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컬렉터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1 링컨 라임 시리즈 1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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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경 과학수사국장이던 3년 반 전, 현장 감식 도중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링컨 라임은 더는 삶을 이어나갈 의욕을 잃고 안락사를 계획 중입니다. 그런데 절친한 동료였던 강력반 형사 론 셀리토가 찾아와 기이한 납치살인사건의 수사에 협력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미량 증거물을 통해 수많은 사건을 해결해 온 라임의 천부적인 능력이 필요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안락사를 결심했던 라임은 고민 끝에 론의 요청을 수락하곤 현장을 처음 발견한 순찰경관 아멜리아 색스를 호출합니다. 생활안전과로의 전출을 앞두고 마지막 순찰에 나섰다가 생매장당한 남자의 시신을 발견한 색스는 엉겁결에 라임의 손과 발이 되어 끔찍한 연쇄살인마 본 컬렉터를 추적하는 위험천만한 여정에 나서게 됩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1997년에 출간된 본 컬렉터를 시작으로 2023년까지(미국 기준) 무려 16편을 이어온 범죄스릴러의 대작입니다. 한국에선 2020년에 소개된 12스틸 키스’(미국 2016)를 끝으로 더는 신간 소식이 없어서 내내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그래선지 새해가 되자마자 그동안 들쑥날쑥 읽어온 링컨 라임 시리즈를 한번쯤 순서대로 정주행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본 컬렉터41살의 링컨 라임과 31살의 아멜리아 색스가 그야말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첫 인연을 맺는 작품이라 더욱 각별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그 이상의 감흥과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시리즈물의 첫 편 대부분은 주인공()의 캐릭터와 과거사를 소개하느라 이야기가 좀 처지거나 사건이 조연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은데, ‘본 컬렉터는 라임과 색스 두 주인공의 운명적인 첫 만남과 충돌은 물론 뼈를 숭배하는 연쇄살인마본 컬렉터가 저지르는 전대미문의 사건까지 한데 잘 버무려내서 540여 페이지를 읽는 내내 단 한 순간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두 주인공은 각자 인생에서 중대한 변곡점을 앞두고 뜻밖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전신마비 상태의 라임이 안락사 실행을 앞두고 다시금 사건 현장에 나서게 됐다면, 모델로 일하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찰경관이 됐지만 더는 견디지 못하고 생활안전과로 자리를 옮기려던 색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현장 감식 일을 떠맡게 된 것입니다.

증인 따위는 절대 믿지 않으며 오직 현장에 남겨진 흙, 먼지, 섬유, 냄새 등 미량의 증거물만 신뢰하는 라임과,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상대하는 경찰이 되고 싶어 늦은 나이에 경찰이 된 색스는 물과 불처럼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한 사람은 사지가 마비된 채 머리와 입으로만 수사를 진행하고, 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현장을 뛰어다녀야만 합니다. 그야말로 대충돌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라임과 색스는 서로에게 독설을 날리고 상처를 주면서도 뉴욕의 오래된 지하를 무대로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는 본 컬렉터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상대의 진심과 속내와 과거를 알아가기 시작하고, 끝내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파트너로 성장합니다.

 

