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교전 1
기시 유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검은 집과 함께 기시 유스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악의 교전14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됐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자세한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기시 유스케 특유의 공포 코드가 학교라는 무대에서 제대로 폭발했다는 인상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제목 속 교전이 전쟁을 뜻하는 交戰이라고 여겼다가 다 읽은 뒤에야 법칙, 경전, 규범을 뜻하는 敎典이란 걸 알곤 새삼 서늘함을 느꼈던 일도 생각납니다.

 

봉쇄된 학교 안에서 한 사이코패스 교사에 의해 일어난 무차별 살인이란 카피처럼 악의 교전은 절대 악()이자 최악의 사이코패스인 영어교사 하스미 세이지가 어떻게 학교를 지배하고 조종하다가 대량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사태를 벌이게 됐는지를 1,000페이지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을 통해 그려낸 작품입니다. 외형상으론 대량 살인극을 그린 범죄 스릴러지만, ‘일본 모던 호러의 대표 작가로 불리는 기시 유스케만의 독특한 코드들이 작품 전반에 진하게 녹아있어서 호러물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선한 웃음, 재미있는 수업, 강한 책임감, 솔선수범하는 자세 등 하스미는 학교 운영진과 동료 교사는 물론 학생들에게도 인기 최고인 영어교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사이코패스로 인간적인 감정이 결여돼있으며 공감 능력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인물입니다. 어려서부터 태연히 살상을 저질러왔지만 그는 가짜 감정가짜 공감력을 무기삼아 모두에게 호감 받는 인물로 위장할 수 있었고,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현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방해가 되는 인물은 가차 없이 제거하고 탐이 나는 인물은 어떻게든 정복하고 소유하지만, 필요한 경우엔 하찮은 자에게라도 한없는 굴종과 양보를 드러내며 자신의 입지를 다집니다. 그리고 학교는 그런 하스미의 본색을 드러내기에 더없이 좋은 무대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이 아이는 조금씩 나의 창조물에 가까워진다. 어쩌면 이런 감각이야말로 교사의 보람일지도 모른다. 그래, 교육이란 결국 세뇌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2, p24)

 

흔히 학교를 안전한 곳이라고 여기지만 실은 그 안에선 교사와 학생을 불문하고 집단 따돌림, 폭력, 절도, 성추행 등 갖가지 범죄가 만연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폐쇄적인데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두 계층만으로 이뤄진 권력 구도 역시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위험요소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이런 불안정함 때문에 학교라는 공간은 지배와 조종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에겐 최적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 교직과는 거리가 먼 금융 엘리트였던 하스미가 우연히 학교의 맛을 알고 그곳에 몸담게 된 건 그에게 희생당한 자들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던 것입니다. 책의 첫머리에 학교라는 고인 늪에 흘러든 상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밝힌 기시 유스케의 소개글이 다 읽은 뒤에도 기억에 남은 건 사이코패스의 대량 살인극의 무대로서 학교 이상의 공간이 없겠다는, 씁쓸하면서도 현실적인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1권에선 학교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하스미의 이중적인 모습과 무자비한 살인을 저질러온 그의 과거, 그리고 그를 의심하는 일부 학생들의 동요가 그려지고, 2권에선 위기를 감지한 하스미가 자신의 실체를 눈치 챈 일부 학생들을 제거하다가 결국 한밤중에 완벽하게 외부와 통제된 학교에서 대량 살인을 저지르는 참극을 그립니다. 영화 배틀 로열을 연상시키는 참혹한 살인 장면은 때론 거북함과 구토감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독자는 극도로 담담하고 차가운 문장들을 통해 악의 실체를 그려내려는 기시 유스케의 의도에 말려들어 그 장면들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이 참극이 어떻게 막을 내릴지, 살아남는 자가 있긴 있을지, 하스미는 제대로 단죄 받을지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절대 악의 이야기를 읽는 건 무척 불편하면서도 호기심 혹은 관음증에 가까운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제정신이 아닌 엉망진창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정확히 자신의 목적을 향해 폭주하는 진정한 사이코패스는 독자의 이중적인 감정을 더더욱 자극하는 설정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극단적인 평가가 나올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기시 유스케가 그린 절대 악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한 번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