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식당
하라다 히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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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독신으로 훗카이도에서 살아온 산고는 어느 날 갑자기 도쿄 진보초의 다카시마 헌책방의 주인이 됩니다. 대학 입학과 함께 도쿄로 가서 홀로 살다가 작고한 작은오빠 지로가 자신이 소유했던 헌책방과 3층짜리 건물을 산고에게 남겼기 때문입니다. 도쿄에서의 생활도, 가게 운영도 처음인 산고를 돕는 건 대학원에서 고전을 전공하는 조카손녀 미키키입니다. 오빠 지로에 대한 그리움, 훗카이도에 살 때 연심을 품었던 히가시야마에 대한 미련, 그리고 모든 것이 서툴 뿐인 헌책방 운영 등 산고의 하루하루는 심란하고 위태로울 뿐이지만, 미키키의 도움 덕분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헌책방을 찾아오는 손님들과의 교류를 통해 작지만 소중한 보람을 맛봅니다.

 


하라다 히카의 이름은 인터넷서점의 일본소설을 검색할 때마다 자주 발견하곤 했지만, 그동안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은 건 낮술’, ‘우선 이것부터 먹고’, ‘도서관의 야식난 음식소설입니다.”라고 노골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낸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미스터리가 가미된 음식소설은 즐겨 읽는 편이지만 힐링 서사와 섞인 음식 이야기는 제 취향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게 된 건 오로지 제목에 들어간 헌책이란 단어 때문입니다. 특히 언젠가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은 도쿄 진보초의 헌책방 거리를 무대로 한 이야기라 더욱 구미가 당겼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도쿄 땅에서 오빠 지로에게 물려받은 헌책방을 운영하게 된 할머니 산고, 작은할아버지 지로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데다 스스로 고전을 전공하면서 진보초의 헌책방 거리에 익숙한 덕분에 고모할머니 산고를 돕게 된 대학원생 미키키가 헌책과 음식을 소재로 따뜻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동네가 전부 헌책 식당인 거네요. 거리 전체에 오래된 책들이 넘쳐흐르고, 맛있는 음식도 넘쳐흐르니까요. 참 멋진 동네예요.” (p348)

 

산고와 미키키는 헌책방을 찾은 손님들에게 알맞은 책을 추천하고 그들과 함께 포장해 온 음식을 먹으며, 그들이 헌책방을 찾아오게 된 사연을 듣곤 분에 넘치지 않는 조언을 들려줍니다. 동시에 두 사람은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가지 고민들을 헌책방에서의 하루하루를 통해 조금씩 덜어내거나 정리하기도 합니다. 인생 후반기에 낯선 곳에서 낯선 일을 떠맡게 된 산고가 오빠의 유산인 헌책방의 소중함을 절감하면서도 한 남자를 향한 미련 어린 연심 때문에 수심 깊은 나날들을 보낸다면, 논문을 준비 중인 대학원생이면서도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미래 때문에 고민에 빠진 미키키는 산고 할머니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속내 때문에 매일 같이 전전긍긍할 뿐입니다.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면서도 각자의 진심을 드러내지 못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헌책방을 둘러싼 정감 어린 힐링 서사와 잘 섞여 있어서 자칫 지루한 동어반복이 될 수도 있는 스토리를 입체감 있게 만들어줍니다.

 

