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기 톰의 집에 어서 오세요 판타스틱 픽션 그레이 Gray 5
벤 엘튼 지음, 박슬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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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청률과 돈이라면 영혼까지 팔아치울 피핑 톰 프로덕션의 대표 제럴딘 헤네시는 리얼리티 쇼 하우스 어레스트의 세 번째 시즌을 런칭합니다. 10명의 남녀가 9주 간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함께 생활하면서 매주 한 명씩 탈락자를 선정하는 전형적인 엿보기 리얼리티 쇼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선정성을 무기로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방송 27일째 날, 쇼는 최대의 위기를 맞습니다. 참가자 한 명이 참혹하게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목격자는 여럿이지만 아무도 범인의 얼굴을 못 봤고, 참가자 모두 어정쩡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어서 수사는 초기부터 난항을 겪습니다. 이스트서식스의 콜리지 경감은 부하인 후퍼, 퍼트리샤와 함께 촬영 테이프를 확인하며 사건 당일의 행적, 참가자들 간의 관계 등을 포착하려 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잡아내지 못합니다. 특히 추가 살인을 암시하는 살인예고장이 발견되면서 초긴장 상태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는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며 계속 방송됩니다. 그리고 수많은 관객과 카메라 앞에서 우승자를 발표하는 생방송 도중 아무도 예상 못한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모두를 충격에 빠뜨릴 진실이 밝혀집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은밀하고 다양한 코드들이 한꺼번에 버무려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관음증을 의미하는 피핑 톰(peeping tom)’을 전면에 내세웠고, 빅 브라더로 군림하는 미디어, B급 정서로 가득한 캐릭터들, 물샐 틈 없는 밀실살인 등 일단 포장만 봐도 야릇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설정들이 가득합니다.

리얼리티 쇼 도중 일어난 살인사건이라는 독특한 설정에 관심이 가기도 했지만, 이 작품을 읽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엿보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작가는 엿보기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독자의 심리를 잘 활용합니다. 가볍고 선정적인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 음란하고 위험한 쇼의 목격자가 돼라!”라고 유혹합니다.

 

저 역시 어느 지점부터인가 쇼에 열광하는 집단관음중 환자 중의 한 명, 또는 쇼에 참가한 열 명 중의 한 명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건 발생 이후 리얼리티 쇼와 진범 찾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중독성은 더 강해졌습니다. 살아남아 우승자가 되어 50만 파운드와 지상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될 기대감과 누가 범인일까? 혹시 내가 두 번째 희생자는 아닐까?’라는 공포심을 쇼의 참가자들과 100% 공유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내밀한 심리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작가의 능력은 TV, 연극, 영화에서 연출자와 연기자, 작가로 다양한 활동을 이력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뿐 아니라 작가는 이야기의 전개나 구성에서도 독특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작가는 중후반부에 이르기까지 피살된 사람이 누구인지,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밝히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내내 누가 살해당할 만한 캐릭터인지, 누가 잔혹한 살인마가 될 만한 캐릭터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시간 순의 배열이 아니라 현재 수사 시점과 과거 촬영 시점을 뒤죽박죽으로 섞음으로써 긴장감과 호기심을 증폭시킵니다.

 

