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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왕의 방패 - 제166회 나오키 상 수상작 ㅣ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1
이마무라 쇼고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11월
평점 :
센고쿠시대(戰國時代)의 전란 속에 가족을 잃은 교스케는 석축, 즉 돌쌓기 장인 도비타 겐사이 덕분에 목숨을 건진 뒤 그의 후계자로 성장합니다. 각지의 다이묘들이 큰 성의 성벽 쌓는 일을 의뢰할 만큼 대단했던 겐사이의 명성은 ‘돌의 모습으로 경계를 지켜주는 새신(塞神)’에 빗대어 새왕으로 불릴 정도입니다. 그런 겐사이의 후계자가 된 교스케의 꿈은 ‘어떤 공격도 막아내는 성을 쌓는 것’입니다. 모든 성이 난공불락이 된다면 더 이상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철포 장인인 구니토모 겐쿠로는 포선(砲仙)이 되어 “어떤 방어도 깨뜨리는 총포를 만들어 평화를 이루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센고쿠시대의 막바지, 일본의 패권을 다투는 대전투를 앞두고 교스케와 겐쿠로는 방패와 창의 마지막 대결을 벌입니다.

모순(矛盾)이라는 단어의 어원대로 ‘모든 걸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걸 막아낼 수 있는 방패’는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꺾이든 부서지든 어느 한쪽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성벽을 쌓으려는 새왕 교스케와 그 어떤 성벽도 궤멸시킬 총포를 만들려는 포선 겐쿠로는 하필 전란으로 뒤덮인 16세기 일본의 센고쿠시대에 숙적으로 만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대결을 펼칩니다. 아이러니한 건 교스케와 겐쿠로 모두 승전이나 패권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교스케는 ‘난공불락의 성’을 통해, 겐쿠로는 ‘천하무적의 총포’를 통해 전쟁을 끝장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궁극의 꿈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전으로 비유하자면 전쟁 억지를 위해 한쪽은 ‘완벽한 아이언 돔’을, 한쪽은 ‘막아낼 수 없는 핵폭탄’을 구축하려고 분투한다는 셈입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공존 불가능한 방패와 창의 대결은 어떻게 막을 내릴까요?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전쟁 서사의 주인공은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사들의 몫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벽을 쌓는 새왕’과 ‘총포를 만드는 포선’을 앞세운 ‘새왕의 방패’는 무척이나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의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또한 승패의 결과 혹은 승패가 몰고 온 역사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상반된 수단을 통해 전쟁 없는 평화를 이끌어내려는 두 주인공의 집념과 분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그 어떤 전쟁 서사에서도 맛볼 수 없는 감동적이면서도 농도 짙은 휴머니즘을 선사합니다. “열정 그 자체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라는 아사다 지로의 평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완벽한 성벽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교스케가 선(善)이고, 무자비한 총포로 전쟁을 억지하려는 겐쿠로가 악(惡)인 듯싶지만 이 이야기 속엔 그 어디에도 선과 악의 구분이 없습니다. 일본 패권을 노리는 두 진영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벌이고 교스케와 겐쿠로는 각각의 진영에 속해 맞대결을 펼치지만 ‘새왕의 방패’는 ‘승자독식 패자지옥’ 같은 어설픈 주제 대신 각자의 신념에 따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인물들을 섬세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인물들은 전쟁의 와중에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진심을 다하는 교스케와 겐쿠로를 응원하고 지원합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수많은 목숨들이 하찮게 스러지는 전장에서도 끝까지 희망의 빛을 잃지 않는 두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새왕의 방패’는 일본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겐 꽤 진입장벽이 높은 작품입니다. 복잡한 인명과 지명은 말할 것도 없고 16세기 센고쿠시대의 역사를 전혀 모르면 앞뒤 맥락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일본소설, 특히 시대소설에 익숙한 터라 그리 낯설지 않았고, 마침 1년 전 교토 여행 때 ‘새왕의 방패’의 주 무대인 오미(현재의 시가현) 비와호(琵琶湖) 인근을 둘러본 적이 있어서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지만,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라면 센고쿠시대에 관한 간략한 지식(나무위키 검색 결과만으로도 충분합니다)과 함께 교토와 비와호 인근의 지도를 예습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교스케와 겐쿠로의 삶은 전쟁과 평화를 거듭했던 센고쿠시대의 요동치는 역사와 꼭 닮아있으며, 그들의 터전이자 최종 대결의 무대들 - 시가현, 비와호, 오쓰성 등 - 은 단순히 무대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워낙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 인물이나 줄거리를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세세히 늘어놓자면 A4 몇 장으로도 모자랄 만큼 방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체질적으로 일본 시대소설에 거부감이 있다면 할 수 없지만, 교스케와 겐쿠로가 들려주는 ‘진짜 전쟁과 평화에 관한 이야기’는 그 거부감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처절하고도 감동적이라서 그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분권도 안 한 720여 페이지의 분량이라 저는 이틀에 걸쳐 읽었지만, 이른 아침 첫 페이지를 연다면 늦은 밤이 되기 전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사족 하나
희한한 시리즈 만들기에 진심이신 북스피어의 삼송 김사장님께서 이번엔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라는 긴 제목의 별난 시리즈를 창조하셨습니다. 새 시리즈의 첫 테이프를 ‘새왕의 방패’라는 멋진 작품으로 끊으셨는데, 실은 북스피어 출간작 중에 이 시리즈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작품들이 있어서 제목만이라도 소개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느 포수 이야기’(구마가이 다쓰야), ‘연가’(아사이 마카테), ‘웃는 이에몬’(교고쿠 나쓰히코)은 당장이라도 개정판을 통해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시리즈’에 추가하고 싶은 작품들입니다.
- 사족 둘
‘새왕의 방패’는 굳이 시간적 배경을 좁혀서 말하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흥망성쇠를 겪은 1570~1600년입니다. 그래선지 등장하는 일본 무장 중(두 주인공과 교감 혹은 친분을 나누는 인물 중에도) 적잖은 수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조선 침략을 미화하는 대목도, 침략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인물도 없긴 하지만, 아무래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띌 때면 잠시 기분이 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무시무시한 무력을 지닌 왜적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 땅을 지켜낸 선조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