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전미궁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4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도조대학 의학부 3학년 덴마 다이키치는 어느 날 거듭된 불운으로 인해 터무니없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의료법인 헤키스이인 사쿠라노미야 병원에 자원봉사자로 위장잠입하여 그곳에서 종적을 감춘 한 남자를 찾는 일입니다. 인근의 도조대학병원과 달리 주로 종말기 의료를 담당하고 있던 그곳엔 안 그래도 최근 불온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덴마를 더욱 긴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잠입 직후 덴마는 아무리 종말기 의료기관이라곤 해도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목도하고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도조대학에서 파견된 간호사 히메미야의 연이은 실수로 덴마는 자원봉사는커녕 환자신세가 되고 마는데, 그의 치료를 맡은 건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피부과 의사 시라토리입니다.

 

나전미궁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의 외전으로, 시리즈 1편인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직후에 출간됐지만 내용상으로는 시리즈 3편인 제너럴 루주의 개선과 연결되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나전미궁의 알맹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 덴마의 미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헤키스이인 사쿠라노미야 병원에서 종적을 감춘 한 남자를 찾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말기 의료로 유명한 이 병원의 시스템을 조사하는 일입니다. 거듭된 사고로 환자신세가 되고 만 덴마는 어떻게든 미션을 완수하려 애쓰지만 그 전에 보통 병원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쿠라노미야 병원의 운영방식과 기이한 캐릭터를 지닌 의료진들 때문에 연이어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 와중에 수상쩍은 간호사 히메미야와 더 수상쩍은 피부과 의사 시라토리를 만난 덴마는 그들에게서 병원의 실체와 의료진의 비밀을 들은 뒤 과연 자신이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내용도 복잡한데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물론 주 무대인 헤키스이인 사쿠라노미야 병원 자체가 비범하다 못해 기괴하거나 판타지처럼 설정돼서 보통의 메디컬 미스터리와 달리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다만 이 작품의 방점은 종말기 의료의 현실과 폐해에 대한 비판’, 그리고 효율성과 수익만 중시하느라 종말기 의료를 도외시하는 의료계와 정부에 대한 비난에 맞춰져있어서 사회파 서사와 메디컬 미스터리의 조합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를 가질 만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의학이란 원래 출신성분이 형편없는 존재인데도 지금은 귀부인처럼 행세하고 있어. 웃기지도 않지. 의학이란 시체를 먹고 살아온 빌어먹을 학문이야. 그걸 잊지 말게.” (p297)

 

정부와 의료계가 돈에 눈이 멀어 정작 세심하게 보살펴야 할 종말기 의료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을 통렬히 비판하는 사쿠라노미야 병원장 이와오의 일갈입니다. 이는 제너럴 루주의 개선에서 주인공 하야미가 적자를 줄이기 위해 돈이 안 되는 구급구명센터, 소아과, 산부인과를 축출하려는 병원 경영진과 충돌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흐름인데, 현직 의사이자 의료개혁 급진론자인 가이도 다케루의 주제의식이 함축적으로 깃든 문장이기도 합니다.

이와오 원장이 마주한 적은 사쿠라노미야 병원을 위성병원 취급하며 종말기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떠넘겨온 도조대학병원과 부조리한 정책으로 대형의료기관의 편의만 봐주는 후생노동성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선봉에는 이와오 원장의 쌍둥이 딸이자 부원장인 사유리와 스미레가 나섭니다. 서로 판이한 성격인 사유리와 스미레는 시체를 먹고 살아온 빌어먹을 의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배수의 진을 치고 마지막 결전을 다짐합니다.