워낙 책을 좋아하는데다 막연한 망상이긴 해도 언젠가 작은 서점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던 터라 헌책 식당은 제겐 각별한 재미와 의미를 준 작품입니다. 다만 헌책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건지, 아니면 작가의 전공이 음식이라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식당이란 소재가 끼어든 건 개인적으론 무척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뭐랄까, 헌책과 식당의 조합이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억지스럽게 꾸며진 느낌이랄까요? 제각각의 사연으로 헌책방을 찾은 손님들에게 치유와도 같은 알맞은 책을 추천하거나 때론 논쟁을 벌이며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장면들은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그들에게 포장해 온 음식을 권하고 거기에서 다소 뜬금없는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상황은 다분히 작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어라고는 그저 어설프게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읽어내는 정도가 전부일 뿐이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하루쯤 통으로 진보초 거리를 걸어보고 싶은 로망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제가 좋아하는 일본소설의 원작을 발견한다면 그저 소장하는 게 전부일지라도 한두 권쯤은 사고 말 거라는 욕심도 품고 있습니다. ‘헌책 식당에 소개된 서점과 카페와 식당이 실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진보초 거리를 걷게 된다면 꼭 찾아가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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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모든 것을
시오타 타케시 지음, 이현주 옮김 / 리드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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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가나가와현과 도쿄에 걸쳐 전대미문의 아동 동시 유괴사건이 벌어집니다. 수사력이 분산된 경찰은 혼란에 빠졌고, 유괴범에게 돈 전달을 맡은 가족이 뜻밖의 폭주를 벌이는 바람에 범인이 자취를 감추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다행히 유괴된 소년 중 한 명은 발견됐지만 나머지 한 명인 4살 나이토 료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뒤 7살이 된 료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문제는 지난 3년에 대해 료가 아무 말도 안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당시 2년차 경찰 출입기자였던 몬덴 지로는 자신과 각별했던 사이이자 유괴사건 수사에서 중책을 맡았던 형사 나카자와의 장례식에서 뜻밖의 상황과 마주합니다. 한 주간지에 지금은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화가가 된 료의 사진이 실렸고, 그걸 발견한 나카자와의 후배 형사들이 몬덴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추가 조사를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표지와 제목 모두 평범한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먼, 마치 인문과 철학의 향기가 깃든 묵직한 순문학을 연상시켜서 읽기 전부터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작품입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30년 전의 기이한 유괴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한 노회한 기자의 분투기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의 핵심이자 주인공 몬덴 지로의 목표는 범인의 정체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라기보다는 유괴됐던 소년 나이토 료가 과연 3년 동안 무슨 일을 겪었던 건지, 왜 료는 그 시간에 대해 입을 다물었던 건지,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잠적한 채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화가로 성장하게 된 사연은 무엇인지 등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몬덴의 조사는 유괴사건의 진상과 범인 찾기로 시작되지만, 그의 손에 들어오는 정보들이 하나같이 놀라운 우연과 적잖은 위화감으로 포장돼있다는 걸 깨닫자 몬덴은 료가 감췄던 3년의 공백 속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사연이 숨어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기자와 형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몬덴의 지난한 여정은 범죄 미스터리 못잖게 저널리즘 미스터리의 진수를 맛보여줍니다. 평생 기자로 살아왔지만 만족감보다는 자괴감이 더 깊게 남은 54세의 몬덴이 결국 자네는 왜 신문기자를 하는 건가?”라는 나카자와 형사의 질문을 가슴에 품은 채 마지막 현장 취재라는 각오로 진심을 다해 분투하는 모습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저널리즘 휴먼 소설 클라이머즈 하이’(요코야마 히데오)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진정성 있게 다가왔습니다. 전국을 떠돌며 희미한 단서들의 고리를 찾아내고 관련자들의 진술을 이끌어내며 한걸음씩 목표에 다가가는 모습은 기자로서도, 형사로서도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진상을 알아낸 그가 “‘살아 있다는 묵직함, 그리고 살아왔다는 대단함을쓰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며 저는 인간을 쓰겠습니다.”라고 일성을 내뱉을 때의 감동은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진한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한편 이 작품은 미술, 특히 사실화(寫實畫)를 중요한 소재이자 소품으로 다루는데, 방대한 자료조사의 흔적이 역력한데다 그림 하나하나에 대한 시오타 타케시의 깊고 은은한 문장들까지 더해져서 “(사진처럼) 비슷하다는 차원을 넘어 혼의 일부를 빨아들여 캔버스에 증식시킨 듯한사실화의 진수를 마치 눈으로 직접 보는 듯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사실화는 단순히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꾸미기 위한 설정이 아니라 미스터리 자체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서 읽는 내내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55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툼한 분량 속엔 표지와 제목에 걸맞게 묵직하고 비범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그저 미스터리로만 분류해서는 안 되는, 즉 애틋한 휴먼드라마와 운명적인 비극과 미술 이야기가 혼재된 아주 특별한 작품이라고 할까요? 읽기 전엔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존재의 모든 것을이라는 제목이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 희미하게나마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아마도 그 특별함이 독자인 제게 제대로 소구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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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왕의 방패 - 제166회 나오키 상 수상작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1
이마무라 쇼고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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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시대(戰國時代)의 전란 속에 가족을 잃은 교스케는 석축, 즉 돌쌓기 장인 도비타 겐사이 덕분에 목숨을 건진 뒤 그의 후계자로 성장합니다. 각지의 다이묘들이 큰 성의 성벽 쌓는 일을 의뢰할 만큼 대단했던 겐사이의 명성은 돌의 모습으로 경계를 지켜주는 새신(塞神)’에 빗대어 새왕으로 불릴 정도입니다. 그런 겐사이의 후계자가 된 교스케의 꿈은 어떤 공격도 막아내는 성을 쌓는 것입니다. 모든 성이 난공불락이 된다면 더 이상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철포 장인인 구니토모 겐쿠로는 포선(砲仙)이 되어 어떤 방어도 깨뜨리는 총포를 만들어 평화를 이루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센고쿠시대의 막바지, 일본의 패권을 다투는 대전투를 앞두고 교스케와 겐쿠로는 방패와 창의 마지막 대결을 벌입니다.

