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제국 1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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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치료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충격적인 과거와 만나게 된 안나 에메스, 그리고 프랑스 내 터키 타운에서 벌어진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의 진상을 쫓는 경찰청 팀장 폴 네르토가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폴 네르토는 안나 에메스라는 여자가 연쇄살인사건의 중심에 있음은 물론 사건 배후에 자리 잡은 프랑스 정부와 군, 과학자, 경찰 등의 추악한 비밀까지 알아냅니다. 이후 연쇄살인에 터키의 급진세력 회색늑대가 개입한 사실까지 파악하면서 폴 네르토의 수사는 급물살을 타고, 안나의 행적을 거의 따라잡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 순간 폴 네르토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꽤 오래 전 검은 선을 통해 처음 알게 됐는데, 긴장감, 재미, 적절한 잔혹함 덕분에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여러 작품이 출간된 상태였지만, 두 번째로 그랑제와 만난 것은 미세레레였습니다.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방대한 서사를 다루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장점은 여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후에야 늑대의 제국을 읽게 됐습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분명 뛰어난 이야기꾼입니다. 수많은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자유자재로 지휘할 뿐 아니라 대중성은 물론 작품성까지 곁들여 능숙하게 포장하는 솜씨는 그를 최고의 프랑스 스릴러 작가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이번엔, 잘 나가다가, 정말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하도록 너무 잘 나가다가, 그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거나 엉뚱한 샛길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평범한 스릴러의 결말, 즉 범인 체포와 해피엔딩을 넘어선 새로운 결말에의 도전은 좋았지만, 문제는 후반부의 결정적인 지점부터 이야기가 전혀 다른 길로 빠져버렸고, 그로 인해 애초에 쌓아온 서사들을 모조리 불필요하게, 또 무색하게 만들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느닷없이 등장한 인물들이 엉뚱한 엔딩을 장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나름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주제의식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연쇄살인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인간의 자유정신터키 역사의 비극으로 귀결시킨 덕분에 한껏 달아오른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은 당혹스러운 실망감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폴 네르토의 유년의 트라우마, 형사로서의 이력,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위험천만한 노력들은 전체 분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엔딩에 이르러 돌아보면 결국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불필요한 서설이었고, 폴 네르토를 돕는 결정적인 조연인 퇴직 형사 시페르를 비롯한 몇몇 중요한 캐릭터 역시 비슷한 봉변(?)을 당했습니다.

 

잘못 읽었나 싶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살펴보니 비슷한 의견이 많았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돌의 집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거라고 경고한 독자도 있었는데, 잘 기억은 안 나도 검은 선이나 미세레레에서는 이런 식의 전개를 본 것 같지는 않고, 왜 그랑제가 늑대의 제국에서 이런 결말을 선택했는지는 그저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독특한 캐릭터들, 끔찍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연쇄살인 등 이야기꾼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뛰어난 설정들이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건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조만간 돌의 집회도 읽을 계획인데, ‘검은 선이래로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팬임을 자처해 왔으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두 번씩 할까봐 괜한 걱정부터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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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배심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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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일 없는 삶을 살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다카미 료이치는 누명 사건의 히어로가 돼보지 않겠냐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받습니다. , 존재하지도 않는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뒤 적절한 시기에 결백하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누명을 벗고 경찰과 언론을 망신 주는 것은 물론 체포부터 취조까지 전 과정을 논픽션으로 출간하면 히트를 칠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변호사 모리에는 우연히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더 우연한 인연으로 그 사건의 범인을 변호하게 됩니다. 자신이 서야 될 무대는 논란 속에 부활된 배심재판입니다. DNA를 비롯한 모든 과학적 증거들이 다카미 료이치가 진범이라고 가리키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 모든 것이 계획된 누명 사건이라고만 주장할 뿐입니다. 한편 가까스로 부활한 배심법을 폐지시키려는 정치권과 보수언론들의 공작은 집요하기만 합니다. 모리에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논란의 배심재판에 나섭니다.

 

화려한 말의 성찬과 롤러코스터처럼 반전이 쉴 새 없이 벌어지는 법정공방은 범죄 미스터리와는 색다른 매력과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오래 전 존 그리샴의 법정물에 빠져 지내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일단 법정물이라고 하면 아직도 무턱대고 덤비는 편입니다.

