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슈투더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7
프리드리히 글라우저 지음, 박원영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사건이 일어난 게르첸슈타인은 스위스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입니다. 한 외판원이 숲에서 총에 맞은 채 발견됐고 용의자는 금세 체포됩니다. 용의자는 숱한 전과를 지닌 청년으로 돈 때문에 애인의 아버지를 죽인 혐의를 받습니다. 하지만 슈투더는 사건 자체에 의문을 품고 피살자와 용의자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합니다.

수사를 거듭할수록 슈튜더는 외판원의 죽음이 보험금을 노린 자살이 아닐까 의심하지만, 좁은 공동체 사회의 폐쇄성은 도시에서 온 형사를 무시하거나 비아냥댔고, 외판원의 가족조차 수사에 비협조적인 탓에 슈투더는 곤란한 상황에 빠집니다. 하지만 나이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집요하게 단서들을 찾아가던 슈투더는 결정적인 물증과 진술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갑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에게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옵니다.

 

보기 드문 스위스 작가의, 그것도 1930년대에 출간된 독특한 이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았지만 타고난 반골 기질 때문에 밑바닥 계급으로 좌천된 뒤 일개 형사로서 사소한 사건들을 맡고 있는 슈투더가 주인공입니다. 콧수염을 기른 거구에 싸구려 시가를 즐기고, 적잖은 나이지만 여전히 의욕은 넘치는데다 전화와 급행우편 외엔 딱히 소통의 도구도 없던 1930년대의 형사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입니다.

 

형사 슈투더의 가장 큰 특징은 사건이 벌어진 공간이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폐쇄적인 공동체에 침입한 외부인은 환영받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살인사건처럼 폐쇄성을 더욱 옥죄는 요소가 등장하고, 그것을 수사하기 위해 외부인이 개입한 경우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본문 속의 표현처럼 도시의 살인사건 10건보다 시골의 살인사건 1건이 더 어려운데, 엉겅퀴처럼 엉긴 채 무엇이든 숨기고, 결국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무슨 짓을 저지르던 자신과 상관없으면 모른 체하기 일쑤인 주민들, 진상 따윈 고민하고 싶지 않은 예심판사, 시골마을의 하잘 것 없는 헤게모니를 놓고 다투는 유지들, 그리고 노래와 연설과 뉴스를 통해 주민들을 지배하는 스피커등 사건이 발생한 게르첸슈타인은 형사 슈투더에게는 최악의 공간일 뿐입니다. 하지만 슈투더는 집요하리만치 탐문에 탐문을 이어가고, 얼렁뚱땅 수사를 접으려는 수많은 방해꾼들을 극복해나갑니다.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전도유망한 젊은 형사보다는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반골 기질의 노형사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립니다. 귀차니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예심판사를 엿 먹여 수사를 재개하고, 보이지 않는 손처럼 마을을 지배하는 유지들을 어렵지 않게 코너까지 몰아붙입니다. 권위를 내세우기 보다는 적절히 거리를 둔 밀고 당기기 식의 노회한 수사를 벌입니다. 이런 수사 덕분에 슈투더는 속도감은 현저히 떨어지지만 올바른 방향만은 놓치지 않습니다. 스위스에서 모두 다섯 권이 출간됐다는 슈투더 시리즈는 아마 이런 미덕을 기반으로 당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을 한 가지만 꼽자면 돌직구 스타일의 지나친 정직함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라고 할 수 있는데, 연이은 탐문과 단서의 발견, 누군가의 제보에 힘입은 비밀의 폭로 등 전형적인 공식에 입각한 전개 때문에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웠고 반전에 대한 기대감 역시 반감된 게 사실입니다. 사건이든 캐릭터든 구성이든 하나쯤은 특이하거나 뚜렷한 개성이 있어야 주목받을 수 있는 요즘의 장르물 경향으로 볼 때 슈투더의 정직함이나 모범생 같은 캐릭터는 독자들에게 어필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 않나, 라는 생각입니다.