 


모순(矛盾)이라는 단어의 어원대로 모든 걸 뚫을 수 있는 창모든 걸 막아낼 수 있는 방패는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꺾이든 부서지든 어느 한쪽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성벽을 쌓으려는 새왕 교스케와 그 어떤 성벽도 궤멸시킬 총포를 만들려는 포선 겐쿠로는 하필 전란으로 뒤덮인 16세기 일본의 센고쿠시대에 숙적으로 만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대결을 펼칩니다. 아이러니한 건 교스케와 겐쿠로 모두 승전이나 패권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교스케는 난공불락의 성을 통해, 겐쿠로는 천하무적의 총포를 통해 전쟁을 끝장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궁극의 꿈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전으로 비유하자면 전쟁 억지를 위해 한쪽은 완벽한 아이언 돔, 한쪽은 막아낼 수 없는 핵폭탄을 구축하려고 분투한다는 셈입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공존 불가능한 방패와 창의 대결은 어떻게 막을 내릴까요?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전쟁 서사의 주인공은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사들의 몫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벽을 쌓는 새왕총포를 만드는 포선을 앞세운 새왕의 방패는 무척이나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의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또한 승패의 결과 혹은 승패가 몰고 온 역사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상반된 수단을 통해 전쟁 없는 평화를 이끌어내려는 두 주인공의 집념과 분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그 어떤 전쟁 서사에서도 맛볼 수 없는 감동적이면서도 농도 짙은 휴머니즘을 선사합니다. “열정 그 자체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라는 아사다 지로의 평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완벽한 성벽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교스케가 선()이고, 무자비한 총포로 전쟁을 억지하려는 겐쿠로가 악()인 듯싶지만 이 이야기 속엔 그 어디에도 선과 악의 구분이 없습니다. 일본 패권을 노리는 두 진영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벌이고 교스케와 겐쿠로는 각각의 진영에 속해 맞대결을 펼치지만 새왕의 방패승자독식 패자지옥같은 어설픈 주제 대신 각자의 신념에 따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인물들을 섬세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인물들은 전쟁의 와중에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진심을 다하는 교스케와 겐쿠로를 응원하고 지원합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수많은 목숨들이 하찮게 스러지는 전장에서도 끝까지 희망의 빛을 잃지 않는 두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새왕의 방패는 일본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겐 꽤 진입장벽이 높은 작품입니다. 복잡한 인명과 지명은 말할 것도 없고 16세기 센고쿠시대의 역사를 전혀 모르면 앞뒤 맥락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일본소설, 특히 시대소설에 익숙한 터라 그리 낯설지 않았고, 마침 1년 전 교토 여행 때 새왕의 방패의 주 무대인 오미(현재의 시가현) 비와호(琵琶湖) 인근을 둘러본 적이 있어서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지만,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라면 센고쿠시대에 관한 간략한 지식(나무위키 검색 결과만으로도 충분합니다)과 함께 교토와 비와호 인근의 지도를 예습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교스케와 겐쿠로의 삶은 전쟁과 평화를 거듭했던 센고쿠시대의 요동치는 역사와 꼭 닮아있으며, 그들의 터전이자 최종 대결의 무대들 - 시가현, 비와호, 오쓰성 등 - 은 단순히 무대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워낙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 인물이나 줄거리를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세세히 늘어놓자면 A4 몇 장으로도 모자랄 만큼 방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체질적으로 일본 시대소설에 거부감이 있다면 할 수 없지만, 교스케와 겐쿠로가 들려주는 진짜 전쟁과 평화에 관한 이야기는 그 거부감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처절하고도 감동적이라서 그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분권도 안 한 720여 페이지의 분량이라 저는 이틀에 걸쳐 읽었지만, 이른 아침 첫 페이지를 연다면 늦은 밤이 되기 전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사족 하나

희한한 시리즈 만들기에 진심이신 북스피어의 삼송 김사장님께서 이번엔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라는 긴 제목의 별난 시리즈를 창조하셨습니다. 새 시리즈의 첫 테이프를 새왕의 방패라는 멋진 작품으로 끊으셨는데, 실은 북스피어 출간작 중에 이 시리즈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작품들이 있어서 제목만이라도 소개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느 포수 이야기’(구마가이 다쓰야), ‘연가’(아사이 마카테), ‘웃는 이에몬’(교고쿠 나쓰히코)은 당장이라도 개정판을 통해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시리즈에 추가하고 싶은 작품들입니다.

