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배심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별 볼일 없는 삶을 살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다카미 료이치는 누명 사건의 히어로가 돼보지 않겠냐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받습니다. , 존재하지도 않는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뒤 적절한 시기에 결백하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누명을 벗고 경찰과 언론을 망신 주는 것은 물론 체포부터 취조까지 전 과정을 논픽션으로 출간하면 히트를 칠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변호사 모리에는 우연히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더 우연한 인연으로 그 사건의 범인을 변호하게 됩니다. 자신이 서야 될 무대는 논란 속에 부활된 배심재판입니다. DNA를 비롯한 모든 과학적 증거들이 다카미 료이치가 진범이라고 가리키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 모든 것이 계획된 누명 사건이라고만 주장할 뿐입니다. 한편 가까스로 부활한 배심법을 폐지시키려는 정치권과 보수언론들의 공작은 집요하기만 합니다. 모리에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논란의 배심재판에 나섭니다.

 

화려한 말의 성찬과 롤러코스터처럼 반전이 쉴 새 없이 벌어지는 법정공방은 범죄 미스터리와는 색다른 매력과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오래 전 존 그리샴의 법정물에 빠져 지내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일단 법정물이라고 하면 아직도 무턱대고 덤비는 편입니다.

한때 중지됐던 배심원 제도가 정치적 공방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부활하게 됐다는 가상의 설정 아래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배심원 제도가 국민 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긴 하지만 형사 재판에 국한되어 있고, 그것도 피고인이 원하는 경우에만 가능한데다 배심원의 결정이 구속력이 없다는 점에서 명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른 건 다 서양식대로 잘 따라 하면서 법에 관한 한 여전히 일본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배심원 제도의 당위성만 주장하는 단선적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 흥미로웠습니다. 재판의 대상이 된 사건이 워낙 특이하게 설정돼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소재입니다. 또한 재판 과정의 재미는 물론 배심원 제도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까지 등장시켜서 끝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긴장감을 유지했습니다.

 

변호사 모리에의 캐릭터는 비범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작가의 말을 보니 이 작품이 변호사 모리에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가끔 도를 넘는 정확한 추리로 독자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똑똑한 변호사 캐릭터의 미덕까지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미스터리 마니아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통해 새삼 느낀 점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사건해결의 키를 쥔 DNA가 과학수사의 증거로서 갖고 있는 약점이었고, 또 하나는 이 작품의 핵심인 배심원제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DNA는 곧 게임오버를 뜻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 또한 조작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습니다. 곳곳에서 작가의 성실하고 꼼꼼한 자료조사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데 특히 DNA에 관한 부분은 압권이었습니다.

기득권층이 배심원제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미개한 일반인들이 신성한 재판관의 영역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열세 번째 배심원은 왜 배심원제가 필요하며, 지금까지 당연히 여겨온 똑똑한 소수의 재판관에 의한 판결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적절한 사례까지 들어가며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두 가지 이야기를 꾸려나가다 보니 배심원 재판이 시작되는 중반부까지는 사건 묘사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 지점까지는 많은 독자들이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건의 특이함이 조금은 도를 지나쳐 작위적인 느낌을 강하게 줬고,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에서는 왠지 끼워 맞추기 식의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름 개성 있는 법정물의 미덕을 갖춘 작품이었고, 가능하다면 변호사 모리에 시리즈를 계속 만나보고 싶은 기대감도 들었습니다. 역시 잘 만들어진 법정물은 독자의 아드레날린 활성화에는 최적의 장르인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