사건 역시 시리즈 첫 편답게 독자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데, “한니발 렉터가 인육이라면, 본 컬렉터는 뼈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라임과 색스가 상대하는 본 컬렉터는 참혹한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물론 희생자의 뼈에 집착하는 역대급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75년 전에 출간된 범죄서적을 탐독하는가 하면, 뉴욕의 역사와 지하구조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피살자 주변에 다음 살인의 단서를 남겨놓아 라임과 색스를 극도의 초조함 속으로 몰아가곤 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밝혀지는 그의 정체와 범행 동기와 궁극적인 목적은 왜 제프리 디버가 트릭과 반전의 대가로 불리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1997년에 출간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법과학 수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데다 제한된 시간 안에 다음 피해자를 구해내야 한다는 긴박감 넘치는 설정 덕분에 사건 자체만으로도 끝내주는 미덕을 갖춘 범죄스릴러지만, 역시 두 주인공 라임과 색스의 강렬한 첫 만남이야말로 본 컬렉터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사지마비를 비관하며 안락사를 결심한 라임이 자기도 모르게 색스로 인해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 점이라든지 “(현장에는) 범인의 주소와 전화번호, 인상착의, 그자의 소망과 열망이 담겨 있어.”라는 라임의 지시에 반발하던 색스가 어느 새 라임이 시키기도 전에 뭘 해야 할지 판단하고 결정할 줄 알게 되는 모습은 앞으로의 콤비 플레이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편인 코핀 댄서에서 두 주인공이 펼칠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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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주장법
허진희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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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천재 시인 백오교와 경성 제일 미남 미카엘이 잇달아 자살로 보이는 죽음을 맞이하자 각 신문이 1면에 대서특필로 보도하는 등 경성 전체가 들썩입니다. 그런 와중에 백오교의 탐미적이고도 염세적인 시에 몰입했던 청춘들이 연이어 자살하자 사태는 점차 심각한 지경에 이릅니다. 한편 미카엘의 죽음에 희귀 독초가 이용된 사실이 알려진 직후 독초 박사 구희비는 한 일본 유력 가문의 의뢰를 받고 미카엘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빈민촌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구희비의 비서로 채용된 17세 소녀 차돌은 그녀를 보좌하면서 나름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지만 연이어 사건 관련자들이 살해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출간한 작품 대부분이 청소년물인 허진희의 작품을 읽어보기로 한 건 악의 주장법에 제가 좋아하는 코드들이 한데 버무려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국권이 피탈된 후 한반도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이름 모를 독초들과 그것을 이용한 살인, 그리고 미스터리 해결사를 맡은 29세의 독초 박사와 17세의 팔척장신소녀 콤비 등 매력적인 설정들이 단번에 눈길을 끌었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는 사건 이면에 자리 한 시대적 비극성 때문에 서사의 두께가 자연스레 두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사건과 시대적 비극성이 매끄럽게 배합되지 않으면 자칫 겉멋을 위한 설정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기도 한데, 그런 면에서 악의 주장법은 시대적 비극성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 위에 미스터리 서사를 차곡차곡 잘 쌓아올린 이야기라 마지막까지 조금의 거부감이나 위화감 없이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망국의 한을 뿜어내듯 이름 모를 독초들이 곳곳에서 피어났다는 설정, 또 그 독초가 살인에 이용된 점, 그리고 세상을 뜬 부모의 뒤를 이어 독초 박사가 된 29세의 구비희가 진실 찾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점도 흥미로운데, 미스터리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엄청난 반전을 품고 있지도 않지만 독초라는 소재의 매력을 다양한 레시피를 통해 잘 활용한 작가의 필력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초를 연구하던 부모는 정체불명의 독초에 중독돼 사망했고 자신은 태아 시절 어머니가 연구를 위해 섭취한 독초로 인해 평생 이름 모를 통증에 시달려왔으면서도 결국 독초 박사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물론 독초를 이용한 살인사건 조사까지 맡게 된 구희비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연인과 친척들이 일제의 폭압과 만행으로 인해 지독한 불행 혹은 큰 위기에 빠진 것으로 설정돼있기도 해서,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이 안긴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살아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희비의 비극성을 다소 순화시켜주는 건 팔척장신소녀 차돌입니다. 웬만한 사내 두세 명에 견줄만한 완력에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성실함을 지닌 차돌이 구희비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접하며 성장하는 과정은 무겁고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숨 쉴 틈을 내주는 장면들입니다. 구희비가 빈민촌의 소녀 차돌을 비서로 들인 사연은 후반부에야 공개되는데, 아마 앞부분에서 설명됐더라면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그 사연이 마지막에 공개되는 순간 독자는 소소한 감동과 함께 울컥함을 맛보게 됩니다. 동시에 언젠가 차돌에게 해사한 시대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품게 됩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식민지 시대의 억압과 탄압으로 잉태된 악의 연쇄를 파헤치는...”, “악의 본질을 추격해가는...”이라는 대목이 있지만, 사실 개인적으론 그 정도까지의 서사를 담은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시대적 비극성이 살인사건 미스터리에 잘 녹아든 건 사실이지만 작가가 그만큼 거창하고 심오한 주제를 목표로 삼았다고 보이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목이 악의 주장법이고, 이 작품 속의 은 그 본질을 탐구해볼 만한 지독한 사이코패스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자체보다는 인물과 시대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를 일부러 찾아갔다는 작가가 “(그들의) 넋에 가닿는 울림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라고 밝힌 걸 보곤, 언젠가는 악의 주장법보다 좀더 묵직하고 진하면서도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습니다. 관심목록에 올려놓은 또 한 명의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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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정표 - 제76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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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학습 장애, 지적 장애, 정서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대상으로 개별지도 학원을 운영하던 도가와가 살해당한 지 2. 10대 시절 도가와의 학원에 다녔던 35살 아쿠쓰 겐이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사건 당일 기묘한 행적을 보인 뒤 종적을 감춘 탓에 경찰은 무기력한 수사만 이어가는 중입니다. 반골 기질이 강해 상부의 미움을 받는 베테랑 형사 쇼타로와 그의 파트너인 신참 오야가 이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아쿠쓰 겐 추적에 나선 가운데, 정체불명의 남자를 지하실에 숨겨주고 있는 여자 도요코, 뛰어난 농구 실력을 지녔지만 아버지에게서 자해 공갈을 강요당하는 초등학생 하루, 그런 하루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요스케 등 여러 인물들이 하나둘씩 접점을 이루어가며 비극의 중심으로 모여듭니다.

