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교전 1
기시 유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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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검은 집과 함께 기시 유스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악의 교전14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됐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자세한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기시 유스케 특유의 공포 코드가 학교라는 무대에서 제대로 폭발했다는 인상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제목 속 교전이 전쟁을 뜻하는 交戰이라고 여겼다가 다 읽은 뒤에야 법칙, 경전, 규범을 뜻하는 敎典이란 걸 알곤 새삼 서늘함을 느꼈던 일도 생각납니다.

 

봉쇄된 학교 안에서 한 사이코패스 교사에 의해 일어난 무차별 살인이란 카피처럼 악의 교전은 절대 악()이자 최악의 사이코패스인 영어교사 하스미 세이지가 어떻게 학교를 지배하고 조종하다가 대량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사태를 벌이게 됐는지를 1,000페이지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을 통해 그려낸 작품입니다. 외형상으론 대량 살인극을 그린 범죄 스릴러지만, ‘일본 모던 호러의 대표 작가로 불리는 기시 유스케만의 독특한 코드들이 작품 전반에 진하게 녹아있어서 호러물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선한 웃음, 재미있는 수업, 강한 책임감, 솔선수범하는 자세 등 하스미는 학교 운영진과 동료 교사는 물론 학생들에게도 인기 최고인 영어교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사이코패스로 인간적인 감정이 결여돼있으며 공감 능력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인물입니다. 어려서부터 태연히 살상을 저질러왔지만 그는 가짜 감정가짜 공감력을 무기삼아 모두에게 호감 받는 인물로 위장할 수 있었고,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현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방해가 되는 인물은 가차 없이 제거하고 탐이 나는 인물은 어떻게든 정복하고 소유하지만, 필요한 경우엔 하찮은 자에게라도 한없는 굴종과 양보를 드러내며 자신의 입지를 다집니다. 그리고 학교는 그런 하스미의 본색을 드러내기에 더없이 좋은 무대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이 아이는 조금씩 나의 창조물에 가까워진다. 어쩌면 이런 감각이야말로 교사의 보람일지도 모른다. 그래, 교육이란 결국 세뇌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2, p24)

 

흔히 학교를 안전한 곳이라고 여기지만 실은 그 안에선 교사와 학생을 불문하고 집단 따돌림, 폭력, 절도, 성추행 등 갖가지 범죄가 만연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폐쇄적인데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두 계층만으로 이뤄진 권력 구도 역시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위험요소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이런 불안정함 때문에 학교라는 공간은 지배와 조종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에겐 최적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 교직과는 거리가 먼 금융 엘리트였던 하스미가 우연히 학교의 맛을 알고 그곳에 몸담게 된 건 그에게 희생당한 자들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던 것입니다. 책의 첫머리에 학교라는 고인 늪에 흘러든 상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밝힌 기시 유스케의 소개글이 다 읽은 뒤에도 기억에 남은 건 사이코패스의 대량 살인극의 무대로서 학교 이상의 공간이 없겠다는, 씁쓸하면서도 현실적인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1권에선 학교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하스미의 이중적인 모습과 무자비한 살인을 저질러온 그의 과거, 그리고 그를 의심하는 일부 학생들의 동요가 그려지고, 2권에선 위기를 감지한 하스미가 자신의 실체를 눈치 챈 일부 학생들을 제거하다가 결국 한밤중에 완벽하게 외부와 통제된 학교에서 대량 살인을 저지르는 참극을 그립니다. 영화 배틀 로열을 연상시키는 참혹한 살인 장면은 때론 거북함과 구토감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독자는 극도로 담담하고 차가운 문장들을 통해 악의 실체를 그려내려는 기시 유스케의 의도에 말려들어 그 장면들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이 참극이 어떻게 막을 내릴지, 살아남는 자가 있긴 있을지, 하스미는 제대로 단죄 받을지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절대 악의 이야기를 읽는 건 무척 불편하면서도 호기심 혹은 관음증에 가까운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제정신이 아닌 엉망진창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정확히 자신의 목적을 향해 폭주하는 진정한 사이코패스는 독자의 이중적인 감정을 더더욱 자극하는 설정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극단적인 평가가 나올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기시 유스케가 그린 절대 악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한 번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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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아래
야쿠마루 가쿠 지음, 양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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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폭행 후 살해당한 7세 여아의 사체가 발견되자 히다카 경찰서 소속 나가세 카즈키는 24년 전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여동생 에미를 떠올리며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한편 사카도 지역의 공원에서 키무라라는 남자의 잘린 목이 발견되고, 이내 그가 과거 어린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했던 전과자임이 밝혀집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자신을 상송(프랑스에서 6대에 걸쳐 사형집행인을 맡았던 가문)이라 자칭하는 인물이 범행성명을 통해 키무라를 죽인 건 자신이며, “앞으로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범죄가 일어나면 예전에 아이를 죽이고 상해를 입힌 인간을 산 제물로 삼겠다.”라는 살인예고장을 발표합니다. 상송을 지지하는 여론이 급등하는 가운데, 여아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나가세는 갑자기 상송을 수사하는 사카도 수사본부로 전출됩니다.