 

독일어권 미스터리 문학의 선구자이며 여러 차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고, 최고의 독일어권 미스터리 작가상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을 보면 프리드리히 글라우저의 슈투더 시리즈가 분명 권위 있고 매력적인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후 그의 시리즈가 출간된다면 관심 있게 지켜보겠지만, 다음에는 첫 편의 정직함을 극복한, 조금은 더 쫄깃쫄깃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손 밀리언셀러 클럽 104
모치즈키 료코 지음, 김우진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모치즈키 료코와 처음으로 만난 대회화전이 지상 최대의 미술 사기극을 다뤘다면, ‘신의 손은 엄청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세상과 사랑으로부터 고립된 채 살아가다가 자신이 탄생시킨 괴물로 인해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던 한 여성 소설가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대회화전이 촘촘하고 사실적인 서사를 통해 진정한 사기극의 진면목을 보여줬다면, ‘신의 손은 조금은 추상적인 테마들, 즉 열정, 원념, 사랑, 그리고 절망 등 복잡하기 그지없는 심리 묘사에 천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재적인 재능과 소설가로서의 열정으로 가득 찼지만 3년 전 실종된 기스기 교코, 그녀의 멘토이자 연인이었던 대형출판사 편집장 미무라, 어느 날 미무라 앞에 나타나 교코의 복제품처럼 행동하는 소설가 지망생 마키, 자신의 환자 마키를 통해 알게 된 교코에게 집착하는 의사 히로세, 순문학 최고의 영예인 신세기문학상을 받았지만 도작(盜作)의 혐의를 받게 된 혼고,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교코-미무라-히로세-혼고가 연루된 특이한 도작 스캔들을 접하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뛰어든 르포라이터 미치코 등 모든 인물들이 3년 전 실종된 교코를 중심으로 엮여있습니다. 중반 이후 드러나는 인물들 간의 진짜 관계까지 소개할 순 없지만 대략의 내용만 정리하면...

 

의사 히로세를 통해 소설가 지망생 마키를 알게 된 편집장 미무라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녀는 3년 전 실종된 교코의 복제품 같았기 때문입니다. 버릇이나 말투까지 비슷한 것은 물론 자신만이 알고 있는 교코의 미발표 소설을 자신이 집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마키에게 놀란 미무라는 결국 교코의 흔적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교코에게 집착하던 의사 히로세가 그 여정에 동참합니다. 미무라는 교코와 마키의 접점을 찾기 위해 애쓰지만 작은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고, 심지어 마키의 방에서 교코의 마지막 원고까지 발견하자 혹시 마키가 교코에게 빙의된 것이 아니냐?”는 히로세의 터무니없는 추정에 솔깃해지기도 합니다.

한편 연쇄 유아납치 사건을 취재하던 중 교코가 얽힌 도작 스캔들의 정보를 접한 르포라이터 미치코는 미무라, 히로세, 마키를 차례로 만나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그로 인해 교코와 관련된 모든 인물들의 비밀과 거짓말이 차례로 드러나면서 교코의 실종에 얽힌 비극적인 사실들도 하나둘씩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실종 진상 밝히기보다는 교코의 글쓰기에 대한 엄청난 집념, 수많은 사랑의 실패,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갔던 그녀의 일상들, 그리고 천천히 내부에서부터 붕괴되다가 끝내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그녀의 삶에 주력합니다. 특히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교코의 원고들은 그녀의 실종을 추적하는 단서들인 동시에 현실과는 절대 화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을 반영하는 극중극 형태를 띠고 있어서 긴장감과 호기심, 안타까움을 배가시킵니다.

 

교코의 삶은 글쓰기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글쓰기는 그녀의 삶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주범이기도 합니다. “소설가란 마음속에 괴물을 한 마리 키우고 있으며, 그 괴물을 키우면서 작가가 되고, 그 괴물에 잡아먹힐 때 자살한다.”라고 그녀 스스로 말한 적도 있고,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편집장 미무라 역시 교코의 작품이 갈수록 기괴해질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여러 사람에게 밝힌 바 있습니다.