실제로 영국에서 이런 수준의 방송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전라 노출은 기본이고 출연자 간의 성관계를 조장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으며, 소위 비속어라 불리는 욕들이 생방송 중에도 난무합니다. 사실과 관계없이 흥미 위주의 편집을 통해 출연자를 쓰레기나 악인을 만들기도 하고, 지고지순한 순정남녀나 인기절정의 매력남녀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다른 날 촬영한 분량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자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시청자들은 이런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집단적 관음증에 열광하며 쇼에 몰입합니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선정적인 장면들과 비속어와 폭력이 난무하는 표현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들이 적지 않겠지만, 이 작품에서 다루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거나 선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찬 우울한 블랙코미디에 가깝습니다. 빅브라더로 자리 잡은 인터넷과 미디어, 그에 호응하는 무뇌아에 다름 아닌 개인들, 탈정치화와 탈사회화를 통해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는 권력의 실체 등 행간에 숨은 명백한 메시지들이 선정적인 포장에 가려 빛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가장 아쉬운 부분은 우유부단 또는 무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경찰 캐릭터들입니다. 경찰들 사이의 세대 간 대결 구도는 흥미롭게 보였지만, 본연의 역할인 수사에 있어서는 분량에 비해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작품 평가에서 별 하나가 사라진 가장 큰 이유입니다) 밀실살인의 진범 찾기 과정은 지루하거나 뜬금없는 부분들이 눈에 자주 띄었고, 특히 마지막 진범 지목 퍼포먼스는 억지스럽고 작위적으로 보였습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중반부까지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 출연진 간의 긴장과 갈등이 첨예하게 맞붙으면서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초반부의 지루함과 선정성에 대한 거부감만 잘 견뎌낸다면 마지막에 이르러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미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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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린우드 바클레이 지음, 신상일 옮김 / 해문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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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을 맞이한 글렌과 실라, 그리고 딸 켈리. 하지만 그날 밤, 실라는 만취한 채 차 안에서 정신을 놓고 있던 중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와 부딪혀 즉사합니다. 날벼락 같은 소식에 글렌과 딸 켈리는 심각한 패닉에 빠집니다. 개축 중이던 고객의 집이 전기 설비 불량으로 전소된 일로 글렌의 회사는 위기에 처하고, 딸 켈리는 실라의 사고로 인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에 이릅니다. 원수처럼 지내던 장모는 이 기회에 손녀 켈리를 데려가려고 하고, 실라의 절친이었던 앤 부부와 벨린다 부부에게까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깁니다. 그러던 중 글렌은 한 사설탐정으로부터 실라와 그녀의 절친들이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로부터 실라의 소지품과 관련된 협박까지 받게 되자 글렌은 실라의 죽음이 단순한 음주운전 사고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분량(500페이지 내외)인데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사건과 에피소드 덕분에 오후 한나절 만에 마지막까지 달렸습니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가족 지키기 스릴러의 원작으로 손색없을 만큼 스피드와 재미, 반전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글렌 가버를 지켜보고 있으면 나쁜 것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아내의 의문의 죽음, 회사의 위기, 천문학적 금액의 소송, 딸 켈리 방을 향한 괴한의 총격 등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이라도 겪기 어려운 일들을 불과 몇 주 사이에 집중포화를 맞듯 한꺼번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평화롭던 가족은 해체되고, 아내와 어머니를 잃은 자들의 고통은 깊어질 뿐입니다.

 

이별 없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사고역시 린우드 바클레이가 가족을 중심에 놓고 풀어간 이야기입니다. 가족이 주인공인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대체로 재미와 불편함을 동시에 주는 편이지만, 이렇게 쉴 새 없이 연타를 맞는 주인공을 보면 불편함 쪽이 훨씬 더 배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제대로 된 악에 대한 응징이 없다면 책을 다 읽고도 찜찜할 것 같다는, 즉 주인공이 현실성이 떨어지는 슈퍼맨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악을 물리치고 행복한 결말이 맺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이 사고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자 가장 취약한 고리입니다. 글렌 가버는 형사도, 탐정도 아닌 평범한 건축회사 대표입니다. 무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두뇌 회전이 뛰어난 지략가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리와 탐문은 언제나 제대로 갈 길을 찾아갑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실함과 근면함까지 갖춘 그는 인간적 슈퍼맨임에 분명합니다.

 

반면, 그와 동시에 그의 지나치게 현명한 행보가 눈에 거슬릴 때가 종종 있는데, 작가가 너무 친절하고 쉽게 글렌이 나아갈 길을 설정해준 탓입니다. 여기 가면 단서가 기다리고 있고, 저기 가면 증거가 기다리고 있고, 누군가를 만나면 상대방이 알아서 심증을 굳힐만한 진술을 흘려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으면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 힌트를 건네줍니다. 그러다 보니 글렌은 본의 아니게 점점 진짜 슈퍼맨이 될 수밖에 없었고, 어느 순간인가 이미 뛰어난 탐정이 되어 있는 그를 보며 묘한 거부감과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캐릭터에 대한 몇 가지 아쉬움을 제외하면 사고는 대체로 잘 읽히는 작품입니다. 설정은 단순하지만 그로부터 파생된 에피소드들은 다채롭게 뻗어나갑니다. 억지로 갖다 붙인 설정이 아니다 보니 사실감과 설득력은 자연스레 얻어집니다. 또한 짧다고 느껴질 만큼 챕터들을 세분화 해놓았는데, 이런 구성 덕분에 속도감과 긴장감이 상승될 수 있었습니다.