한때 중지됐던 배심원 제도가 정치적 공방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부활하게 됐다는 가상의 설정 아래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배심원 제도가 국민 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긴 하지만 형사 재판에 국한되어 있고, 그것도 피고인이 원하는 경우에만 가능한데다 배심원의 결정이 구속력이 없다는 점에서 명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른 건 다 서양식대로 잘 따라 하면서 법에 관한 한 여전히 일본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배심원 제도의 당위성만 주장하는 단선적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 흥미로웠습니다. 재판의 대상이 된 사건이 워낙 특이하게 설정돼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소재입니다. 또한 재판 과정의 재미는 물론 배심원 제도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까지 등장시켜서 끝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긴장감을 유지했습니다.

 

변호사 모리에의 캐릭터는 비범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작가의 말을 보니 이 작품이 변호사 모리에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가끔 도를 넘는 정확한 추리로 독자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똑똑한 변호사 캐릭터의 미덕까지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미스터리 마니아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통해 새삼 느낀 점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사건해결의 키를 쥔 DNA가 과학수사의 증거로서 갖고 있는 약점이었고, 또 하나는 이 작품의 핵심인 배심원제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DNA는 곧 게임오버를 뜻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 또한 조작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습니다. 곳곳에서 작가의 성실하고 꼼꼼한 자료조사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데 특히 DNA에 관한 부분은 압권이었습니다.

기득권층이 배심원제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미개한 일반인들이 신성한 재판관의 영역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열세 번째 배심원은 왜 배심원제가 필요하며, 지금까지 당연히 여겨온 똑똑한 소수의 재판관에 의한 판결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적절한 사례까지 들어가며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두 가지 이야기를 꾸려나가다 보니 배심원 재판이 시작되는 중반부까지는 사건 묘사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 지점까지는 많은 독자들이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건의 특이함이 조금은 도를 지나쳐 작위적인 느낌을 강하게 줬고,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에서는 왠지 끼워 맞추기 식의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름 개성 있는 법정물의 미덕을 갖춘 작품이었고, 가능하다면 변호사 모리에 시리즈를 계속 만나보고 싶은 기대감도 들었습니다. 역시 잘 만들어진 법정물은 독자의 아드레날린 활성화에는 최적의 장르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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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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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식물학자인 할아버지 슈지가 살해되자 리노는 생전의 그가 공개하면 큰 소동이 벌어질 것이라던 정체불명의 노란 꽃을 블로그에 공개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가모 요스케라는 경찰청 사람이 찾아와 블로그를 폐쇄하고 노란 꽃의 사진을 없애버릴 것을 강요합니다.

아내와 별거 중인 형사 하야세는 슈지의 죽음을 수사하던 중 살인사건과는 무관한 생활안전국의 가모 요스케가 은밀히 사건 관계자들을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그가 의문의 노란 꽃에 주목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단독 조사에 나섭니다.

아버지의 3주기를 맞아 집에 돌아온 가모 소타는 형 요스케를 찾아온 리노와 만납니다. 리노를 돕다가 중학생 시절의 첫사랑 이바 다카미의 흔적을 찾은 소타는 본의 아니게 노란 꽃의 비밀과 슈지의 죽음의 진상을 캐는데 동참하게 되어 웬만한 형사나 탐정을 뛰어넘는 수완을 발휘하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 - 전혀 몰랐던 충격적인 가족의 비밀은 물론 에도 시절부터 시작된 노란 꽃으로 인한 비극의 전말과 마주치게 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가운데 이야기의 사이즈나 서사의 구조만 놓고 보면 꽤 크고 방대한 쪽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에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노란 꽃 몽환화의 비밀을 비롯하여 살인사건의 수사는 물론 붕괴된 가족의 화해,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담은 성장기 등 각각 장편 한 편의 소재로도 충분한 다양한 담론들을 한꺼번에 버무려놓았습니다. 서로 연관성 없어 보이는 캐릭터와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힌 채 진행되다가 후반부에 가서 모든 비밀과 진실이 드러나는 구조라 소개할 수 있는 줄거리는 대략적인 설정을 요약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단순한 잡초나 야생초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은 환각작용을 가진 식물을 통칭하는 몽환화는 에도 시대부터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고, 이후 메이지 시대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황폐화시키거나 심지어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특히 4(작품 속에는 3대라고 나오지만 엄연히 따지면 4대가 됩니다)에 걸쳐 몽환화와 악연을 맺어온 가모 집안의 히스토리는 후반부에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충격적인 엔딩을 이끌어냅니다. 그저 돌연변이처럼 독특한 색깔을 지녔을 뿐, 평범한 식물에 불과한 꽃 하나에게 이만한 역사성과 사건을 일으키는 파괴력을 부여함으로써 히가시노 게이고는 생소한 소재가 주는 신선함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미스터리의 기본 서사인 진범 찾기가 가모 집안의 히스토리와 병행되는데, 리노가 할아버지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란 꽃의 진실에 집착한다면, 소타는 형 요스케가 왜 신분까지 숨긴 채 노란 꽃의 뒤를 캐는 건지와 함께 어린 시절 헤어졌던 첫사랑 이바 다카미의 흔적을 쫓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여건도 능력도 턱없이 부족한 아마추어임에도 불구하고, 두 콤비는 짚어내야 할 사실들을 적시에 짚어내면서 정체에 빠진 경찰의 수사를 압도합니다.