 

- 사족 둘

새왕의 방패는 굳이 시간적 배경을 좁혀서 말하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흥망성쇠를 겪은 1570~1600년입니다. 그래선지 등장하는 일본 무장 중(두 주인공과 교감 혹은 친분을 나누는 인물 중에도) 적잖은 수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조선 침략을 미화하는 대목도, 침략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인물도 없긴 하지만, 아무래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띌 때면 잠시 기분이 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무시무시한 무력을 지닌 왜적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 땅을 지켜낸 선조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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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웨딩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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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저토스키는 3년 간 소식을 끊고 살던 딸 매기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선 석 달 후에 결혼한다고 통보하자 반가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큰 충격에 빠집니다. 프랭크를 더욱 놀라게 한 건 매기의 결혼 상대가 그녀가 재직 중인 재벌그룹 회장의 아들 에이든이란 사실, 그리고 그에게서 풍기는 다분히 불편하고 비밀스런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딸 매기와의 일그러진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프랭크는 그녀의 선택을 믿고 존중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결혼식 직전, 프랭크는 예비사위 에이든이 돈 태거트라는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을 우편으로 받곤 다시금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더구나 결혼식이 열릴 호화별장 인근에서 만난 한 남자가 에이든이 내 조카 돈 태거트를 살해했다!”고 주장하자 프랭크의 머릿속은 이내 공포에 잠식됩니다.

 


블라인드 웨딩2024년에 출간된 장르물 가운데 개인적인 베스트 목록에 올린 히든 픽처스의 작가 제이슨 르쿨락의 신작입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 스릴러이자 정교한 미스터리 서사까지 결합된 히든 픽처스에 홀딱 반한 나머지 그의 신작 소식이 너무 반갑기만 했는데, 이번에는 뜻밖에도(?) 지극히 현실적인 무대에서 벌어지는 가족 스릴러에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가미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는 결혼식이 열리는 재벌가의 호화별장입니다. 3일에 걸쳐 연회와 결혼식이 벌어지는 가운데 예비사위 에이든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한 프랭크는 홀로 별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에이든의 뒤를 밟는가 하면, 돈 태거트라는 여자의 가족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보는 매기의 거센 반발만 불러일으킬 뿐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런 와중에 호화별장에서 참혹한 사건이 벌어지고 프랭크는 이 결혼의 배후에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온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확신합니다.

 

언뜻 줄거리만 보면 악당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눈먼 결혼을 강행하려는 딸을 구하고 악당을 응징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제이슨 르쿨락은 그런 평범한 스토리 대신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강렬한 설정을 통해 지금껏 접하지 못한 독특한 가족 스릴러를 선보입니다. 결혼식에 함께 참석한 프랭크의 누나 태미는 매기를 구하려고 분투하는 프랭크를 향해 이건 영화 테이큰이 아니고, 너는 리암 니슨이 아니야.”라고 일갈하는데, 다른 맥락에서 나온 대사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역설적인 대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프랭크의 진짜 미션은 뭘까요? 프랭크는 매기의 눈먼 결혼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매기가 감추는 진실은 과연 뭘까요? 중반부를 조금 지나 드러나는 끔찍한 진실 앞에서 독자들은 아마 할 말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형적인 가족 스릴러를 이런 식으로 비틀 수도 있구나, 라는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혼식을 앞둔 호화별장에서 연이어 죽음이 벌어지고, 에이든을 비롯한 재벌가의 비밀과 매기의 진실이 야금야금 밝혀지는가 하면 프랭크에겐 여러 차례의 위기와 반전이 닥치는 등 마지막까지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다소 단선적인 스토리가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모르는 작가의 작품이었다면 별 5개는 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인물이든 사건이든 서사든 여러 면에서 히든 픽처스와 비교하다 보니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으로 제이슨 르쿨락의 스릴러에 호감을 갖게 된 독자라면 꼭 히든 픽처스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 스릴러에 거부감을 가진 독자라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제이슨 르쿨락은 여전히 제 관심목록 상단에 남겨둘 만한 매력적인 작가입니다. 이 작품의 원작 자체가 2024년에 출간됐으니 1년 만에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라는 건 과욕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는 일만은 없기를 사심 가득 담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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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마리오네트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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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토막살인마라는 별명의 연쇄살인범에게 약혼자를 잃고 패닉과 우울증에 빠져 휴직했던 응급의학과 의사 아키호는 복귀 후에도 좀처럼 악몽과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상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 온 미소년 료스케를 극적으로 살려낸 아키호는 형사로부터 그가 한밤중의 토막살인마라는 말을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또 다른 토막살인을 저지른 뒤 도주하다가 큰 사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주치의를 자처한 아키호는 약혼자를 살해한 료스케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자신은 진범이 쳐놓은 덫에 걸린 것이며 경찰은 허위수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나타나자 아키호는 혼란에 빠지고, 이내 직접 진실을 찾아내기로 결심합니다.


