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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leven 일레븐
쓰하라 야스미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11편의 수록작을 다 읽고도, 딱히 어떤 장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특이한 단편집입니다. 쓰하라 야스미에 대한 소개글을 보니 워낙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던 작가인데, 이 단편집 역시 기담이나 SF에서 평범한 수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가 망라되어 있는 종합선물세트에 가깝습니다. 몇 편만 골라 간단하게 줄거리를 소개하면...
① 오색 배
팔 없는 청각장애인 가즈오, 무릎 관절이 거꾸로 달린 기요코, 분리된 샴쌍둥이 사쿠라, 다리가 없는 아버지 유키노스케 등은 배에 거주하며, 기형의 몸으로 흥행을 벌여 살아갑니다. 어느 날, 소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구단’이 나타나면서 이들의 삶에 격변이 시작됩니다.
④ 미소 짓는 얼굴, 改
어느 날인가부터 안구에 낀 이물질마냥 시야 한쪽에 등장했던 ‘형체’가 점차 오래 전 헤어진 기누코의 미소 짓는 얼굴로 변해갑니다. 두 사람은 조각가와 모델로 만나 연인이 됐으나 끔직한 사건으로 결별한 바 있습니다. 안구 속의 기누코의 얼굴은 점점 커지고, 급기야 ‘나’의 얼굴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⑦ 손
호기심으로 인해 우물에 빠져죽은 할머니 때문에 어머니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모든 것을 어릴 적부터 원천봉쇄 해왔습니다. 어느 날, 친구 미와의 유혹으로 소설가가 자살한 까마귀 저택으로의 가출을 감행하는데, 그곳에서 소설가의 망령인 ‘손’을 목격합니다.
⑩ 테레민 양
음악을 통한 신경증 치료의 일환으로 마이크로칩 미진코를 뇌에 삽입한 마리코는 어느 날 유리오와 마주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리아’를 부릅니다. 유리오가 내뿜은 특유의 파동에 마리코 뇌 속의 칩 미진코가 반응한 것입니다. 그것을 인연으로 유리오와 결혼하게 되지만 마리코의 삶은 평탄하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외에도 기리노 나쓰오 특집에 게재됐던 엽편 소설 ‘기리노’, 남편과 결별 후 15년 간 대형견 크라켄만 4마리를 키워온 여인의 이야기 ‘크라켄’, 퇴폐미가 물씬 풍기는 불륜 미스터리 ‘YY와 그의 주검’ 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오색배’와 ‘미소 짓는 얼굴, 改’였는데, 특히 ‘미소 짓는 얼굴, 改’는 영상물로 만들면 오싹한 기담공포물이 될 만한 작품입니다.
단편집은 장르를 불문하고 비교적 빨리 읽히는 형식이지만, ‘일레븐’은 꼬박 이틀 반이 걸릴 정도로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읽으면서 ‘번역자가 꽤 고생했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는데, 원작 자체가 어려운 문장들이었겠다 싶은 작품도 꽤 있었고, 캐릭터나 설정이 너무 특이해서 한 번 읽어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작품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책갈피를 끼워놓았다가 반나절 쯤 후에 다시 읽으려고 하면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 결국 첫 페이지로 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권영주의 매끄러운 번역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단편집을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기담이나 SF, 환상물의 경우 상황을 특이하게 설정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레븐’은 상황보다 캐릭터 설정에 주력한 작품이 많습니다.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인 설정 없이 어디에나 존재할 법한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를 내세움으로써 명백한 기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감을 상승시키고 공포감이나 긴장감도 더욱 밀도 있게 만들었습니다.
기담집은 마니아 정서가 강한 편이라 대중성을 얻기 쉽지 않은데 ‘일레븐’의 경우 11편의 다양한 작품이 실려 있어서 취향에 따라 깊이 꽂힐만한 작품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일부 인상적인 작품들 때문에 쓰하라 야스미에 대해 호기심이 일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전작들을 전부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아닙니다. 비교적 대중적이라는 평을 들은 작품들부터 하나씩 읽으면서 쓰하라 야스미를 ‘머스트 리드’ 목록에 올려도 될지 찬찬히 결정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