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백의 길
메도루마 슌 지음, 조정민 옮김 / 모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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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출신의 '행동하는 작가' 메도루마 슌의 소설집 혼백의 길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4월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가 8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긴 비극과 트라우마를 그린 작품입니다. 나라와 시대를 불문하고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그린 문학작품에 관심이 있다 보니 오키나와 전쟁을 둘러싼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띠지 카피에 저절로 눈길이 끌렸고, 그동안 어설프게만 알고 있던 그 전투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어졌습니다.

 

지금은 유명 여행지로만 알려져 있지만 오키나와의 역사는 눈대중으로만 훑어봐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참혹합니다. 류큐국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다가 일본 영토에 강제로 병합됐지만 본토 사람들에게 멸시와 냉대를 받았고, 이 작품의 한국어판 서문대로라면 “1920~30년대 일본 본토에서는 식당 앞에 '조선인, 류큐인 사절'이라는 벽보가 붙기 일쑤였습니다. 패전의 기운이 명확해진 1945년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연합군과 일본군의 희생도 컸지만 오키나와 주민 네 명 중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엄청난 참극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오키나와는 본섬의 20%를 주일미군의 기지에 점령당한 채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록된 다섯 편 가운데 대부분은 이제 80~90대에 이른, 즉 당시 10대 소년소녀였던 인물들이 주인공입니다. 80년이 흐른 뒤에도 전쟁이 남긴 악몽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년의 주인공들이 우연 또는 필연처럼 과거와 조우하곤 잊고 싶지만 결코 잊히지 않을 기억을 떠올리는 이야기들이 전개됩니다.

공습을 당해 후퇴하던 도중 중상을 입은 채 죽여 줘라며 매달리는 한 여성의 간청을 외면하지 못해 칼을 빼들었던 남자(‘혼백의 길’),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일들을 회상하는 남자들(‘이슬’),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스파이로 오인당해 살해된 아버지를 둔 남자가 40년 만에 아버지 살해범과 마주친 이야기(‘() 뱀장어’), 미군기지 건설현장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80대 여성이 전쟁의 와중에 남동생을 잃었던 그날을 떠올리는 이야기(‘버들붕어’), 15살에 전쟁에 동원됐다가 이웃남자를 스파이로 고발한 일 때문에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온 90살 남자(‘척후’) 등 애초 전쟁 따위에 휘말릴 이유가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잔혹한 운명을 그린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예외 없이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읽는 내내 한국전쟁과 제주 4.3항쟁을 다룬 우리 소설과 2차 대전을 다룬 외국소설이 자연스레 생각이 났는데, 그 작품들의 공통점이라면 전쟁의 비극은 실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보다 겁에 질려 숨거나 도망쳐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터전에서 더 잔인하게 벌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혼백의 길역시 같은 궤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키나와 전쟁을 둘러싼 다섯 가지 이야기가 조금 더 특별하게 읽힌 건 8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 기지에게 점령당한 채 과거의 상흔을 반강제로 되새김질해야만 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역설적인 처지 때문입니다. 작가 메도루마 슌은 미군기지 건설현장에서 해상 시위를 벌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작가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나고 자란 오키나와의 비극을 정면으로 그려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며 출판사 소개글대로 오키나와 안팎의 폭력을 겨냥한 결연한 문학적 응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딱히 오키나와의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싶은 독자라면 메도루마 슌의 혼백의 길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한국전쟁을 무대로 한 비슷한 서사를 맛보고 싶다면 (이제는 고전이라고 해도 괜찮을)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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