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1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18세기 말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일본 작가의 미스터리라는 독특한 이력 뿐 아니라 팔순을 넘은 나이에 제12회 본격미스터리 대상을 받은 작가에 대한 호기심, 또 셜록 홈즈보다 100년을 앞선, 아직 과학이 맹아기를 거치고 있던 시기를 무대로 해부학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출간 전부터 관심을 가졌습니다.
혹시나 일본인 캐릭터가 등장할까 했는데, 100% 영국산 캐릭터로만 이뤄진 작품입니다. 형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개인해부교실을 열어 연구에 몰두해온 대니얼 버턴을 비롯, 에드워드, 나이절 등 그의 제자들이 겪는 의문의 살인사건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또한, 작가로 성공하겠다는 열망으로 시골에서 올라온 17살 청년 네이선이 런던에서 겪는 기구한 고난들이 서브스토리로 진행되다가 대니얼의 제자인 에드워드와 나이절을 만나게 되면서 본 이야기에 합류하게 됩니다.
‘열게 되어~’에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탐정 역할은 강직한 심성의 맹인 치안판사 존 필딩과 그의 여조수 앤이 맡습니다. 대니얼의 해부교실에서 발견된 참혹한 2구의 시신뿐 아니라 연이어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에 대니얼의 주변 사람들은 물론 제자들까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파악하지만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정황들 때문에 진범 찾기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게 됩니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열게 되어~’는 독특한 캐릭터 묘사가 장점인 작품입니다. 소심한 외과의사지만 해부학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하는 소심남 대니얼, 뛰어난 외모와 언변을 갖춘 대니얼의 수제자이자 어딘가 냉소적인 면을 가진 에드워드, 시력을 잃은 대신 청각과 후각이 발달하여 호흡과 말투만으로 진위를 가려내는 치안판사 존, 그의 조카이자 조수면서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열혈 여성 사법관 앤 등 다양하고 특이한 캐릭터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있어 그들의 언행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열게 되어~’가 갖고 있는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은 기대보다는 조금 못 미쳤는데, ‘해부학을 이용하여 사건의 진상과 진범을 찾아내는 스토리’가 아닐까, 라는 기대와 달리 대니얼의 해부교실이 사건의 주요 공간으로만 등장한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물론 임신 6개월의 상태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한 귀족 미혼녀의 사체를 해부한다든가 연구를 위해 도굴꾼이나 유족들로부터 돈을 주고 시신을 거래하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 등 해부학과 관련된 풍부한 묘사들이 책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주고 있지만, 치안판사의 등장 이후 대니얼과 제자들이 조연으로 밀려난 느낌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와 함께 18세기 말 런던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맛깔난 문장들 덕분에 400여 페이지의 분량을 편안하고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이 몰고 온 피폐화된 런던의 뒷골목 풍경이나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불공정하기 짝이 없는 사법 체계, 부를 축적하기 위해 저질러지는 주가 조작 등 현실에 대한 묘사는 세밀하게 이뤄졌고, 간간히 등장하는 영국식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유쾌한 소동극 장면은 참혹한 살인사건의 와중에 잠깐 잠깐씩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제공했습니다.
본격미스터리 대상작에 대한 기대감 치곤 몇 가지 아쉬움이 남은 것이 사실이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작품 자체가 지닌 독특함 때문에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셜록 홈즈가 활약하던 런던의 풍경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그보다 100년을 앞서 살았던 해부교실 멤버들과 치안판사의 활약, 그리고 조금은 더 날것 같은 느낌을 주는 런던의 모습에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