 


어둠 아래는 일본에서 2006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소년범죄를 다룬 천사의 나이프로 데뷔한 야쿠마루 가쿠가 두 번째로 내놓은 극장형 범죄미스터리이자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개인적으로 야쿠마루 가쿠의 사회파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해서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는데, 아껴 읽는다고 미루다가 거의 방치 수준에 이르고 만 어둠 아래는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작들보다 훨씬 더 날것 같은 생생함이 배어있어서 천사의 나이프못잖은 충격과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동생을 참혹하게 잃은 뒤 경찰이 됐지만 여전히 분노와 증오심에 사로잡혀있는 30대 형사 나가세, 너무 오랫동안 잔혹한 범죄를 수사해온 나머지 심신이 피폐해진 베테랑 형사 무라카미, 그리고 자신을 사형집행인이라 자처하며 소녀살해범들을 응징하겠다고 발표한 남자등 세 인물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범죄 피해자의 유족이자 지금은 경찰이 된 나가세는 독자에게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불안감을 내뿜습니다. 범인이나 전과자를 대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분노의 게이지가 극에 달하는가 하면, 권총을 손에 쥘 때면 지금껏 쌓여온 증오가 해방되는 쾌감과, 인간을 죽이는 것을 상상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자신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애초 몸담고 있던 소녀살해범 수사본부에서 소녀살해범을 살해하는 상송 수사본부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은 배가됩니다. 만일 여동생을 살해한 자를 상송이 죽여준다면 오빠로서 기뻐해야 할지, 경찰로서 자책감을 느껴야 될지 혼란에 빠진 나가세를 지켜보는 건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독자에겐 가혹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혹은 상송으로 불리는 범인의 동기와 살해규칙은 무척 독특합니다. 5살 딸 사야에게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은 그는 범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공포밖에 없다.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바닥 모를 공포를 심어 주는 것이다.”라며, 어린 소녀가 성범죄로 희생될 때마다 자신의 살인리스트에 올라있는 자들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언론과 경찰에 알림으로써 큰 충격을 몰고 옵니다. 문제는 경찰의 수사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여론이 상송을 지지하는 쪽으로 급격히 기운 점, 심지어 피해자가 어린 소녀들이다 보니 상송의 살인은 범행이 아니라 정당한 응징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점입니다.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는 차고 넘칠 만큼 다양하지만,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성과 공감력, 그리고 생생한 캐릭터와 예측하기 힘든 반전을 통해 매번 강한 여운과 깊은 인상을 남겨서 여느 사회파 미스터리와도 차별되는 매력을 발산합니다. ‘어둠 아래는 야쿠마루 가쿠의 초기작이지만 그의 매력을 십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으로, 그의 팬이든 아니든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볼 만한 명품이란 생각입니다.

