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청소부 마담 B
상드린 데통브 지음, 김희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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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지하세계에서 마담 B로 불리는 39살의 블랑슈 바르자크는 경력 15년의 베테랑 범죄현장 청소부입니다. 은밀한 의뢰를 받고 살인현장에서 시신은 물론 혈흔 하나 남기지 않는 것이 그녀의 임무입니다. 지금까지 92건의 완벽한 청소를 이뤄냈지만 93번째 의뢰는 그녀의 삶을 통째로 망가뜨립니다. 청소 도중 20년 전 자살한 어머니의 유품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청소부 멘토이자 양아버지인 아드리앙과 자신밖에 모르는 그 유품이 왜 살인현장에 있던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진 블랑슈에게 더욱 큰 충격을 가한 건 누군가 명백히 자신과 아드리앙을 향해 살의를 드러냈다는 점, 그리고 그 와중에 아드리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점입니다.


 

프랑스 소설답게 범죄스릴러와 심리스릴러가 교묘하게 얽힌 독특한 작품입니다. 영미권 또는 일본의 장르물이었다면 꽤 명쾌하고 스피디한 전개가 이뤄졌을 소재지만, 작가는 프랑스 소설 특유의 정중동 서사 또는 인물의 심리를 집요하게 묘사하는 스타일을 통해 다소 집중력을 요구하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요약하자면, 범죄청소부인 블랑슈와 그녀의 양아버지인 아드리앙이 복잡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복수극에 휘말렸다가 끝내 진상을 밝혀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묻혀있던 과거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큰 고통과 비극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프랑스 소설답게 만드는 중요한 설정 중 하나는 블랑슈의 어머니가 20년 전 극도의 정신착란 증세를 겪다가 권총으로 자살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블랑슈의 삶 자체를 지배해온 무겁고 고통스런 과거이자 그녀 역시 모계유전의 영향으로 보이는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는 탓에 어찌 보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비극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블랑슈에게 범죄현장에서 발견된 어머니의 유품은 적잖은 정신적 타격을 입힌 것은 물론, 자신을 향한 정체불명의 공격이 어쩌면 20년 전 자살한 어머니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심을 갖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블랑슈는 현재의 위기와 과거의 트라우마를 동시에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블랑슈와 아드리앙을 향한 첫 공격은 마치 유령에 의해 자행되는 듯한 인상까지 풍겨서 모녀 2대에 걸친 정신착란 설정과 함께 이 작품의 초반부를 서스펜스 호러스릴러 풍으로 읽히게 만듭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극히 현실적인 사건으로 탈바꿈하면서 진범 찾기 미스터리 서사가 펼쳐지고, 블랑슈의 범죄청소부로서의 과거는 물론 20년 전 어머니의 자살까지 소환되며 이야기는 더더욱 복잡미묘한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상드린 데통브의 문장은 어렵거나 난해하진 않지만 블랑슈의 요동치는 심리를 현미경 들여다보듯 묘사하는 대목들이 많아서 이야기의 복잡미묘한 양상과 함께 독자에게 더욱 섬세하고 집중력 있는 책읽기를 요구합니다.

 

이야기는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블랑슈의 고통과 비극을 극대화합니다. 20년 전 어머니의 자살에 얽힌 사연, 자신과 아드리앙을 공격한 범인의 정체와 의도, 뒤늦게 아드리앙이 털어놓은 믿을 수 없는 과거사들, 그리고 이번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자들의 악의와 탐욕 등 무엇 하나 제정신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팩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블랑슈의 불안정한 정신을 무자비하게 뒤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녀는 청소부로서,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딸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의 중요한 설정들은 모두 과거에서 비롯됩니다. 블랑슈의 진실 찾기 여정은 현재보다 과거 속에서 헤매는 대목이 많습니다. 띠지 카피 역시 지워야 했던 것은 증거가 아니라 내 과거였다!”라는 문구를 강조하는데, 안 그래도 프랑스 소설이라면 일단 경계하는 독자에겐 다소 위협적인(?) 인상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금 천천히, 조금 더 집중해서 읽다 보면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특별한 프랑스 스릴러의 참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일부 중요한 대목에서 설명이 명쾌하지 않았던 점, 복선과 단서들이 남김없이 회수되긴 했지만 얼마간의 찜찜함을 남긴 점, 그리고 너무 범죄가 너무 복잡하게 설계된 탓에 한눈에 들어오지 않은 점 때문에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줬지만, 취향이 맞는 독자라면 색다른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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