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이정표 - 제76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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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학습 장애, 지적 장애, 정서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대상으로 개별지도 학원을 운영하던 도가와가 살해당한 지 2. 10대 시절 도가와의 학원에 다녔던 35살 아쿠쓰 겐이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사건 당일 기묘한 행적을 보인 뒤 종적을 감춘 탓에 경찰은 무기력한 수사만 이어가는 중입니다. 반골 기질이 강해 상부의 미움을 받는 베테랑 형사 쇼타로와 그의 파트너인 신참 오야가 이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아쿠쓰 겐 추적에 나선 가운데, 정체불명의 남자를 지하실에 숨겨주고 있는 여자 도요코, 뛰어난 농구 실력을 지녔지만 아버지에게서 자해 공갈을 강요당하는 초등학생 하루, 그런 하루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요스케 등 여러 인물들이 하나둘씩 접점을 이루어가며 비극의 중심으로 모여듭니다.

 


괴이 현상을 그린 연작 괴담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학교폭력과 복수의 문제를 다룬 죄의 여백’, 일상에 깃든 농도 짙은 공포를 소재로 한 단편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등 그동안 한국에 출간된 아시자와 요의 작품은 매번 기발한 상상력과 독특한 장르물 서사가 절묘하게 결합돼서 한국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왔습니다. ‘작가생활 10주년 기념작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밤의 이정표는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결의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어서 다시 한 번 그녀의 무한하고 다채로운 상상력을 실감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모두가 관심을 잃은 살인사건에 투입된 반골기질 베테랑 형사, 아버지로부터 자해공갈을 강요당하는 초등학생과 그를 걱정하며 지켜보는 친구, 그리고 정체불명의 남자를 숨겨주고 있는 30대 여성 등 평범한 미스터리라면 하나의 끈으로 묶기 힘든 인물들이 등장하고, 도무지 접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관련 없어 보이는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그래선지 2년 전 종적을 감춘 용의자 아쿠쓰가 진짜 범인인가, 라는 궁금증보다는 과연 이 인물들이 어떤 우연과 운명으로 인해 한 무대 위에서 만나게 될지, 또 그 만남이 각자의 삶을 어떻게 변주시킬지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2년 전 사건이 수시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궁금증을 자극하곤 하는데, 만일 용의자 아쿠쓰가 진범이 맞다면 10대 시절 아버지처럼 여겼던 학원장 도가와를 살해한 동기는 무엇인지, 그 동기란 게 지난 18년 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건지 아니면 사건 당일 느닷없이 폭탄처럼 터진 건지, 또 범행 후 경찰서 앞에 나타났다가 돌연 종적을 감춘 이유는 무엇인지 등이 그것입니다.

 

이미 밤이라 길은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 것처럼 어두웠지. 앞을 달리는 선생님은 길을 꺾을 때마다 손을 들어서 신호를 보내줬어. 그걸 보면서 생각했지. 아아, 저 손이 가리키는 쪽으로 가면 틀림없구나.” (p401)

 

이 작품엔 제목대로 이정표와 관련된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삶이 그려집니다. 누군가를 자신의 이정표로 삼아 힘든 삶을 버텨온 사람, 유일한 이정표라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당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 뒤늦게 찾은 이정표 같은 사람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 집착하는 사람, 그리고 상대의 이정표가 되고 싶으면서 동시에 그가 나의 이정표가 돼주기를 바라는 사람 등 믿음과 기대, 배신과 증오에 얽힌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살인사건 미스터리 속에 걸쭉하게 녹아들어있습니다. 그래선지 한두 명의 메인 주인공이 끌고 간다기보다 여러 인물이 우연과 운명으로 얽힌 끝에 비극적인 접점을 향해 폭주하는 집단주인공 서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흥미로운 건 막판 반전과 함께 이야기의 흐름이 급격하게 사회파 미스터리로 전환되는 점입니다. 이 반전은 초대형 스포일러라 절대 밝힐 수 없지만,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자 동시에 아쉬움의 이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어떤 사회파 미스터리에서도 다룬 적 없는 충격적인 이슈라서 독자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분명하지만, 왠지 지금껏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범인이라는, 어떻게 보면 미스터리 규칙에 반하는 설정처럼 읽힌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작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단서와 힌트를 줘왔고 그를 통해 개연성도 충분히 확보해왔습니다. “생각해보니...”라며 작가가 깔아놓은 밑밥에 동조하는 것도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반전 자체는 매력적이었지만, 그걸 풀어내는 방식은 역시 제겐 다소 아쉽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작가생활 10주년 기념작76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은 미스터리 자체보다 아시자와 요가 그리고자 했던 이정표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이정표와 관련된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삶이 주된 서사이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근거인 막판 반전이 제1조연, 살인사건이 제2조연이라고 할까요?

밤의 이정표는 그녀의 작품을 거의 모두 읽은 제겐 낯익고 자연스럽게 읽혔지만, 혹시 이 작품으로 처음 아시자와 요를 만나서 그녀의 뜻밖의(?) 미스터리가 다소 낯설게 여겨진 독자라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딱 두 편만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 두 작품이라면 아시자와 요의 진가를 만끽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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