 

복잡한 사건과 인물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스피디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독자들이 한 번도 길을 잃거나 헤매지 않도록 이야기를 끌고 나갑니다. 또한 소타, 리노, 하야세 등 세 사람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하는 구성을 통해 다양한 시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해주고, 적절한 생략과 비약을 효과적으로 구사합니다. 이런 이야기꾼으로서의 뛰어난 활약 덕분에 몽환화는 엔터테인먼트라는 기준에서 보면 별 다섯 개도 부족할 만큼 탁월한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무척 주관적인 기준이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무엇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별 하나 정도는 빼야 되지 않을까, 라는 것이 제 결론이었습니다.

 

우선, 캐릭터 설정에 관한 아쉬움이 남았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건만 보인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각각의 인물에게 기구하다 싶을 정도로 이런저런 사연들을 입혀놓았지만, 쉽게 이입하거나 응원하고 싶은 인물을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원자력을 전공했으나 후쿠시마 지진으로 인해 진로에 회의를 품은 소타, 올림픽까지 바라봤으나 지금은 물에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리노, 불륜으로 인한 가정의 붕괴 속에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고 있는 하야세 등 나름대로 힘든 현실과 잿빛 장래를 작가로부터 골고루 분배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연은 사건과는 동떨어진 채 겉돌고 있어서 굳이 그런 포지션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결국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노란 꽃과 사건은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정작 딱히 기억에 남거나 감동이든 증오든 어떤 종류의 감정을 남긴 인물은 없었습니다.

 

이야기 전체적인 면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몽환화는 굳이 비유하자면, 정교하게 설계된 밑그림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간 작품입니다. 앞서 얘기한대로 복잡한 사건과 캐릭터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다 보니 작가가 사전에 이야기 전체를 잘 짜놓지 않으면 스스로 길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느 작품보다도 훨씬 더 공을 들여 정교한 밑그림을 만들었고, 그 정교함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완벽한 정교함이 감흥을 떨어뜨린 가장 큰 원인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정교함을 유지하기 위해 조금은 무리한 설정들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4대에 걸친 가모 가문과 노란 꽃의 악연 스토리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눈으로는 활자들을 쫓아가고 있지만, 왠지 머릿속에서는 자꾸 거부감이 드는 느낌이랄까요? 작가는 여러 문장을 통해 거듭 그 개연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했지만,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총평하자면 몽환화는 최고의 기술이 만들어낸 흠 잡을 데 없는 고가의 상품이긴 하지만, 제가 기대했던 투박하면서도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진짜 명품의 향기는 맡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최근 2~3년 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계속 비슷한 인상을 받아왔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초기작에서 만끽했던 투박함과 진정성이 그리워지곤 했습니다. 그의 스타일이 변했을 수도 있고, 저의 감각이 달라진 탓일 수도 있겠지만, 가끔씩이라도 제 기대감이 충족된다면 최근 기억으로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었는데 -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신뢰는 언제까지나 계속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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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leven 일레븐
쓰하라 야스미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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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1편의 수록작을 다 읽고도, 딱히 어떤 장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특이한 단편집입니다. 쓰하라 야스미에 대한 소개글을 보니 워낙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던 작가인데, 이 단편집 역시 기담이나 SF에서 평범한 수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가 망라되어 있는 종합선물세트에 가깝습니다. 몇 편만 골라 간단하게 줄거리를 소개하면...