이제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 가운데 못 읽은 건 허몽’(일본 2008) 한 편뿐인데, ‘어둠 아래를 읽고 나니 좀더 아껴둬야 할지 당장이라도 꺼내 읽어야 할지 헷갈릴 따름입니다. 그 전에 그의 신간 소식이 들려온다면 더없이 반가운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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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의 쥐들 - 카오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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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여름, 대규모 천연두 감염 사태로 곳곳에 격리병동이 설치된 상황에서 변질자 혹은 죽지 않는 시체라 불리는 괴물이 출현하자 폴란드 서부 대도시 브로츠와프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무차별로 산 사람을 잡아먹는 그 괴물은 곧 좀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경미한 접촉 혹은 체액을 묻히는 것만으로도 멀쩡한 사람을 좀비로 변질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됩니다. 유력한 정치인들이 모조리 도망친 가운데 군부와 경찰이 수습에 나서지만 백약이 무효한 상태에서 브로츠와프의 좀비는 시시각각 늘어갈 뿐입니다.

 


좀비 이야기에 딱히 취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배경이 1960년대 폴란드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작품입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고 독재와 권위와 통제가 만연한 공산국가가 된 폴란드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이 좀비 서사와 어떻게 결합됐을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슈퍼 히어로가 등장할 리도 없고, 인민에게 강압적인 군대와 경찰이 정의의 사도처럼 좀비를 퇴치할 리도 만무한 상황에서 안 그래도 암울하고 폐쇄적인 1960년대의 폴란드를 덮친 세기말적 비극은 지금껏 읽은 좀비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동료와 부하들을 잃어가면서 분투하는 군인과 경찰, 좀비 사태를 자신들의 정치적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젊은 야심가들, 감염자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선택을 강요받는 의사, 그리고 좀비의 공격에서 천신만고의 탈주극을 벌이는 간호학교 교장, 술집 주인, 일가족의 가장 등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좀비의 공격이 시작된 직후 첫 12시간동안 브로츠와프가 어떻게 지옥으로 변해가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들 가운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목숨을 보존하는 자는 극히 일부뿐입니다. 또한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인물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좀비의 공격 속에 생사의 갈림길을 걷게 된 수많은 인물들이 직조해낸 거대한 군상극이란 뜻입니다. 작가는 분() 단위로 쪼개진 짧은 챕터들을 속도감 있게 전개시키면서도, 독자들이 일말의 희망이나 기대를 품지 못하도록 군상극 속 인물들을 가차 없이 좀비의 희생양으로 전락시킵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비극의 무게는 한없이 무거워지기만 할뿐 어디에서도 잠깐의 안식이나 안도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1960년대의 공산주의 체제 폴란드라는 시대적 상황은 좀비에게 점령당한 브로츠와프의 비극을 더욱 참혹하게 만듭니다. 사태를 은폐하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권력자들, 그들의 빈자리를 차지한 채 좀비 사태를 승진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예비 권력자들, 상식과 소통을 거부한 채 무모하고 강압적인 작전만 거듭하는 군인과 경찰은 거리 곳곳에 피와 살과 내장을 흩뿌리며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는 좀비 못잖게 위기감과 불안감만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 용감하게 좀비에 맞서 싸우는 자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독재와 권위와 통제를 당연시 여기는 공권력의 무기력하고 비합리적인 태도는 브로츠와프의 운명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 뿐입니다.

 

어디에서도 희망과 기대를 찾아볼 수 없고 좀비의 공격은 날로 확산되는 가운데 브로츠와프를 덮친 첫 12시간의 비극이 마무리됩니다. ‘카오스라는 부제가 달린 이 작품은 760여 페이지의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브로츠와프 3부작가운데 첫 편이라고 합니다. 아마 나머지 두 편 역시 이만한 분량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작품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극히 일부인 걸 보면 2편과 3편도 거의 새 인물들이 이끌어갈 군상극이 아닐까 예상됩니다.