 

나름 아쉬움도 있었지만, 린우드 바클레이의 필력에는 대체로 만족한 편이었고,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작품 두 편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해주는데도 충분했습니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조만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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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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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지역의 한 스키장 어딘가에 감춰진 치명적인 탄저균을 찾기 위해 아들과 함께 도쿄에서 달려온 대학병원 주임연구원 구리바야시는 광활한 스키장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절망에 빠집니다. 하지만 우연히 도움을 받게 된 안전요원 네즈 덕분에 가까스로 탄저균을 찾아냅니다. 정체불명의 미행자도 따돌렸고, 경찰에 알리지 않고도 탄저균을 손에 넣은 구리바야시는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안심하지만 한 통의 전화 때문에 금세 얼굴에 핏기를 잃고 맙니다. 실은 해결된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탄저균의 행방마저 모호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키장 슬로프에 폭탄을 묻어놓은 범인과 스키장 스태프들의 대결을 다룬 백은의 잭에 이어 히가시노 게이고가 두 번째로(제가 알기로는) 스키장을 무대로 삼아 집필한 작품입니다. 스키장도 다른 곳으로 바뀌었고 새로 등장한 인물도 많지만 백은의 잭에서 활약했던 네즈 쇼헤이와 세리 치아키가 등장하고 있어서 네즈 시리즈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백은의 잭과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이 겪는 가장 어려운 점은 광활한 스키장에서 위험물질을 찾아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스키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스키어 또는 보더들의 질주가 자주 묘사됩니다. 덕분에 독자 역시 함께 속도감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활자나 문단 간격이 크고 넓은데다 종이도 비교적 두텁게 느껴진 이유도 있지만, 이런 속도감 덕분에 반나절 만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야기가 단선적이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가벼워보였던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이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식의 스키장 수색에 할애되어 있어 미스터리를 읽는 긴장감보다는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캐릭터 면에서도 탄저균을 감춘 범인이나 그것을 되찾으려는 주인공들이나 딱히 대립구도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어서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고, 스키장 온천마을의 가족이야기는 조금은 뜬금없어 보이는 면도 있습니다.

 

아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가장 엔터테인먼트에 충실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복잡하고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좋은 점수를 못 얻겠지만, 후반 막판에 이르러 두세 번 연이어 일어나는 반전 덕분에 히가시노 특유의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가볍게 머리를 식히거나 속도감 있는 이야기를 즐기는 분에게는 짧은 시간 안에 읽을 수 있는 부담 없는 책읽기가 되어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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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3 - 법정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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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 제3중학교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묘사한 1권과 학생들 스스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교내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2권에 이어 엿새 동안 벌어진 교내 재판의 기록과 그를 통해 드러난 진실을 담은 마지막 3권입니다.

 

가시와기 다쿠야와 아사이 마쓰코의 죽음, 모리우치 선생의 피습, 오이데 집의 화재 등 조토 제3중학교 주변에서 발생한 사건의 모든 관련자들이 증인으로 등장하여 이미 밝혀진 사실 또는 새롭게 등장한 단서들에 대해 진술합니다. 검사와 변호사의 대결은 실제 법정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하게 전개되고, 심지어 상대방이 전혀 예상 못한 증인을 채택함으로써 날선 공방을 벌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혹독한 시간들이었지만 조금씩 진실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결국 마지막 날에 이르러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는 증인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대단원을 향해 달려갑니다.