 

오색 배

팔 없는 청각장애인 가즈오, 무릎 관절이 거꾸로 달린 기요코, 분리된 샴쌍둥이 사쿠라, 다리가 없는 아버지 유키노스케 등은 배에 거주하며, 기형의 몸으로 흥행을 벌여 살아갑니다. 어느 날, 소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구단이 나타나면서 이들의 삶에 격변이 시작됩니다.

 

미소 짓는 얼굴,

어느 날인가부터 안구에 낀 이물질마냥 시야 한쪽에 등장했던 형체가 점차 오래 전 헤어진 기누코의 미소 짓는 얼굴로 변해갑니다. 두 사람은 조각가와 모델로 만나 연인이 됐으나 끔직한 사건으로 결별한 바 있습니다. 안구 속의 기누코의 얼굴은 점점 커지고, 급기야 의 얼굴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호기심으로 인해 우물에 빠져죽은 할머니 때문에 어머니는 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모든 것을 어릴 적부터 원천봉쇄 해왔습니다. 어느 날, 친구 미와의 유혹으로 소설가가 자살한 까마귀 저택으로의 가출을 감행하는데, 그곳에서 소설가의 망령인 을 목격합니다.

 

테레민 양

음악을 통한 신경증 치료의 일환으로 마이크로칩 미진코를 뇌에 삽입한 마리코는 어느 날 유리오와 마주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리아를 부릅니다. 유리오가 내뿜은 특유의 파동에 마리코 뇌 속의 칩 미진코가 반응한 것입니다. 그것을 인연으로 유리오와 결혼하게 되지만 마리코의 삶은 평탄하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외에도 기리노 나쓰오 특집에 게재됐던 엽편 소설 기리노’, 남편과 결별 후 15년 간 대형견 크라켄만 4마리를 키워온 여인의 이야기 크라켄’, 퇴폐미가 물씬 풍기는 불륜 미스터리 ‘YY와 그의 주검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오색배미소 짓는 얼굴, 였는데, 특히 미소 짓는 얼굴, 는 영상물로 만들면 오싹한 기담공포물이 될 만한 작품입니다.

 

단편집은 장르를 불문하고 비교적 빨리 읽히는 형식이지만, ‘일레븐은 꼬박 이틀 반이 걸릴 정도로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읽으면서 번역자가 꽤 고생했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는데, 원작 자체가 어려운 문장들이었겠다 싶은 작품도 꽤 있었고, 캐릭터나 설정이 너무 특이해서 한 번 읽어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작품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책갈피를 끼워놓았다가 반나절 쯤 후에 다시 읽으려고 하면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 결국 첫 페이지로 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권영주의 매끄러운 번역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단편집을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기담이나 SF, 환상물의 경우 상황을 특이하게 설정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레븐은 상황보다 캐릭터 설정에 주력한 작품이 많습니다.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인 설정 없이 어디에나 존재할 법한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를 내세움으로써 명백한 기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감을 상승시키고 공포감이나 긴장감도 더욱 밀도 있게 만들었습니다.

 

기담집은 마니아 정서가 강한 편이라 대중성을 얻기 쉽지 않은데 일레븐의 경우 11편의 다양한 작품이 실려 있어서 취향에 따라 깊이 꽂힐만한 작품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일부 인상적인 작품들 때문에 쓰하라 야스미에 대해 호기심이 일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전작들을 전부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아닙니다. 비교적 대중적이라는 평을 들은 작품들부터 하나씩 읽으면서 쓰하라 야스미를 머스트 리드목록에 올려도 될지 찬찬히 결정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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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두 남자가 수상하다
손선영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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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장수정은 옆방에 사는 수상한 두 남자, 손선영-오현리와 벽간 소음을 통해 인연을 맺습니다. 악연으로 시작됐지만 고양이 연쇄살해 사건을 계기로 운명적인(!) 인연으로 발전합니다. 함께 살묘범(殺猫犯)을 뒤쫓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독극물의 존재를 발견하고, 일련의 고양이 연쇄살해가 살인을 위한 예행연습일 수도 있다는 추론에 다다른 세 사람은 용인경찰서 장하나 경사의 도움을 받기에 이릅니다. 이어 우려했던 독극물 살인이 실제로 벌어진 현장에서 송파경찰서 백용준 형사와 맞닥뜨립니다. 우여곡절 끝에 민간인 신분으로 수사에 참여하게 된 일행은 사건의 이면에 숨어있던 충격적인 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한편, 잠실희망병원에는 17살 아들 지유에게 이식할 심장을 기다리는 정상우-양영자 부부와 어머니에게 이식할 심장을 기다리는 박성호 등 두 가족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꺼져가는 가족의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였고, 불법적인 장기매매는 물론 이식의 기회를 잡을 수만 있다면 타인에게 직접 위해를 가할 생각까지 품고 있습니다.