전혀 새로운 좀비 이야기라고 할 순 없지만 ‘1960년대의 공산주의 체제 폴란드라는 특수한 배경 덕분에 나름 색다른 서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살짝 부담되는 분량이긴 하지만 워낙 긴장감과 속도감이 충만해서 주말 하루를 꼬박 투자한다면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좀비 마니아가 아닌 어중간한 스탠스의 독자라도 공포와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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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의 길
메도루마 슌 지음, 조정민 옮김 / 모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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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출신의 '행동하는 작가' 메도루마 슌의 소설집 혼백의 길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4월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가 8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긴 비극과 트라우마를 그린 작품입니다. 나라와 시대를 불문하고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그린 문학작품에 관심이 있다 보니 오키나와 전쟁을 둘러싼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띠지 카피에 저절로 눈길이 끌렸고, 그동안 어설프게만 알고 있던 그 전투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어졌습니다.

 

지금은 유명 여행지로만 알려져 있지만 오키나와의 역사는 눈대중으로만 훑어봐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참혹합니다. 류큐국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다가 일본 영토에 강제로 병합됐지만 본토 사람들에게 멸시와 냉대를 받았고, 이 작품의 한국어판 서문대로라면 “1920~30년대 일본 본토에서는 식당 앞에 '조선인, 류큐인 사절'이라는 벽보가 붙기 일쑤였습니다. 패전의 기운이 명확해진 1945년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연합군과 일본군의 희생도 컸지만 오키나와 주민 네 명 중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엄청난 참극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오키나와는 본섬의 20%를 주일미군의 기지에 점령당한 채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록된 다섯 편 가운데 대부분은 이제 80~90대에 이른, 즉 당시 10대 소년소녀였던 인물들이 주인공입니다. 80년이 흐른 뒤에도 전쟁이 남긴 악몽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년의 주인공들이 우연 또는 필연처럼 과거와 조우하곤 잊고 싶지만 결코 잊히지 않을 기억을 떠올리는 이야기들이 전개됩니다.

공습을 당해 후퇴하던 도중 중상을 입은 채 죽여 줘라며 매달리는 한 여성의 간청을 외면하지 못해 칼을 빼들었던 남자(‘혼백의 길’),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일들을 회상하는 남자들(‘이슬’),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스파이로 오인당해 살해된 아버지를 둔 남자가 40년 만에 아버지 살해범과 마주친 이야기(‘() 뱀장어’), 미군기지 건설현장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80대 여성이 전쟁의 와중에 남동생을 잃었던 그날을 떠올리는 이야기(‘버들붕어’), 15살에 전쟁에 동원됐다가 이웃남자를 스파이로 고발한 일 때문에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온 90살 남자(‘척후’) 등 애초 전쟁 따위에 휘말릴 이유가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잔혹한 운명을 그린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예외 없이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읽는 내내 한국전쟁과 제주 4.3항쟁을 다룬 우리 소설과 2차 대전을 다룬 외국소설이 자연스레 생각이 났는데, 그 작품들의 공통점이라면 전쟁의 비극은 실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보다 겁에 질려 숨거나 도망쳐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터전에서 더 잔인하게 벌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혼백의 길역시 같은 궤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키나와 전쟁을 둘러싼 다섯 가지 이야기가 조금 더 특별하게 읽힌 건 8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 기지에게 점령당한 채 과거의 상흔을 반강제로 되새김질해야만 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역설적인 처지 때문입니다. 작가 메도루마 슌은 미군기지 건설현장에서 해상 시위를 벌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작가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나고 자란 오키나와의 비극을 정면으로 그려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며 출판사 소개글대로 오키나와 안팎의 폭력을 겨냥한 결연한 문학적 응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딱히 오키나와의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싶은 독자라면 메도루마 슌의 혼백의 길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한국전쟁을 무대로 한 비슷한 서사를 맛보고 싶다면 (이제는 고전이라고 해도 괜찮을)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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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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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2063,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로 불리던 미스터리의 여왕 무로미 교코가 사망한 후 조카인 는 저작권을 물려받아 그녀의 유고인 거울 나라의 출간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교코를 오랫동안 담당했던 편집자가 뜻밖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는 혼란에 빠집니다. 그에 따르면 거울 나라원고에 삭제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거울 나라40년 전인 2020년대를 배경으로 한 교코의 자전적 소설로 일러두기에 따르면 논픽션에 가까운, 그러니까 실존인물들이 등장한 소설입니다. 외모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세 사람을 비롯하여 모두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삶을 일그러뜨린 과거사를 추적하는 미스터리가 펼쳐집니다.