 

앞서 1~2권을 읽은 독자라면 대부분(또는 적잖이) 교내 재판을 통해 드러날 진실에 대해 어느 정도는 감을 잡은 상태에서 3권을 시작하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반전이 어울리는 내용도 아니고, 자살이냐 타살이냐, 타살이라면 범인은 누구냐, 이런 사소한호기심과 궁금증을 미끼삼아 3권의 내용이 전개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상을 하면서 책을 읽은 탓인지, 본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에서는 아무도 이길 수 없어. 모두 상처투성이야. 그래도, 그냥 내버려둘 순 없으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니까 다들 노력하는 거야. 올바른 일을 하고 싶으니까.”

 

1~3권 전체의 테마이자 마지막 3권의 의미를 짧고 명료하게 정리한 문장입니다. 실제로 교내 재판 팀 대부분은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할 크고 작은 상처를 얻게 됩니다. 차라리 그들이 찾아낸 진실이 무엇’, 자살 또는 타살? 범인은 누구?’ 같은 팩트뿐이었다면 덜 상처받을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 앞에 나타난 진실은 ?’였습니다. 그는 왜 그랬던 걸까? 그녀는 왜 그랬던 걸까? 그들은 왜 그랬던 걸까? 그 이유들은 하나같이 아프고, 절실하고,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자, 방관했던 자, 모른 척했던 자들이 그 이유를 깨닫게 된 순간 안타까워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2,0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은 미리부터 독자들을 부담스럽게 만들었고, 설정 역시 독하거나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않습니다. 15살의 중3 학생들의 노력과 성과라고 보기엔 너무 뛰어나거나 비상해 보인 나머지 사실감이 떨어지는 부분도 적지 않으며, 특히 3권의 경우 느리고 완만한 속기록의 느낌이 강해서 조금은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엔딩은 개운치도 깔끔하지도 않고, 언뜻 납득이 가지 않거나 조금은 억지스럽게 보이는 부분도 있습니다.

1~3권의 서평이 조금씩 갈린 것은 아마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미미 여사가 추구한 캐릭터의 진정성덕분에 그 모든 아쉬움들이 충분히 커버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주연과 조연, 남자와 여자, 학생과 어른, 선인과 악인, 그리고 이 이분법의 가운데에 위치한 모든 인물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일관되고 충실하게 해낸 덕분에 적잖은 분량임에도 멈추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폭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려하고 스케일 큰 사건보다는 작아도 진정성 있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취향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독자들과는 의견이 많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1주일 동안 푹 빠져들었던 솔로몬의 위증은 제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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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2 - 결의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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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225, 학교 후문에서 2학년 생 가시와기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 이듬해 초여름까지 조토 제3중학교 주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한 1권에 이어 2권에서는 후지노 료코를 비롯한 여러 학생들이 경찰과 학교가 외면하고 덮어두었던 사건의 진실을 스스로의 힘으로 파헤치기 위해 교내 재판을 준비하며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익명의 고발장에 의해 가시와기 살인범으로 지목받은 오이데 슌지를 피고인으로 놓고 후지노 료코, 노다 겐이치 등 조토 제3중학교 학생들이 판사, 변호사, 검사, 배심원 등의 역할을 맡아 여름방학 동안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변호사와 검사로 나뉜 학생들은 오이데를 비롯한 관련 인물들의 탐문은 물론 철저한 자료조사를 위해 거의 형사를 방불케 하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물론 그 과정들은 결코 순탄치 않을뿐더러 진작 예상했으나 막상 부딪혀보니 훨씬 더 공고하게 자신들을 가로막는 장벽 때문에 몇 번의 크고 작은 고비를 겪게 됩니다. 임시교장과 대부분의 교사들, 심지어 동료 학생들조차 비협조적이거나 방해꾼 노릇을 했고, 중요한 진술을 기대했던 인물들은 변호사든 검사든 어느 쪽에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을 다한 노력 덕분에 나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고, 경찰이나 교사, 학부모들이 깜짝 놀랄만한 단서를 찾아내기도 하지만, 관련 인물 중 일부가 방화, 상해 등에 휘말리면서 가시와기의 죽음에서 출발한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지난 1권의 서평에 달린 댓글 가운데 “1권과 2,3권의 서평이 극과 극이라는 내용이 있어서 내심 걱정도 됐고, ‘무슨 이야기로 남은 두 권의 분량을 채울 것인가?’라고 우려도 했었지만, 2권까지 읽은 현재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기우였던 것으로 드러났고, 이 서평을 마치는 대로 마지막 3법정을 큰 기대와 함께 읽기 시작할 생각입니다.

