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의 여름
미쓰하라 유리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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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장 가는 차안에서 읽을 생각으로 책꽂이에서 단편집을 고르던 중 3년 전쯤 읽었던 열여덟의 여름이라는 제목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목차를 보니 내용도 대략 생각이 났지만, 좋은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나서 주저 없이 한 번 더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각 작품마다 나팔꽃-금목서-헬리오트로프-협죽도 등 꽃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고 있어서 마치 꽃을 모티브로 한 연작의 느낌을 줍니다.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꽃을 모티브로 한 연작 단편은 잘 안 어울리는 조합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네 편 가운데 일반적인 미스터리의 느낌을 주는 작품은 이노센트 데이즈뿐입니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대체로 가족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따뜻하거나 애틋한 주조로 다루고 있어서 일반적인 미스터리 범주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이유는 나머지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작지만 독특한 미스터리적 요소, 즉 엔딩에 이르러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거나 빙긋 웃음 나게 하거나 또는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일상 속의 작고 소중한 비밀들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통해 잘 버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18살 청소년과 연상의 여인의 인연 때문에 첫사랑 이야기처럼 읽히는 열여덟의 여름은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나팔꽃의 반전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성장기의 첫사랑+이뤄질 수 없는 사랑+지독한 살의가 소년과 여인의 사이에서 교묘하고 자연스레 흘러가면서 예상치 못한 결말을 전해줍니다.

자그마한 기적형의 순정은 소소한 미스터리 장치를 통해 마음이 푸근해지거나 빙긋 웃음이 나는 엔딩을 선사합니다. ‘자그마한~’이 아내를 잃고 아들과 함께 살던 미즈시마의 새로운 인연에 대한 이야기라면, ‘형의~’는 연극에 미친 형의 사랑 이야기로 굳이 이름 붙이자면 유머 미스터리 장르입니다.

이노센트 데이즈는 반전이 주는 서늘함과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작품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매가 겪어야 했던 비극을 주의, 위험이라는 꽃말을 가진 협죽도를 매개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작품마다 온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 가족을 배치했고, 엔딩에 희망을 남겨놓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쉽고 평이하지만 깊이와 따뜻함이 배어있는 문장들과 수채화처럼 묘사된 꽃과 주변 정경들 역시 네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점입니다. 가장 어둡고 무거운 이노센트 데이즈조차 날선 미스터리의 느낌이라기보다 안쓰럽거나 서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작가 미쓰하라 유리가 네 작품의 모티브로 을 설정한 것은 아마도 이런 정서를 극대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고, 많은 독자들에게 그 의도는 기대 이상으로 전달됐으리라 여겨집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정서에 비호감인 미스터리 독자들은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3년만이긴 하지만 다시 한 번 읽은 열여덟의 여름은 결과를 알고 읽었음에도 여전히 예전과 비슷한 따뜻한 느낌을 남겨줬습니다. 단편을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정서는 단편이 아니라면 표현하기도, 느껴보기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가끔씩 호평을 받은 단편집은 일부러 찾아 읽기도 합니다.

미쓰하라 유리가 이 작품으로 상을 받은 것이 2002년인데도 국내에서 더 이상 출간된 후속작품이 없다는 점이 무척 아쉽게 느껴집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는 일본에서는 다음 작품을 꼭 읽고 싶은 작가로 주목받았다라고 돼있는데 일본 출간작이 있다면 국내에도 좀더 소개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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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의 몸값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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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그레인저 제화의 회장 자리를 목전에 둔 더글러스 킹은 어느 날 자신의 아들 바비를 납치했다는 유괴범의 전화를 받습니다. 하지만 실제 유괴된 것은 운전기사의 아들 제프였고, 유괴범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에게 거액의 몸값을 요구합니다. 회사 주식 확보를 위해 거금을 준비해야 했던 킹은 몸값 지불을 거부하고, 스티브 카렐라를 비롯한 87분서 형사들은 유괴범의 흔적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납치범 중 한 명인 에디는 아내 캐시의 만류에 잠시 흔들리기도 하지만 주범인 바너드의 포악한 성정을 이겨내지 못하기도 했고, 더 이상 구질구질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에 떠밀려 끔찍한 범행을 강행하기로 합니다.

 

원제가 ‘King's Ransom’인 이 작품의 출간년도는 1959년으로, (에드 맥베인 홈페이지에 따르면) ‘87분서 시리즈가운데 10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36번째 작품이자 1983년에 출간된 아이스이후 두 번째 읽은 작품인데, 무려 24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이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주연들의 캐릭터나 87분서의 분위기는 한결같았습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사족과 설명이 조금 많았다고 느꼈던 아이스와는 달리 선명하고 깔끔한 문장, 적절한 비유와 풍자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시리즈의 초창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스티브 카렐라 등 87분서 형사들의 활약보다는 본인의 자식이 아닌 아이의 몸값을 지불하는 문제를 놓고 벌이는 킹과 여러 캐릭터들 사이의 가치관의 대결이 메인 스토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티브 카렐라의 끈질긴 탐문과 단서를 이용한 묵직한 추리를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내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2014년의 시각으로 보면 약간 싱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건 해결 과정이 간결해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아이의 몸값을 둘러싼 킹과 주변인들의 갈등이 현실감 있게 그려진 덕분이었습니다.