10년 전, 상식 이상의 엄청난 양의 원고를 들고 혈혈단신 도쿄를 찾았다가 모든 출판사로부터 거부당한 후 미무라와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던 시절부터 3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시점까지 그녀의 삶은 열망, 원념, 사랑, 배신, 붕괴의 과정을 착실히 밟아왔고, 교코가 남긴 미스터리한 흔적들을 좇던 미무라와 히로세, 미치코 역시 열망에서 붕괴에 이르는 그녀의 민낯들을 하나씩 발견하면서 충격과 회한, 분노와 사죄 등 각자 복잡한 심경을 품게 됩니다. 앞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심리 묘사에 천착한 작품이라 언급한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초반부터 쉽게 읽힐 작품이 아니란 건 눈치 챘지만, 다 읽은 뒤의 첫 느낌은 제 이해력 부족에 대한 한탄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난해해야만 했나?”라는 아쉬움이었습니다. 자살인가, 타살인가? 아니면 실종인가 잠적인가? 실상이 무엇이든 간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교코는 사라졌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막판에 관련자들의 입을 통해 드러나면서 미스터리가 풀리긴 하지만, 평범한 독자 입장에선 여전히 교코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녀의 삶도, 그녀의 글쓰기도, 그녀만의 사랑법도 너무나 기이하고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심리 묘사에 치중한 문장들 때문에 이 작품으로 모치즈키 료코를 처음 접한 독자는 물론 대회화전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 가운데에서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교코의 삶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으려면 가능한 한 끊어 읽지 말고 한 번에 완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넉넉한 여유를 갖고 다시 한 번 재도전해볼 생각이고, 그렇게 읽다보면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또는 이해 못 했던 교코의 삶에 조금은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장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7
나가오카 히로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나가오카 히로키와는 단편집 귀동냥에 이은 두 번째 만남입니다. 그때 써놓은 서평을 한 줄로 요약하면 서늘한 느낌보다는 따뜻한 충격과 감동을 주는 생활 미스터리인데, ‘교장역시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을 전해줬습니다.

보통 경찰소설 하면 파출소나 경찰서를 무대로 이미 적잖은 경력을 쌓은 베테랑이나 이제 막 승천하려는(?) 유망주의 활약을 그린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교장은 제목 그대로 경찰이 되기 위해 첫 걸음을 뗀 경찰학교 학생들이 6개월의 교육 중에 겪는 쓰고, 달고, 맵싸한 경험들을 미스터리와 함께 버무린 단편집입니다.

 

입학과 동시에 순경의 직급을 부여받은 경찰학교 초임과 98기생들은 무시무시한 교관들과 엄격한 규칙 속에서 다양한 훈련과정을 겪으며 준비된 경찰로 착실히 성장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당연히 사고와 트러블이 있기 마련이고, 경찰학교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오해와 착각, 질투와 증오, 비밀과 거짓말, 심지어 폭력과 범죄까지 은밀하게 벌어집니다.

 