 

사건을 다룬 1권과 법정을 다룰 3권 사이에서 과연 결의라는 소제목을 지닌 2권이 무슨 내용으로 채워질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미미 여사는 학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캐릭터들과 가지 치듯 발생하는 연관 사건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같은 말을 반복하지도 않고 지루하게 늘어뜨리지도 않으면서 알차게 채워놓았습니다. 동시에 마지막에 실체를 드러낼 것으로 보이는 묘한 위화감을 곳곳에 배치해 놓음으로써 본격 법정물이 될 3권에 대한 기대감도 한껏 높여놓고 있습니다.

 

사건 자체도 흥미롭게 진행되지만 제일 관심을 끈 것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그들 간의 다양한 인간관계들입니다. 가시와기 사건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만, 피고인과 변호사, 검사, 판사, 배심원으로 나뉜 학생들은 각기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가치관과 성격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게 됩니다. 또한 교내 재판을 그저 학생들의 치기어린 장난쯤으로만 여겼던 학부모, 교사, 경찰 역시 어느 시점인가부터 각기 다른 심정과 목적으로 주시합니다.

진실은 하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는 캐릭터 수만큼 다양합니다. 동시에 어느 누구도 일관되게 선하거나 일관되게 악한 모습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가해자가 됐다가 피해자가 됐다가 또는 방관자로 머물기도 합니다. 누구나 진실을 원하지만 때에 따라 진실을 묻어두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가시와기의 죽음의 원인이 밝혀진다고 해도 교내 재판을 진행한 학생들이 웃을일은 없습니다.

 

이런 다양한 캐릭터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독자 입장에서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모두에게 행복한 엔딩이 되어줄지 오리무중이 됩니다. 작가가 이런 서사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독자들은 혼란스럽고 답답한 책읽기만 강요받게 되지만, 미미 여사는 독자로 하여금 모든 등장인물들과 골고루 교류할 수 있도록 꼼꼼히 안배했고, 그 결과 그저 재미있는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또 작가가 정해준 주인공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료코가 되어, 어떤 때는 오이데가 되어, 또 어떤 때는 교사나 형사가 되어 제 나름만의 진실 찾기에 뛰어들 수 있게 만들어줬습니다.

 

조토 제3중학교에서 벌어질 엿새간의 재판이 어떤 파란을 겪게 될지, 아직 터지지 않고 남아있는 사건은 무엇이 있을지, 몇몇 캐릭터들에게 부여된 감춰진 비밀은 어떤 형태로 공개될지,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질 진실이 료코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상흔을 남길지 이런저런 궁금함을 떠올리면 남은 3법정의 분량이 좀 모자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1권을 마친 후 무슨 이야기로 남은 두 권의 분량을 채울 것인가?’라고 걱정했던 일이 새삼 민망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사족으로, 굳이 아쉬운 점을 두 가지만 꼽자면 우선 2권부터 새로 등장하는 인물이 상당히 많고, 그들이 료코나 겐이치와 함께 주연급으로 활약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교내 재판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캐릭터가 필요한 점은 이해가 되지만, 몇몇 캐릭터는 전형적인 슈퍼맨’, ‘캔디걸등의 작위적인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좀더 사소한 점이지만, 15세의 중3이라는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문득문득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탐문이나 자료조사 등 교내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은 물론 말하는 수준이나 사고방식을 지켜보고 있으면 웬만큼 철든 성인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 무수히 발견됩니다. 특히, 상대방의 속내를 읽어내거나, 두세 수를 내다보는 혜안을 과시할 때면 내가 중3보다도 사고력이 떨어지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딱히 아쉬움이라기보다는 그저 읽는 동안 느꼈던 묘한 위화감에 대한 호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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