 

사업과 아이의 목숨 사이에서 갈등하는 더글러스 킹, 아이의 몸값을 지불하라며 킹과 충돌하는 아내 다이앤, 몸값을 지불하게 함으로써 주식 확보 대결에서 킹을 무너뜨리려는 회사의 라이벌들, 몸값을 받아내 지금껏 한 번도 누린 적 없는 행복한 삶을 꿈꾸는 에디, 은행털이는 용인해도 유괴는 안 된다는 에디의 아내 캐시 등 등장하는 캐릭터들 모두 윤리적 갈등을 빚으며 격렬하게 대치합니다. 심지어 87분서의 형사 스티브 카렐라까지 이 갈등에 가세하는데, 이들의 충돌 장면 하나하나가 작가의 맛깔난 문장을 통해 현실감과 공감을 획득한 덕분에 수사물로서의 미덕은 조금 흐릿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과 속도감은 오히려 배가됐습니다.

 

킹의 몸값의 재미를 더해준 것은 홍지로의 번역입니다. 후기에 실린 역자의 말을 읽어보면 평범한 단어 하나하나에까지 신경을 쓴 번역가의 고뇌를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외에도 애매하게 비꼬는 표현이라든가,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스런 문장들, 캐릭터의 특징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드러내주는 문장들 속에서 꼼꼼하고 적절한 번역의 맛을 여러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티브 카렐라를 비롯하여 맛없는 커피로 유명한 서무과의 미스콜로, 아버지의 장난에 가까운 작명 덕분에 평생 수난을 겪어온 마이어 마이어 등 아이스에서 만났던 친숙한 캐릭터들을 만난 일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87분서 시리즈는 1956경찰혐오자로 시작하여 2005‘Fiddlers’까지 거의 50년에 걸쳐 55편이 출간됐는데, 절판된 책을 제외하고 현재 국내에는 여섯 편만 만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경찰소설의 텍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훌륭한 작품들이기도 하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스티브 카렐라와 진짜 형사같은 87분서 멤버들의 활약 때문에라도 이 시리즈의 나머지 작품들이 국내에 좀더 많이 소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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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빛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5
이누이 루카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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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단편집을 만났습니다. ‘여름 빛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들은 형식적으로는 호러물로 분류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섬뜩한 느낌을 남기는 극단적인 호러물에서부터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애틋하고 따뜻한 호러물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독특한 색깔과 느낌을 지니고 있어 정통 호러물에 비호감인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소구할만한 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단편집임에도 불구하고 1부와 2부로 나뉘어있는데, 1부에 실린 세 편은 각각 1945, 1922, 192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2부의 세 편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가 이누이 루카가 훗카이도 삿포로 출신 때문인지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 지역들을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다카시(여름 빛), 죽은 자의 영혼과 만나게 되는 이시쿠로(쏙독새의 아침), 열등감에 휩싸여 동생을 향한 저주의 의식을 치르는 기미(백 개의 불꽃), 마술 뿐 아니라 공중부양의 능력을 지닌 소년 다쿠(Out of this world), 타인의 감정이 풍기는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아야코(바람, 레몬, 겨울의 끝) 등 현실을 뛰어넘는 캐릭터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공감할 수 있는 사연들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지 비현실적이라거나 허황된 느낌은 거의 받지 못 했습니다.

 

인물 뿐 아니라 독특한 설정들도 눈에 띄는데, 저주를 불러온다는 돌고래를 닮은 물고기인 상괭이, 불길한 기운을 한가득 담아뒀다가 동트기 전에 울음소리와 함께 온갖 곳에 뱉는다는 쏙독새, 동족인 금붕어는 물론 자신보다 큰 생물까지 뭐든지 먹어치우는 괴물 금붕어 등 호러물로서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유무형의 설정들이 곳곳에 산재해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표제작인 여름 빛바람, 레몬, 겨울의 끝이 마음에 들었고, 2부 첫 작품인 는 정통 호러물의 서늘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호러 여왕의 강림이라는 홍보 문구가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데, 아주 조금 과장된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녀의 호러 단편집이 새로 출간된다면 주저 없이 집어 들게 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간간이 눈에 띈 오타였습니다. 목차의 소제목 중 백 개의 불꽃이 내용에서는 백 개의 꽃으로 되어 있고, ‘다니카와다키자와(p46), ‘마코토마쿠토(p206) 등 인물 이름도 잘못 인쇄됐고, 그 외 부분적인 오타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난 점, 특히 마지막 작품 바람, 레몬, 겨울의 끝에서는 여러 차례 발견된 점이었습니다. 끝까지 잘 마무리 됐다면 좋았을 텐데 옥의 티처럼 아쉬움을 남긴 대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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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1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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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일본 작가의 미스터리라는 독특한 이력 뿐 아니라 팔순을 넘은 나이에 제12회 본격미스터리 대상을 받은 작가에 대한 호기심, 또 셜록 홈즈보다 100년을 앞선, 아직 과학이 맹아기를 거치고 있던 시기를 무대로 해부학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출간 전부터 관심을 가졌습니다.