수록된 작품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불심검문은 퇴학의 위기에 몰린 두 주인공의 선의와 악의를 다루고 있고, ‘고문에는 두 여학생 사이의 오해와 착각이 빚어낸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그려집니다. ‘개미구멍역시 절친이었으나 규칙에 얽매인 나머지 등을 돌려야했던 두 인물이 등장하고, ‘조달에서는 뿌리칠 수 없는 욕망들이 상충하는 경찰학교 안의 범법행위가 묘사됩니다. ‘이물이 협조성이 결여된, 경찰로서는 자격미달인 지극히 이기적인 인물을 다룬 반면, ‘배수에서는 성적은 우수하지만 현장 경찰로서의 배짱이 부족한 모범생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모든 학교 이야기가 그렇듯 교장에도 특별한 선생님이 등장하는데, 임시 담임으로 학급을 맡게 된 가자마 기미치카 계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백발의 외모에 깐깐하고 원칙주의자 같은 인상을 풍길 뿐만 아니라 잘못된 상황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엄격한 잣대를 통해 심판을 내리지만 그의 매력은 딱딱한 규칙들보다는 경찰이 지녀야 할 진짜 미덕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학생들 사이의 오해와 갈등을 중재하는 것은 물론 경찰학교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며 재능은 있지만 복잡한 사연들로 인해 경찰의 길을 포기하려는 인재들에게 너에게는 이런저런 장점이 있다.”라는 따뜻하고 묵직한 충고를 전하기도 합니다. 무턱대고 죄를 벌하기보다는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고, 직설적인 충고로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 해법을 찾아나가게 합니다. 가자마의 현명한 선택과 가르침은 아직은 어리고 미숙한 초년 경찰들에게 진정한 경찰의 길을 보여줌과 동시에 잊히지 않을 교훈으로 자리 잡습니다.

 

정교하게 잘 짜인 경찰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게는 조금은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학생들이 실습시간에 배우는 내용들은 말 그대로 경찰의 ABC처럼 기초적인 것들이고, 미스터리 역시 독하거나 끝내주는 반전을 담고 있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장은 오히려 그런 점들 때문에 장점과 미덕이 빛나는 작품입니다. 소소하면서도 당연한,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기 쉬운 교훈들을 담담하게 그려냈고, 그를 통해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청춘들을 학교 담장 너머 지켜보는 재미를 주기도 합니다. 싱거울 수 있는 교훈론과 성장담은 미스터리라는 적절한 양념 덕분에 제 맛을 발휘합니다.

 

아무리 초보 예비경찰이라지만 그들 모두가 순수하거나 열정으로 가득하진 않습니다. 등장인물 중에는 언젠가 부패하거나 게으른 경찰이 될 사람도 눈에 보이고, 현장을 지키기보다는 모범적인 자기 관리로 고위직에 오를 사람도, 경찰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모두가 바라는 정의감 넘치는 경찰로 성장할 사람도 눈에 띕니다. 그래선지 작품 속 한 인물은 경찰학교를 자질이 부족한 학생을 걸러내기 위한 에 비유합니다.

재미있는 건 가자마 계장은 경찰에 대한 동경심보다는 불만감이 더 훌륭한 경찰의 자질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누구나 동경하는 졸업생 총대표 역시 무난히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보다는 수라장과 좌절을 겪어본, 그야말로 진흙탕을 밟아본 자가 적격이라고 믿습니다.

 

작가는 이런 다양한 캐릭터 모두에게 골고루 애정과 안쓰러움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데, 이런 세세한 사실감 덕분에 화려하진 않지만 솔직담백한 교장의 미덕이 빛납니다.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가 극찬을 한 이유도, 일본 주요 미스터리 차트에서 상위에 랭크됐던 이유도 독자들에게 이런 미덕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양들의 성야 닷쿠 & 다카치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맥주의 늪에 빠져 흐느적대던 안락탐정 닷쿠와 다카치가 현장탐정으로 변신하여 맹활약하는 모습을 그린 닷쿠&다카치 시리즈’ 3편입니다. ‘어린 양들의 성야는 꼬일대로 꼬인 구성과 사방에 묻힌 지뢰들, 그리고 반복되는 반전들 때문에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작품인데, 덕분에 정교한 논리적 구성과 롤러코스터 식 전개를 맛깔나게 믹스하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특별한 재능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헨미 유스케, 일명 보안 선배는 닷쿠와 다카치에게 내용물을 알 수 없는 포장선물을 건네며 이 선물의 주인을 찾아 전달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것은 1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날, 닷쿠와 다카치와 보안 선배 앞에서 추락사한 가나에가 소지하고 있던 것으로, 그동안 보안 선배가 보관해왔던 것입니다.