 


괴이 현상을 그린 연작 괴담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학교폭력과 복수의 문제를 다룬 죄의 여백’, 일상에 깃든 농도 짙은 공포를 소재로 한 단편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등 그동안 한국에 출간된 아시자와 요의 작품은 매번 기발한 상상력과 독특한 장르물 서사가 절묘하게 결합돼서 한국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왔습니다. ‘작가생활 10주년 기념작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밤의 이정표는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결의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어서 다시 한 번 그녀의 무한하고 다채로운 상상력을 실감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모두가 관심을 잃은 살인사건에 투입된 반골기질 베테랑 형사, 아버지로부터 자해공갈을 강요당하는 초등학생과 그를 걱정하며 지켜보는 친구, 그리고 정체불명의 남자를 숨겨주고 있는 30대 여성 등 평범한 미스터리라면 하나의 끈으로 묶기 힘든 인물들이 등장하고, 도무지 접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관련 없어 보이는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그래선지 2년 전 종적을 감춘 용의자 아쿠쓰가 진짜 범인인가, 라는 궁금증보다는 과연 이 인물들이 어떤 우연과 운명으로 인해 한 무대 위에서 만나게 될지, 또 그 만남이 각자의 삶을 어떻게 변주시킬지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2년 전 사건이 수시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궁금증을 자극하곤 하는데, 만일 용의자 아쿠쓰가 진범이 맞다면 10대 시절 아버지처럼 여겼던 학원장 도가와를 살해한 동기는 무엇인지, 그 동기란 게 지난 18년 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건지 아니면 사건 당일 느닷없이 폭탄처럼 터진 건지, 또 범행 후 경찰서 앞에 나타났다가 돌연 종적을 감춘 이유는 무엇인지 등이 그것입니다.

 

이미 밤이라 길은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 것처럼 어두웠지. 앞을 달리는 선생님은 길을 꺾을 때마다 손을 들어서 신호를 보내줬어. 그걸 보면서 생각했지. 아아, 저 손이 가리키는 쪽으로 가면 틀림없구나.” (p401)

 

이 작품엔 제목대로 이정표와 관련된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삶이 그려집니다. 누군가를 자신의 이정표로 삼아 힘든 삶을 버텨온 사람, 유일한 이정표라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당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 뒤늦게 찾은 이정표 같은 사람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 집착하는 사람, 그리고 상대의 이정표가 되고 싶으면서 동시에 그가 나의 이정표가 돼주기를 바라는 사람 등 믿음과 기대, 배신과 증오에 얽힌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살인사건 미스터리 속에 걸쭉하게 녹아들어있습니다. 그래선지 한두 명의 메인 주인공이 끌고 간다기보다 여러 인물이 우연과 운명으로 얽힌 끝에 비극적인 접점을 향해 폭주하는 집단주인공 서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흥미로운 건 막판 반전과 함께 이야기의 흐름이 급격하게 사회파 미스터리로 전환되는 점입니다. 이 반전은 초대형 스포일러라 절대 밝힐 수 없지만,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자 동시에 아쉬움의 이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어떤 사회파 미스터리에서도 다룬 적 없는 충격적인 이슈라서 독자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분명하지만, 왠지 지금껏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범인이라는, 어떻게 보면 미스터리 규칙에 반하는 설정처럼 읽힌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작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단서와 힌트를 줘왔고 그를 통해 개연성도 충분히 확보해왔습니다. “생각해보니...”라며 작가가 깔아놓은 밑밥에 동조하는 것도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반전 자체는 매력적이었지만, 그걸 풀어내는 방식은 역시 제겐 다소 아쉽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작가생활 10주년 기념작76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은 미스터리 자체보다 아시자와 요가 그리고자 했던 이정표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이정표와 관련된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삶이 주된 서사이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근거인 막판 반전이 제1조연, 살인사건이 제2조연이라고 할까요?

