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아래
야쿠마루 가쿠 지음, 양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성폭행 후 살해당한 7세 여아의 사체가 발견되자 히다카 경찰서 소속 나가세 카즈키는 24년 전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여동생 에미를 떠올리며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한편 사카도 지역의 공원에서 키무라라는 남자의 잘린 목이 발견되고, 이내 그가 과거 어린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했던 전과자임이 밝혀집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자신을 상송(프랑스에서 6대에 걸쳐 사형집행인을 맡았던 가문)이라 자칭하는 인물이 범행성명을 통해 키무라를 죽인 건 자신이며, “앞으로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범죄가 일어나면 예전에 아이를 죽이고 상해를 입힌 인간을 산 제물로 삼겠다.”라는 살인예고장을 발표합니다. 상송을 지지하는 여론이 급등하는 가운데, 여아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나가세는 갑자기 상송을 수사하는 사카도 수사본부로 전출됩니다.

 


어둠 아래는 일본에서 2006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소년범죄를 다룬 천사의 나이프로 데뷔한 야쿠마루 가쿠가 두 번째로 내놓은 극장형 범죄미스터리이자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개인적으로 야쿠마루 가쿠의 사회파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해서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는데, 아껴 읽는다고 미루다가 거의 방치 수준에 이르고 만 어둠 아래는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작들보다 훨씬 더 날것 같은 생생함이 배어있어서 천사의 나이프못잖은 충격과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동생을 참혹하게 잃은 뒤 경찰이 됐지만 여전히 분노와 증오심에 사로잡혀있는 30대 형사 나가세, 너무 오랫동안 잔혹한 범죄를 수사해온 나머지 심신이 피폐해진 베테랑 형사 무라카미, 그리고 자신을 사형집행인이라 자처하며 소녀살해범들을 응징하겠다고 발표한 남자등 세 인물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범죄 피해자의 유족이자 지금은 경찰이 된 나가세는 독자에게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불안감을 내뿜습니다. 범인이나 전과자를 대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분노의 게이지가 극에 달하는가 하면, 권총을 손에 쥘 때면 지금껏 쌓여온 증오가 해방되는 쾌감과, 인간을 죽이는 것을 상상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자신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애초 몸담고 있던 소녀살해범 수사본부에서 소녀살해범을 살해하는 상송 수사본부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은 배가됩니다. 만일 여동생을 살해한 자를 상송이 죽여준다면 오빠로서 기뻐해야 할지, 경찰로서 자책감을 느껴야 될지 혼란에 빠진 나가세를 지켜보는 건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독자에겐 가혹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혹은 상송으로 불리는 범인의 동기와 살해규칙은 무척 독특합니다. 5살 딸 사야에게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은 그는 범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공포밖에 없다.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바닥 모를 공포를 심어 주는 것이다.”라며, 어린 소녀가 성범죄로 희생될 때마다 자신의 살인리스트에 올라있는 자들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언론과 경찰에 알림으로써 큰 충격을 몰고 옵니다. 문제는 경찰의 수사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여론이 상송을 지지하는 쪽으로 급격히 기운 점, 심지어 피해자가 어린 소녀들이다 보니 상송의 살인은 범행이 아니라 정당한 응징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점입니다.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는 차고 넘칠 만큼 다양하지만,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성과 공감력, 그리고 생생한 캐릭터와 예측하기 힘든 반전을 통해 매번 강한 여운과 깊은 인상을 남겨서 여느 사회파 미스터리와도 차별되는 매력을 발산합니다. ‘어둠 아래는 야쿠마루 가쿠의 초기작이지만 그의 매력을 십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으로, 그의 팬이든 아니든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볼 만한 명품이란 생각입니다.

이제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 가운데 못 읽은 건 허몽’(일본 2008) 한 편뿐인데, ‘어둠 아래를 읽고 나니 좀더 아껴둬야 할지 당장이라도 꺼내 읽어야 할지 헷갈릴 따름입니다. 그 전에 그의 신간 소식이 들려온다면 더없이 반가운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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