선물 주인을 찾기 위해 가나에의 유족, 가나에가 죽기 전 참석했던 파티의 주최자, 가나에의 약혼자와 전 남친 등 관련자들을 만나면서 닷쿠와 다카치는 당시 자살로 결론 났던 가나에의 죽음에 뭔가 숨겨진 사연이 있음을 눈치 챕니다. 특히 다카치는 가나에의 아버지를 만난 후로 갑자기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그녀의 죽음의 동기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닷쿠와 다카치는 가나에가 추락사한 건물의 관리인을 통해 5년 전 규사쿠라는 소년이 가나에와 똑같은 방식으로, 즉 포장선물을 지닌 채 추락사했음을 알게 됩니다. 다카치는 관리인의 진술 속에서 가나에와 규사쿠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공통점은 다카치의 과거와도 맥이 닿아있는 비극적인 사연이라는 점이 밝혀집니다.

 

어린 양들의 성야에서 두드러진 점을 몇 가지 꼽아보면, 이전 작품들에 비해 맥주의 위상이 미미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거의 말석으로 쫓겨났고, 닷쿠와 다카치가 안락탐정에서 현장탐정으로 변신하면서 이야기가 사뭇 무거워졌으며, 두 사람 모두 대학 초년생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본격적인 탐정 캐릭터 플레이를 선보인다는 점입니다.

맥주에 취한 두 사람이 엉뚱한 상상과 가설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갔던 전작들과 달리 맥주는 그때그때 필요한 경우에만 등장하는 소품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만큼 사건에 임하는 닷쿠와 다카치의 자세가 진지해졌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번 작품에서는 다카치가 최전방에 나서서 이야기를 이끄는데, 덕분에 지금껏 감춰졌던 다카치의 아픈 과거가 공개되면서 막판에 밝혀진 미스터리의 진상과 함께 이야기를 꽤 묵직하게 만듭니다.

 

이런 변화들은 한편으론 반가웠지만 다른 한편으론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인 미스터리의 틀을 갖춤으로써 앞으로의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준 점은 반가웠지만, ‘닷쿠&다카치 시리즈의 최대 매력 중 하나인 청춘과 성장, 엉뚱함과 의외성이 사라지고 갑자기 철이 확 든 어른들의 미스터리로 노화한점은 읽는 내내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또한 거의 원탑 주인공처럼 맹활약한 다카치는 동료인 닷쿠와 보안 선배는 물론 독자들조차 어리둥절하게 만들 정도로 몇 수를 내다보는 추리를 여러 차례 선보이는데, 그 도가 지나친 나머지 수십 년 경력의 명탐정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황당하고 엉뚱한 가설에서 출발하여 차츰 진상에 다가가던 풋풋한 아마추어의 모습들이 그리워질 정도였습니다.

 

조금 긴 사족으로 세 가지만 덧붙이자면, 우선 저는 부산영화제에 와서 영화를 기다리며 띄엄띄엄 읽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지만, 이 작품은 반드시 한 호흡에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쉴 새 없이, 심지어 다 끝났다고 생각된 마지막 페이지에서까지 터지는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 반전의 묘미는 한 번에 읽지 않으면 절대 제 맛을 만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출판사에 드리는 말씀으로, 후반부에 등장하는 규사쿠의 어머니 와미가 여러 차례 미와로 오역되곤 했는데, 이 점은 다음 인쇄 때 꼭 수정됐으면 좋겠습니다. 그 외에도 (요즘의 평균보다는 훨씬 적지만) 몇 군데 오타도 함께 수정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가나에와 규사쿠와 다카치의 공통점에 대해 줄거리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굉장히 중요한 스포일러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이나 일부 서평에 무방비하게 노출돼있는 게 사실입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가급적 사전 정보 없이 이 작품과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치광이 예술가의 부활절 살인 - 20세기를 뒤흔든 모델 살인사건과 언론의 히스테리
해럴드 셰터 지음, 이화란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20세기를 뒤흔든 모델 살인사건과 언론의 히스테리라는 부제처럼 이 작품은 1930년대 뉴욕 빅맨플레이스 일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살인사건(특히 미치광이 예술가가 범인인 3중 살인사건을 중심으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자 당시 선정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던 미국의 타블로이드 판 신문들이 사건들을 어떻게 히스테릭하게다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살인사건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피살자들이 알몸으로 발견된 여성들이라는 점, 그리고 불과 몇 년 사이에 양극화가 격해진 뉴욕의 빅맨플레이스에서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타블로이드들은 경쟁적으로 성()과 관련된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피살자들의 문란하거나 퇴폐적인 사생활 찾기에 혈안이 됩니다. 적절한 사진과 에피소드를 구할 수만 있다면 거액도 마다하지 않을뿐더러 정 없으면 애매한 표현들을 동원하여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모범생처럼 진지했던 그녀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자극적인 기사에서 섹시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집 안에 배달원이나 일꾼들이 있을 때도 네글리제를 입고 돌아다니길 좋아했던 빨간 머리 여자가 되었다.” (p57)