 

혹시나 일본인 캐릭터가 등장할까 했는데, 100% 영국산 캐릭터로만 이뤄진 작품입니다. 형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개인해부교실을 열어 연구에 몰두해온 대니얼 버턴을 비롯, 에드워드, 나이절 등 그의 제자들이 겪는 의문의 살인사건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또한, 작가로 성공하겠다는 열망으로 시골에서 올라온 17살 청년 네이선이 런던에서 겪는 기구한 고난들이 서브스토리로 진행되다가 대니얼의 제자인 에드워드와 나이절을 만나게 되면서 본 이야기에 합류하게 됩니다.

 

열게 되어~’에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탐정 역할은 강직한 심성의 맹인 치안판사 존 필딩과 그의 여조수 앤이 맡습니다. 대니얼의 해부교실에서 발견된 참혹한 2구의 시신뿐 아니라 연이어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에 대니얼의 주변 사람들은 물론 제자들까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파악하지만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정황들 때문에 진범 찾기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게 됩니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열게 되어~’는 독특한 캐릭터 묘사가 장점인 작품입니다. 소심한 외과의사지만 해부학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하는 소심남 대니얼, 뛰어난 외모와 언변을 갖춘 대니얼의 수제자이자 어딘가 냉소적인 면을 가진 에드워드, 시력을 잃은 대신 청각과 후각이 발달하여 호흡과 말투만으로 진위를 가려내는 치안판사 존, 그의 조카이자 조수면서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열혈 여성 사법관 앤 등 다양하고 특이한 캐릭터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있어 그들의 언행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열게 되어~’가 갖고 있는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은 기대보다는 조금 못 미쳤는데, ‘해부학을 이용하여 사건의 진상과 진범을 찾아내는 스토리가 아닐까, 라는 기대와 달리 대니얼의 해부교실이 사건의 주요 공간으로만 등장한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물론 임신 6개월의 상태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한 귀족 미혼녀의 사체를 해부한다든가 연구를 위해 도굴꾼이나 유족들로부터 돈을 주고 시신을 거래하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 등 해부학과 관련된 풍부한 묘사들이 책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주고 있지만, 치안판사의 등장 이후 대니얼과 제자들이 조연으로 밀려난 느낌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와 함께 18세기 말 런던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맛깔난 문장들 덕분에 400여 페이지의 분량을 편안하고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이 몰고 온 피폐화된 런던의 뒷골목 풍경이나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불공정하기 짝이 없는 사법 체계, 부를 축적하기 위해 저질러지는 주가 조작 등 현실에 대한 묘사는 세밀하게 이뤄졌고, 간간히 등장하는 영국식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유쾌한 소동극 장면은 참혹한 살인사건의 와중에 잠깐 잠깐씩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제공했습니다.

 

본격미스터리 대상작에 대한 기대감 치곤 몇 가지 아쉬움이 남은 것이 사실이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작품 자체가 지닌 독특함 때문에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셜록 홈즈가 활약하던 런던의 풍경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그보다 100년을 앞서 살았던 해부교실 멤버들과 치안판사의 활약, 그리고 조금은 더 날것 같은 느낌을 주는 런던의 모습에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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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1 - 사도세자 이선, 교룡으로 지다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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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 그리고 사도세자는 역사 속 인물 가운데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가장 많이 조명된 인물들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손자가 (할아버지 손에 죽은) 아버지의 뜻을 잇는, 어찌 보면 비극이면서도 막장에 가까운 이야기이고, 동시에 극성(劇性) 강한 소재이다 보니 여러 장르를 통해 오늘날까지 복원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린의 실질적 주인공은 이산 정조대왕이겠지만, 1권에서는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전의 동 시대를 다룬 무수한 소설, 연극, 영화, 드라마와의 차별화를 위해 작가는 몇몇 픽션의 인물을 탄생시켰는데, 아무래도 낯익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낯선 인물들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세자 이선의 위기를 지켜내는 강직한 무관 황율과 그의 여인 개울, 난폭한 살인기계 광백과 그가 길러내는 살수들, 광백의 살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질을 지닌 갑수 등이 그들입니다. 일부는 1권에서 운명을 다하기도 하고, 일부는 이후의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맡을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들을 이야기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자연스럽게 끌고 오는 작가의 필력이 돋보입니다.

 

흥미로운 인물 묘사 외에도 역린은 쉽고 빠르게 읽히는 문장이라는 매력이 있는데, 때론 현학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고, 때론 중의적이거나 화두를 닮은 언변으로 정치인들의 내밀한 대화를 표현하지만 결코 난해하거나 지나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당대의 어지러운 정치판과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노회한 정객들의 진면목을 설명하는데 있어 더없이 적절한 문장들입니다.

 

300여 페이지의 분량이지만 한나절도 안 돼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 자체의 매력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적절한 조합 덕분이었습니다. ‘역린이 몇 권까지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과 픽션의 조합을 통해 이전의 작품들과 차별화된 영정조 시대를 다룬다면 오랜만에 의미 있고 재미있는 대하소설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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