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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가노 지역의 한 스키장 어딘가에 감춰진 치명적인 탄저균을 찾기 위해 아들과 함께 도쿄에서 달려온 대학병원 주임연구원 구리바야시는 광활한 스키장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절망에 빠집니다. 하지만 우연히 도움을 받게 된 안전요원 네즈 덕분에 가까스로 탄저균을 찾아냅니다. 정체불명의 미행자도 따돌렸고, 경찰에 알리지 않고도 탄저균을 손에 넣은 구리바야시는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안심하지만 한 통의 전화 때문에 금세 얼굴에 핏기를 잃고 맙니다. 실은 해결된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탄저균의 행방마저 모호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키장 슬로프에 폭탄을 묻어놓은 범인과 스키장 스태프들의 대결을 다룬 ‘백은의 잭’에 이어 히가시노 게이고가 두 번째로(제가 알기로는) 스키장을 무대로 삼아 집필한 작품입니다. 스키장도 다른 곳으로 바뀌었고 새로 등장한 인물도 많지만 ‘백은의 잭’에서 활약했던 네즈 쇼헤이와 세리 치아키가 등장하고 있어서 ‘네즈 시리즈’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백은의 잭’과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이 겪는 가장 어려운 점은 광활한 스키장에서 위험물질을 찾아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스키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스키어 또는 보더들의 질주가 자주 묘사됩니다. 덕분에 독자 역시 함께 속도감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활자나 문단 간격이 크고 넓은데다 종이도 비교적 두텁게 느껴진 이유도 있지만, 이런 속도감 덕분에 반나절 만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야기가 단선적이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가벼워보였던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이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식의 스키장 수색에 할애되어 있어 미스터리를 읽는 긴장감보다는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캐릭터 면에서도 탄저균을 감춘 범인이나 그것을 되찾으려는 주인공들이나 딱히 대립구도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어서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고, 스키장 온천마을의 가족이야기는 조금은 뜬금없어 보이는 면도 있습니다.
아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가장 엔터테인먼트에 충실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복잡하고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좋은 점수를 못 얻겠지만, 후반 막판에 이르러 두세 번 연이어 일어나는 반전 덕분에 히가시노 특유의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가볍게 머리를 식히거나 속도감 있는 이야기를 즐기는 분에게는 짧은 시간 안에 읽을 수 있는 부담 없는 책읽기가 되어줄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