 

사건의 명칭을 어떻게 선정적으로 지어야 독자들의 시선을 끌까, 범인에게 어떤 자극적인 별명을 지어줘야 한 부라도 더 팔 수 있을까, 고민하는가 하면 연이어 살인이 벌어진 특정 장소에 대해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려 급급합니다. 그 결과의 산물들이란 살해당한 모델의 미스터리’, ‘부활절 대학살’, ‘모델과 엄마, 섹스광에게 살해되다’, ‘술 취한 남자, 여성을 썰어 죽이다’, ‘망치 폭탄 맞은 아름다운 바이올리니스트등입니다.

더 이상 써먹을 내용이 없으면 그때부턴 아예 소설을 쓰거나 심지어 점성술사의 진술을 인용하여 범인의 외모와 현재 위치까지 과감히 추정합니다. 어제 내보낸 보도 혹은 소설이 오류로 드러나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좀더 치명적이고 선정적인 새 먹이 찾기에 나설 뿐입니다.

 

끔찍한 범인과 무방비 상태의 희생자, 희생자는 되도록 여자면 좋다. 드라마틱한 스토리라인과 대중들이 가진 비밀스럽고도 위험한 욕망에 호소하는 자극적인 행위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p20)

 

이런 경향은 1930년대 뉴욕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터넷 덕분에 오늘날의 매체들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태도는 더 강화됐습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지나치게 독한 보도들을 너무 자주 접한 나머지 웬만큼 센 자극이 아니면 독자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무덤덤해진 정도라고 할까요?

 

타블로이드로 대표되는 히스테릭한 언론 이야기와 함께 작가는 하드보일드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가 미국 범죄사에서 3위로 꼽은 미치광이 예술가 살인사건을 방대한 자료에 기초하여 상세히 정리해놓았습니다. 사건 발생부터 재판 종결까지, 또 수감된 이후 범인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당시 보도된 기사 내용은 물론 수사일지와 관련자 인터뷰 등을 참조하여 거의 백서에 가까운 내용을 담았습니다. 또한 논픽션 작가답게 범인의 모든 것 - 유년기부터의 성장과정,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성돼온 과정, 여성에 대한 시각, 실체를 알 수 없는 정신적 장애 등 - 을 집요할 정도로 조사하여 끔찍한 살인마의 일대기 한 편을 완성시켰습니다.

 

얼마 전 같은 장르에 속하는 비독 소사이어티를 읽었습니다. 영구 미제 사건을 다루는 특별한 엘리트 집단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비독 소사이어티가 픽션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소설의 형식을 좀더 강조했다면, 이 작품은 기록문학과 논픽션의 미덕을 살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좀 딱딱하기도 한데다 기록문학에 낯선 독자들에겐 재미면에서 부족할 수 있겠지만, 범죄 논픽션만의 매력을 맛보고 싶다면 괜찮은 기회가 될 거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