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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마리오네트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12월
평점 :
‘한밤중의 토막살인마’라는 별명의 연쇄살인범에게 약혼자를 잃고 패닉과 우울증에 빠져 휴직했던 응급의학과 의사 아키호는 복귀 후에도 좀처럼 악몽과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상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 온 미소년 료스케를 극적으로 살려낸 아키호는 형사로부터 그가 ‘한밤중의 토막살인마’라는 말을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또 다른 토막살인을 저지른 뒤 도주하다가 큰 사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주치의를 자처한 아키호는 약혼자를 살해한 료스케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자신은 진범이 쳐놓은 덫에 걸린 것이며 경찰은 허위수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나타나자 아키호는 혼란에 빠지고, 이내 직접 진실을 찾아내기로 결심합니다.

현직 의사인 치넨 미키토는 메디컬 미스터리뿐 아니라 ‘유리탑의 살인’ 같은 본격 미스터리를 집필할 정도로 다양한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밤중의 마리오네트’는 응급의학과 의사 아키호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메디컬 서사는 아주 약간의 비중에 불과할 뿐이고 진짜 몸통은 서스펜스와 반전이 몰아치는 정통 미스터리입니다.
약혼자를 살해하고 토막 낸 ‘한밤중의 토막살인마’ 료스케에게 복수하려던 아키호가 점차 그의 무고함을 믿게 되면서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평범한 미스터리라면 “과연 누가 진범일까?”에 주목하며 페이지를 넘기게 되겠지만, ‘한밤중의 마리오네트’는 심리 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독특한 설정 때문에 서스펜스의 향기까지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료스케가 ‘한밤중의 토막살인마’가 확실하다는 경찰, 자신은 진범의 덫에 걸린 무고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료스케, 료스케가 범인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 의사의 신분으로 진실 찾기에 나선 아키호 등 서로 다른 주장과 생각을 지닌 인물들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탓에 독자는 누구의 주장을 믿어야 할지, 주인공 아키호가 어느 길로 가야 맞는 건지 혼선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남녀를 불문하고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료스케의 완벽한 미모는 아키호를 더욱 큰 혼란에 빠뜨려서 서스펜스의 불온한 농도를 더욱 진하게 만듭니다. 경찰로부터 “료스케는 사람을 조종하는 달인”이란 말을 들었지만 아키호는 진실과 무관하게 자꾸만 료스케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곤 놀람과 자책을 거듭합니다.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으려 하지만 손에 들어오는 단서는 대부분 료스케의 무죄를 입증한 것들뿐이고, 그때마다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면서 조금씩 다가서는 료스케를 좀처럼 거부하지 못합니다. 독자 역시 아키호에게 “제발 정신 좀 차려!”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료스케의 무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상황에서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예측할 수 없어서 조마조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료스케와의 협력 속에 진실을 찾는 아키호의 여정은 크고 작은 위기에 직면하며 아슬아슬하게 전개됩니다. ‘한밤중의 토막살인마’에게 살해당한 자들의 공통점을 조사하고 거짓 신분으로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는가 하면, 동시에 료스케의 알리바이 입증을 위해 갖은 위험을 무릅쓰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 넘어선 안 될 선까지 넘은 아키호는 자신과 료스케가 지닌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기에 이르지만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재난을 초래하고 맙니다.
사실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대다수의 독자는 진범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넨 미키토의 작품들 대부분이 그렇듯 마지막 페이지까지 절대 마음을 놓아선 안 됩니다. 20여 페이지에 이르는 에필로그는 기대 이상의 충격과 반전을 선사하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치넨 미키토의 작품 가운데 이런 식의 엔딩과 여운을 남긴 경우는 거의 없어서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조금은 얼얼한 기분입니다.
신작 소식이 들리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장바구니에 담는 작가 중 한 명이 치넨 미키토지만, 이번엔 ‘두 주인공의 관계’에 대한 위화감 때문에 읽는 내내 고개를 갸웃한 게 사실이고,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 위화감이 명쾌하게 사라지지 않은 탓에 별 0.5개를 뺐습니다. 하지만, ‘한밤중의 마리오네트’는 제가 기대했던 치넨 미키토만의 매력적인 미스터리를 거의 99% 충족시켜준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작품이 꽤 많은데, 2025년에도 그의 신작과 만날 수 있기를 한껏 고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