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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의 쥐들 - 카오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2월
평점 :
1963년 여름, 대규모 천연두 감염 사태로 곳곳에 격리병동이 설치된 상황에서 변질자 혹은 죽지 않는 시체라 불리는 ‘괴물’이 출현하자 폴란드 서부 대도시 브로츠와프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무차별로 산 사람을 잡아먹는 그 ‘괴물’은 곧 좀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경미한 접촉 혹은 체액을 묻히는 것만으로도 멀쩡한 사람을 좀비로 변질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됩니다. 유력한 정치인들이 모조리 도망친 가운데 군부와 경찰이 수습에 나서지만 백약이 무효한 상태에서 브로츠와프의 좀비는 시시각각 늘어갈 뿐입니다.

좀비 이야기에 딱히 취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배경이 1960년대 폴란드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작품입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고 독재와 권위와 통제가 만연한 공산국가가 된 폴란드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이 좀비 서사와 어떻게 결합됐을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슈퍼 히어로가 등장할 리도 없고, 인민에게 강압적인 군대와 경찰이 정의의 사도처럼 좀비를 퇴치할 리도 만무한 상황에서 안 그래도 암울하고 폐쇄적인 1960년대의 폴란드를 덮친 세기말적 비극은 지금껏 읽은 좀비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동료와 부하들을 잃어가면서 분투하는 군인과 경찰, 좀비 사태를 자신들의 정치적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젊은 야심가들, 감염자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선택을 강요받는 의사, 그리고 좀비의 공격에서 천신만고의 탈주극을 벌이는 간호학교 교장, 술집 주인, 일가족의 가장 등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좀비의 공격이 시작된 직후 첫 12시간동안 브로츠와프가 어떻게 지옥으로 변해가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들 가운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목숨을 보존하는 자는 극히 일부뿐입니다. 또한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인물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좀비의 공격 속에 생사의 갈림길을 걷게 된 수많은 인물들이 직조해낸 거대한 군상극이란 뜻입니다. 작가는 분(分) 단위로 쪼개진 짧은 챕터들을 속도감 있게 전개시키면서도, 독자들이 일말의 희망이나 기대를 품지 못하도록 군상극 속 인물들을 가차 없이 좀비의 희생양으로 전락시킵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비극의 무게는 한없이 무거워지기만 할뿐 어디에서도 잠깐의 안식이나 안도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1960년대의 공산주의 체제 폴란드’라는 시대적 상황은 좀비에게 점령당한 브로츠와프의 비극을 더욱 참혹하게 만듭니다. 사태를 은폐하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권력자들, 그들의 빈자리를 차지한 채 좀비 사태를 승진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예비 권력자들, 상식과 소통을 거부한 채 무모하고 강압적인 작전만 거듭하는 군인과 경찰은 거리 곳곳에 피와 살과 내장을 흩뿌리며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는 좀비 못잖게 위기감과 불안감만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 용감하게 좀비에 맞서 싸우는 자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독재와 권위와 통제를 당연시 여기는 공권력의 무기력하고 비합리적인 태도는 브로츠와프의 운명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 뿐입니다.
어디에서도 희망과 기대를 찾아볼 수 없고 좀비의 공격은 날로 확산되는 가운데 브로츠와프를 덮친 첫 12시간의 비극이 마무리됩니다. ‘카오스’라는 부제가 달린 이 작품은 760여 페이지의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브로츠와프 3부작’ 가운데 첫 편이라고 합니다. 아마 나머지 두 편 역시 이만한 분량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작품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극히 일부인 걸 보면 2편과 3편도 거의 새 인물들이 이끌어갈 군상극이 아닐까 예상됩니다.
전혀 새로운 좀비 이야기라고 할 순 없지만 ‘1960년대의 공산주의 체제 폴란드’라는 특수한 배경 덕분에 나름 색다른 서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살짝 부담되는 분량이긴 하지만 워낙 긴장감과 속도감이 충만해서 주말 하루를 꼬박 투자한다면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좀비 마니아가 아닌 어중간한 스탠스의 독자라도 공포와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