 

블랙 코미디 풍의 제목과 표지 때문에 유쾌 발랄하고 가벼운 이야기로 예단할 독자도 있겠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수준 높은 한국 장르물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이웃집~’은 그 가운데 가장 독특한 색깔을 지닌 작품이었습니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코지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유쾌함과 긴장감을 쉴 새 없이 교차시킨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건만 놓고 보면 한없이 무겁고 음울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식을 기다리는 두 가족의 초조함과 극단적인 선택, 그리고 고양이 연쇄살해와 독극물 살인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대목은 당연히 그런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28살의 좌충우돌 일러스트레이터 장수정과 10년 연상의 배 나온 추리소설가 손선영, 아버지 연배인 오현리의 에피소드는 로맨틱한 소동극을 연상시킬 정도로 럭비공처럼 통통 튀어다닙니다. 특히 사랑싸움 하는 연인 같기도 하고,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파트너 같기도 한 장수정과 손선영의 위태위태하면서도 쿵짝이 잘 맞는 콤비플레이를 읽다 보면 시리즈물의 주인공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오현리, 장하나, 백용준 등 두 사람을 지원사격하는 조연들 역시 뚜렷한 개성과 적절한 분량을 통해 이야기를 탄탄히 떠받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몰입감과 긴장감을 살리는 결정적 역할은 사건의 몫입니다. 작가는 2011년을 뒤흔든 구제역 사건과 음지에서 자행되는 불법적인 장기매매라는, 어찌 보면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두 테마를 한 이야기 속에 잘 엮어 넣었습니다. 특히 범행도구인 치명적인 독극물을 두 테마의 연결끈으로 설정한 덕분에 사실감은 물론 지금이라도 유사한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현실적인 공포심도 살려냈습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작품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는 방대한 영역에 걸친 꼼꼼한 자료조사, 또는 풍부한 직간접 경험들의 흔적입니다. 장수정을 당황하게 만드는 손선영-오현리의 현란하고 빈틈없는 말빨은 말할 것도 없고, 사건 관련 데이터, 다양한 캐릭터들의 인구사회학적 묘사를 세세히 읽다 보면 작가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집필에 임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대목도 여럿 있었는데, 가장 큰 건 리얼리티에 관한 것입니다.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 새 민간인 신분인 세 남녀가 경찰 수사에 합류한 상황이 됐는데, 약간 얼렁뚱땅 넘어간 듯한 느낌이랄까, 우리나라 현실을 감안할 때 읽는 내내 목에 가시처럼 걸렸던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손선영과 장수정의 추리과정이 별 어려움 없이 술술 풀려나간 점입니다. 물론 결정적인 조언이 주어지긴 하지만 치명적 독극물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이나 구제역과의 연관성, 그리고 살인범이 노리는 이익을 추리하는 과정은 두 주인공이 별 고생 없이 작가가 안내한 대로만 따라간 느낌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미스터리 독자라면 뭔가 뒤집어지는엔딩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거의 정공법에서 벗어나지 않은, 딱 기대한 만큼의 엔딩을 만났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봉인된 추리 대담에서 작가가 명확한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하나쯤 빵 터지는 게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탓에 적잖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작가가 직업은 물론 이름까지 본인과 같은 주인공을 내세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손선영은 미드 캐슬에서 여형사를 돕는 추리소설가 나단 필리온을 연상시킬 만큼 여러 가지 매력을 발산하는 캐릭터였습니다. 손선영-장수정 콤비를 주인공으로 한 후속작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앞서 언급한 대한민국의 현실만 잘 극복한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시리즈의 탄생도 기대해 볼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미 용인서의 장하나 경사와 송파서의 백용준 형사가 이들의 지원군이 됐으니, 어쩌면 그런 약점은 차기작부터는 염려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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