 


형식, 소재, 캐릭터 등 여러 면에서 독특함을 풍기는 미스터리입니다. 또한 애증, 죄책감, 자기혐오, 이기심 등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갖가지 어둡고 불온한 감정들을 집요하게 그려낸 안타까운 비극 서사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미스터리와 비극의 중심에 루키즘(외모지상주의) 또는 외모와 관련된 질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본체라 할 수 있는 액자소설 거울 나라를 이끌어가는 건 네 명의 남녀입니다. 아이돌로 데뷔할 정도로 외모가 빼어나지만 신체이형장애(평균보다 외모가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특정 부위에 대한 불만족 또는 혐오감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을 추하거나 못났다고 여기며 극심한 콤플렉스에 빠지는 정신적 질병)에 시달리는 웹 미디어 편집자 히비키, 어린 시절 화재로 얼굴에 화상을 입었지만 지금은 카메라 필터로 상처를 가린 채 라이브 스트리머로 활동하고 있는 사토네, 안면인식장애 때문에 연인과 직장을 잃은 적 있는 셰프 이오리, 그리고 히비키의 직장선배이자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품고 있는 다쿠미가 그들입니다.

15년 전, 히비키가 선물한 향초가 일으킨 화재 때문에 사토네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히비키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살아왔습니다. 극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 당시 잠시 이웃에 머물렀던 동갑내기 소년 이오리와도 우연히 만나는데, 이들은 15년 전의 화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것이 히비키가 선물한 향초 탓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히비키의 직장선배 다쿠미까지 가세하여 조사에 나선 가운데 네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15년 전의 진실과 마주칩니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네 사람에 의한 진상 추적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신체이형장애, 얼굴에 입은 화상, 안면인식장애 등 형태는 달라도 하나같이 외모와 관련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세 인물 사이의 미묘한 관계와 감정들입니다. 15년 전부터 서로를 알아온 히비키와 사토네와 이오리는 죄책감, 애증, 의심, 고마움 등 엇갈린 감정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아슬아슬한 삼각관계를 이루기도 합니다. 거기에 히비키에게 특별한 관심을 품은 다쿠미까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미스터리와 비극 외에 치정의 분위기까지 풍깁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뒤섞였던 서사들은 미스터리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일제히 한 방향으로 치달으며 독자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칩니다.

 

현재의 는 교정지를 거듭 읽으면서도 편집자가 주장한 삭제된 내용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하는데, 독자 역시 삭제된 내용이 과연 있긴 있는 건지, 만약 있다면 미스터리를 뒤집는 반전일지 혹은 네 사람의 운명에 관한 내용일지 궁금증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막판에 뜻밖의 방식으로 공개된 삭제된 내용은 미스터리의 여왕 무로미 교코가 유고 거울 나라를 통해 감추려고 했던 또는 드러내려고 했던 진실을 찬찬히 설명하는데,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독자는 교코와 소설 속 인물들과 현재의 가 품고 있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거울 나라는 치밀하고 정교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외모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인물들이 어떻게든 각자의 상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안타까운 비극의 기운이 더 강한 작품입니다.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느슨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워낙 감정선들이 세고 독한데다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사회파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만끽할 수 있어서 신선한 책읽기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오카자키 다쿠마의 대표작인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시리즈는 라이트한 일상 미스터리 같아서 읽을 생각을 안 했는데, ‘거울 나라를 읽고 나니 기회가 되면 한 편쯤은 찾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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