밤의 이정표는 그녀의 작품을 거의 모두 읽은 제겐 낯익고 자연스럽게 읽혔지만, 혹시 이 작품으로 처음 아시자와 요를 만나서 그녀의 뜻밖의(?) 미스터리가 다소 낯설게 여겨진 독자라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딱 두 편만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 두 작품이라면 아시자와 요의 진가를 만끽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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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청소부 마담 B
상드린 데통브 지음, 김희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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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지하세계에서 마담 B로 불리는 39살의 블랑슈 바르자크는 경력 15년의 베테랑 범죄현장 청소부입니다. 은밀한 의뢰를 받고 살인현장에서 시신은 물론 혈흔 하나 남기지 않는 것이 그녀의 임무입니다. 지금까지 92건의 완벽한 청소를 이뤄냈지만 93번째 의뢰는 그녀의 삶을 통째로 망가뜨립니다. 청소 도중 20년 전 자살한 어머니의 유품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청소부 멘토이자 양아버지인 아드리앙과 자신밖에 모르는 그 유품이 왜 살인현장에 있던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진 블랑슈에게 더욱 큰 충격을 가한 건 누군가 명백히 자신과 아드리앙을 향해 살의를 드러냈다는 점, 그리고 그 와중에 아드리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점입니다.


 

프랑스 소설답게 범죄스릴러와 심리스릴러가 교묘하게 얽힌 독특한 작품입니다. 영미권 또는 일본의 장르물이었다면 꽤 명쾌하고 스피디한 전개가 이뤄졌을 소재지만, 작가는 프랑스 소설 특유의 정중동 서사 또는 인물의 심리를 집요하게 묘사하는 스타일을 통해 다소 집중력을 요구하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요약하자면, 범죄청소부인 블랑슈와 그녀의 양아버지인 아드리앙이 복잡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복수극에 휘말렸다가 끝내 진상을 밝혀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묻혀있던 과거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큰 고통과 비극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프랑스 소설답게 만드는 중요한 설정 중 하나는 블랑슈의 어머니가 20년 전 극도의 정신착란 증세를 겪다가 권총으로 자살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블랑슈의 삶 자체를 지배해온 무겁고 고통스런 과거이자 그녀 역시 모계유전의 영향으로 보이는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는 탓에 어찌 보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비극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블랑슈에게 범죄현장에서 발견된 어머니의 유품은 적잖은 정신적 타격을 입힌 것은 물론, 자신을 향한 정체불명의 공격이 어쩌면 20년 전 자살한 어머니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심을 갖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블랑슈는 현재의 위기와 과거의 트라우마를 동시에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블랑슈와 아드리앙을 향한 첫 공격은 마치 유령에 의해 자행되는 듯한 인상까지 풍겨서 모녀 2대에 걸친 정신착란 설정과 함께 이 작품의 초반부를 서스펜스 호러스릴러 풍으로 읽히게 만듭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극히 현실적인 사건으로 탈바꿈하면서 진범 찾기 미스터리 서사가 펼쳐지고, 블랑슈의 범죄청소부로서의 과거는 물론 20년 전 어머니의 자살까지 소환되며 이야기는 더더욱 복잡미묘한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상드린 데통브의 문장은 어렵거나 난해하진 않지만 블랑슈의 요동치는 심리를 현미경 들여다보듯 묘사하는 대목들이 많아서 이야기의 복잡미묘한 양상과 함께 독자에게 더욱 섬세하고 집중력 있는 책읽기를 요구합니다.

 