 

현직 의사인 치넨 미키토는 메디컬 미스터리뿐 아니라 유리탑의 살인같은 본격 미스터리를 집필할 정도로 다양한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밤중의 마리오네트는 응급의학과 의사 아키호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메디컬 서사는 아주 약간의 비중에 불과할 뿐이고 진짜 몸통은 서스펜스와 반전이 몰아치는 정통 미스터리입니다.

약혼자를 살해하고 토막 낸 한밤중의 토막살인마료스케에게 복수하려던 아키호가 점차 그의 무고함을 믿게 되면서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평범한 미스터리라면 과연 누가 진범일까?”에 주목하며 페이지를 넘기게 되겠지만, ‘한밤중의 마리오네트는 심리 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독특한 설정 때문에 서스펜스의 향기까지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료스케가 한밤중의 토막살인마가 확실하다는 경찰, 자신은 진범의 덫에 걸린 무고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료스케, 료스케가 범인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 의사의 신분으로 진실 찾기에 나선 아키호 등 서로 다른 주장과 생각을 지닌 인물들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탓에 독자는 누구의 주장을 믿어야 할지, 주인공 아키호가 어느 길로 가야 맞는 건지 혼선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남녀를 불문하고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료스케의 완벽한 미모는 아키호를 더욱 큰 혼란에 빠뜨려서 서스펜스의 불온한 농도를 더욱 진하게 만듭니다. 경찰로부터 료스케는 사람을 조종하는 달인이란 말을 들었지만 아키호는 진실과 무관하게 자꾸만 료스케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곤 놀람과 자책을 거듭합니다.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으려 하지만 손에 들어오는 단서는 대부분 료스케의 무죄를 입증한 것들뿐이고, 그때마다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면서 조금씩 다가서는 료스케를 좀처럼 거부하지 못합니다. 독자 역시 아키호에게 제발 정신 좀 차려!”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료스케의 무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상황에서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예측할 수 없어서 조마조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료스케와의 협력 속에 진실을 찾는 아키호의 여정은 크고 작은 위기에 직면하며 아슬아슬하게 전개됩니다. ‘한밤중의 토막살인마에게 살해당한 자들의 공통점을 조사하고 거짓 신분으로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는가 하면, 동시에 료스케의 알리바이 입증을 위해 갖은 위험을 무릅쓰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 넘어선 안 될 선까지 넘은 아키호는 자신과 료스케가 지닌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기에 이르지만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재난을 초래하고 맙니다.

 

사실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대다수의 독자는 진범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넨 미키토의 작품들 대부분이 그렇듯 마지막 페이지까지 절대 마음을 놓아선 안 됩니다. 20여 페이지에 이르는 에필로그는 기대 이상의 충격과 반전을 선사하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치넨 미키토의 작품 가운데 이런 식의 엔딩과 여운을 남긴 경우는 거의 없어서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조금은 얼얼한 기분입니다.

 

신작 소식이 들리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장바구니에 담는 작가 중 한 명이 치넨 미키토지만, 이번엔 두 주인공의 관계에 대한 위화감 때문에 읽는 내내 고개를 갸웃한 게 사실이고,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 위화감이 명쾌하게 사라지지 않은 탓에 별 0.5개를 뺐습니다. 하지만, ‘한밤중의 마리오네트는 제가 기대했던 치넨 미키토만의 매력적인 미스터리를 거의 99% 충족시켜준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작품이 꽤 많은데, 2025년에도 그의 신작과 만날 수 있기를 한껏 고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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