다. 교수로서의 입지나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사교성마저 없는데다 두 번의 이혼을 거친 후 휑한 주택에서 홀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재능과 젊음 덕분에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옆방의 헨들리를 무시하는 척 하지만 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어느 날, 헨들리에게 배달된 사제 폭탄이 터지면서 리의 삶은 휘청거리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복잡한 심경의 리에게 발신자 이름이 없는 편지가 도착합니다. 발신자는 헨들리 폭사 사건을 거론하면서 리에 대한 협박 메시지를 전합니다. 리는 젊은 날 절교했던 게이더가 발신자라고 확신했고, 그와의 불편한 과거사 때문에 수사관에게 편지에 관해 거짓 진술을 했는데, 그로 인해 갑자기 요주의 인물이 되고 맙니다. 즉 헨들리 폭사의 준 용의자로 의심받게 된 것입니다. 뒤늦게 편지에 관해 모든 것을 털어놓고 게이더를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주지 않습니다.

 

올해 읽은 미스터리와 스릴러 가운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던 작품입니다.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자체보다는 당초 예상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의 성격때문이었습니다.

우선 일반적인 기준의 미스터리나 스릴러 장르로 분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진범 찾기가 밑바탕에 깔려있긴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노교수 리의 지나온 삶과 거기에 연루됐던 다양한 인물들, 그리고 대체로 불행했던 그들 간의 관계에 대한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날, 외톨이였던 리에게 손을 내밀어준 게이더, 짧지만 불꽃처럼 리와 사랑을 나누었던 게이더의 아내 아일린, 그리고 결국 아일린을 아내로 맞이한 리. 이렇게 세 사람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조연들이 등장합니다. 공통점이라면, 주조연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불행과 고립을 자초한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 캐릭터들이라는 점입니다.

 

작가는 인물 뿐 아니라 그들이 함께 겪었던 시간들을 집요하리만치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단지 있었던 일뿐 아니라 인물 하나하나의 심리적 변화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덕분에 이야기는 가볍게 날아다니지 않고, 인물들의 사실감은 극에 달합니다. 정교하게 짜인 서사와 함께 고통스런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보는 리의 행적과 심리는 지적 미스터리라는 간판보다는 오히려 묵직한 고전의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들도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한자리에서 맴맴 도는 듯했고, 심리 묘사의 경우 표정 하나를 위해 여러 페이지를 할애하기까지 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길고 긴 고해성사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원작 자체가 그랬을 수도 있지만 곳곳에서 마주쳤던 현학적인 번역도 책읽기를 어렵게 만든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역자 후기에 참을성 있는 독자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주는 작품이란 언급이 있는데, 개인적으론 절반 정도만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즉 참을성 있는 모든 독자가 충분한 보상을 받는 작품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렸는데도 보상받지 못하는 독자가 조금은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게 저의 솔직한 의견입니다. 특히 속도감과 반전을 기대했던 미스터리나 스릴러 독자라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는 것 자체가 꽤 힘들 수도 있습니다.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아메리카의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던 남자, 절친한 친구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에 이르지만 결국 불행한 삶을 살아야했던 남자,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 아무에게도 곁을 주지 못한 채 홀로 말라가다가 기어이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과거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남자. 이 남자의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게 게이더나 아일린 같은 존재는 없었는지? 그만큼 상처를 줬거나 상처를 받았거나 기억하고 싶거나 반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존재는 없었는지?

그동안 빠르고 가파른 책읽기에만 전념했던 습관 덕분에 요주의 인물은 완독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작품이었지만, 새삼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 돼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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