이야기는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블랑슈의 고통과 비극을 극대화합니다. 20년 전 어머니의 자살에 얽힌 사연, 자신과 아드리앙을 공격한 범인의 정체와 의도, 뒤늦게 아드리앙이 털어놓은 믿을 수 없는 과거사들, 그리고 이번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자들의 악의와 탐욕 등 무엇 하나 제정신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팩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블랑슈의 불안정한 정신을 무자비하게 뒤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녀는 청소부로서,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딸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의 중요한 설정들은 모두 과거에서 비롯됩니다. 블랑슈의 진실 찾기 여정은 현재보다 과거 속에서 헤매는 대목이 많습니다. 띠지 카피 역시 지워야 했던 것은 증거가 아니라 내 과거였다!”라는 문구를 강조하는데, 안 그래도 프랑스 소설이라면 일단 경계하는 독자에겐 다소 위협적인(?) 인상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금 천천히, 조금 더 집중해서 읽다 보면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특별한 프랑스 스릴러의 참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일부 중요한 대목에서 설명이 명쾌하지 않았던 점, 복선과 단서들이 남김없이 회수되긴 했지만 얼마간의 찜찜함을 남긴 점, 그리고 너무 범죄가 너무 복잡하게 설계된 탓에 한눈에 들어오지 않은 점 때문에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줬지만, 취향이 맞는 독자라면 색다른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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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속 아이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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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재벌가의 상속녀 오리아나가 프랑스 남부 휴양지의 요트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사망합니다. 수사에 나선 니스 경찰청 강력반은 현장에서 아무런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고, 결국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1년 뒤, 오리아나의 남편이자 유명 재즈피아니스트인 아드리앙의 저택에 범행 흉기가 보관 중이라는 익명의 제보가 들어오고, 감식 결과 흉기에 말라붙은 혈흔과 머리카락의 주인공이 오리아나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수사팀장 쥐스틴은 아드리앙을 취조하지만 철저한 부인과 함구에 전혀 진척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제3의 인물, 즉 아드리앙의 숨겨진 연인으로 추정되는 아델이란 여자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까지 고작 다섯 편밖에 읽지 못한 터라 함부로 단정할 순 없지만 유독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욤 뮈소는 제겐 늘 반반 정도의 만족감을 준 작가입니다. 프랑스 작가답지 않게 쉽고 편하게 읽히는데다 예기치 못한 반전과 긴장감을 품은 장르물 서사가 장점이라면, 무게감이 다소 부족해 보이고 간혹 이해하기 힘든 전개와 결말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점이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미로 속 아이는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확실한미스터리 스릴러라서 나름 기대를 갖고 읽었는데, 역시 반쯤은 만족했고 반쯤은 아쉬움이 남은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니스 경찰청 강력반의 쥐스틴 팀장이 사건 발생 1년 만에 유력한 용의자로 감치된 오리아나의 남편 아드리앙을 취조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입니다. 사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경찰은 아드리앙을 의심했지만 여러 가지 정황 상 그를 체포할 근거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가 뜬금없는 익명의 제보 덕분에 결정적 단서를 손에 넣게 된 셈인데, 그래선지 쥐스틴의 취조는 다소 무리하고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재미있는 건 취조가 진행될수록 쥐스틴의 마음속엔 아드리앙에 대한 상반된 심정, 즉 유죄가 분명해 보이지만 왠지 그럴 리 없어 보인다는, 본인도 납득 안 되는 모순이 자라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드리앙의 숨겨진 연인 아델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쥐스틴의 추리는 그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전개되는데, 특히 사건 발생 18개월 전, 재벌가 상속녀인 오리아나가 가난한 호텔 메이드 아델에게 접근하여 터무니없는 제안 - “내 남편의 연인이 되어줘.” - 을 한 뒤 벌어지는 기이한 상황들 때문에 독자는 두 여자의 관계가 살인사건과 어떻게 접목될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미스터리 못잖게 큰 분량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주조연을 막론하고 가족의 문제를 겪고 있는 인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젊은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긴 뒤 우울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40대 중반의 쥐스틴 팀장, 어린 시절 끔찍한 사고를 겪었지만 끝내 주목받는 상속녀로 성장했으며 결혼 후 남편 아드리앙과 크고 작은 트러블을 겪긴 했어도 아이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던 오리아나, 평생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장밋빛 미래가 현실로 다가오자 일그러진 욕망에 사로잡히는 아델, 청소년기에 접어든 뒤 인생을 망쳐버린 아들 때문에 자괴감에 사로잡힌 형사 등 미스터리 자체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꽤 비중 있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한 발 떨어져서 큰 그림을 보면 인물과 사건 모두 가족이라는, 가장 가깝고도 먼 관계를 기반으로 설정됐음을 알 수 있어서 굳이 많은 분량과 비중을 들여 비하인드 스토리를 설명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습니다.

 

미로 속 아이는 단 몇 글자만으로 초대형 스포일러를 유발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몇 글자에 대해 독자들 사이에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릴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라는 실망감이 먼저 든 게 사실이지만, 기욤 뮈소는 나름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설정을 투입함으로써 식상한 결말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그만의 특별한 엔딩을 이끌어냈습니다. “마지막 한 줄을 다 읽고 나야 모든 의혹이 해소된다.”라는 소개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저처럼 ?”라는 실망감이 들더라도 마지막 장까지 차분하게 읽다 보면 그만의 특별한 엔딩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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