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제국 1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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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치료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충격적인 과거와 만나게 된 안나 에메스, 그리고 프랑스 내 터키 타운에서 벌어진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의 진상을 쫓는 경찰청 팀장 폴 네르토가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폴 네르토는 안나 에메스라는 여자가 연쇄살인사건의 중심에 있음은 물론 사건 배후에 자리 잡은 프랑스 정부와 군, 과학자, 경찰 등의 추악한 비밀까지 알아냅니다. 이후 연쇄살인에 터키의 급진세력 회색늑대가 개입한 사실까지 파악하면서 폴 네르토의 수사는 급물살을 타고, 안나의 행적을 거의 따라잡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 순간 폴 네르토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꽤 오래 전 검은 선을 통해 처음 알게 됐는데, 긴장감, 재미, 적절한 잔혹함 덕분에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여러 작품이 출간된 상태였지만, 두 번째로 그랑제와 만난 것은 미세레레였습니다.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방대한 서사를 다루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장점은 여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후에야 늑대의 제국을 읽게 됐습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분명 뛰어난 이야기꾼입니다. 수많은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자유자재로 지휘할 뿐 아니라 대중성은 물론 작품성까지 곁들여 능숙하게 포장하는 솜씨는 그를 최고의 프랑스 스릴러 작가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이번엔, 잘 나가다가, 정말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하도록 너무 잘 나가다가, 그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거나 엉뚱한 샛길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평범한 스릴러의 결말, 즉 범인 체포와 해피엔딩을 넘어선 새로운 결말에의 도전은 좋았지만, 문제는 후반부의 결정적인 지점부터 이야기가 전혀 다른 길로 빠져버렸고, 그로 인해 애초에 쌓아온 서사들을 모조리 불필요하게, 또 무색하게 만들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느닷없이 등장한 인물들이 엉뚱한 엔딩을 장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나름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주제의식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연쇄살인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인간의 자유정신터키 역사의 비극으로 귀결시킨 덕분에 한껏 달아오른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은 당혹스러운 실망감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폴 네르토의 유년의 트라우마, 형사로서의 이력,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위험천만한 노력들은 전체 분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엔딩에 이르러 돌아보면 결국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불필요한 서설이었고, 폴 네르토를 돕는 결정적인 조연인 퇴직 형사 시페르를 비롯한 몇몇 중요한 캐릭터 역시 비슷한 봉변(?)을 당했습니다.

 

잘못 읽었나 싶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살펴보니 비슷한 의견이 많았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돌의 집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거라고 경고한 독자도 있었는데, 잘 기억은 안 나도 검은 선이나 미세레레에서는 이런 식의 전개를 본 것 같지는 않고, 왜 그랑제가 늑대의 제국에서 이런 결말을 선택했는지는 그저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독특한 캐릭터들, 끔찍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연쇄살인 등 이야기꾼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뛰어난 설정들이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건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조만간 돌의 집회도 읽을 계획인데, ‘검은 선이래로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팬임을 자처해 왔으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두 번씩 할까봐 괜한 걱정부터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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