 

종말기 의료를 소재로 정부와 의료계를 비판한다는 이야기 자체는 너무나도 구미가 당기지만 나전미궁은 이야기를 너무나도 비틀고 비튼 탓에 재미와 주제의식 모두 작가의 의도만큼 전달되지 않은 아쉬운 작품입니다. 미션의 주인공 덴마는 코미디 캐릭터 이상의 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소소한 미스터리 해결 외에는 오히려 방관자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이와오 원장으로 대표되는 사쿠라노미야 병원 사람들 역시 지나치게 희화화 또는 불가사의한 캐릭터로 포장된 탓에 정작 그들의 진심이 뭔지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도조대학병원과 결전을 벌이는 이유도, 굳이 비극적인 결말로 폭주하는 이유도 이해불가 또는 공감불가였는데, 그래선지 평범하더라도 선명하고 현실적인 전개가 아쉽기만 했습니다.

 

名品再讀이라는 이름으로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를 다시 읽었는데, 한국에 마지막으로 소개된 아리아드네의 탄환’(일본출간 기준으로 시리즈 6)은 다시 읽을 계획이 없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실망감이 크기도 했고, 이 시리즈의 미덕에서 많이 벗어나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는 처음 읽었을 때만큼의 긴장과 흥분을 전해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입니다. 출간된 지 한참 된 작품들이긴 하지만 독특한 메디컬 미스터리를 찾는 독자라면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을 통해서라도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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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루주의 개선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3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피를 보기 싫어해서 내과를 선택한 다구치는 병원 내 권력투쟁이나 승진 경쟁이 싫어서 건물 한 구석에 자리한 부정수소외래(不定愁訴外來)에서 환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한직 중의 한직에 근무 중입니다. 안하무인에 지독한 독설가인 시라토리는 후생노동성의 꽉 막힌 관료 시스템에 반발하다가 한직으로 내쳐졌지만 각종 의료면허는 물론이고 뛰어난 논리력과 추리력까지 갖춘 이른바 로지컬 몬스터입니다. 두 사람은 무수한 충돌을 겪으면서도 묘하게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도조대학 부속병원에서 벌어지는 특이한 사건들을 해결하곤 합니다. (시리즈 2편인 나이팅게일의 침묵서평에 쓴 인물평을 인용했습니다)

 

의사 같지 않은 의사 다구치와 공무원 같지 않은 공무원 시라토리를 앞세운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앞선 두 작품들과 달리 이번에는 다구치-시라토리의 콤비 플레이에 기반한 미스터리보다는 일명 제너럴 루주로 불리는 도조대학병원 구명구급센터 부장 하야미를 앞세워 구급의료현장이 처한 가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서사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도조대학 부속병원의 오렌지 신관은 건립 당시의 기대와 달리 엄청난 적자만 내는 애물단지가 된 상태입니다. 구급구명센터, 소아과, 산부인과 등 돈이 안 되는 진료과목들이 몰려있는데다 그 수장인 하야미 부장은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닥터 헬리(콥터) 도입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어서 병원 경영을 더 중시 여기는 자들에겐 눈엣가시나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누군가 익명의 투서로 하야미 부장의 리베이트 수뢰혐의를 고발해왔고, 능구렁이 같은 병원장의 꼼수에 넘어간 다구치는 대학동기인 하야미의 혐의를 조사하는 처지에 빠지고 맙니다. 다소 거칠고 독재적이긴 해도 나를 심판할 수 있는 건 환자뿐이다.”라며 순수할 정도로 의료행위에만 골몰해온 하야미의 부정을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다구치는 이번 일을 빌미삼아 어떻게든 하야미를 쫓아내려는 병원 내 세력들과 일전을 불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연이은 의료사고의 진실을 다룬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소아환자 보호자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 나이팅게일의 침묵등 도조대학 부속병원을 무대로 한 메디컬 미스터리를 그린 전작들과 달리 제너럴 루주의 개선(억지로 이름을 붙인다면) 사회파 메디컬 소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5년 전 대참사 당시 신참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구급구명센터를 지휘하여 이른바 살아있는 전설로 칭송받는 하야미 부장의 수뢰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가 전개되긴 하지만 익명의 투서를 보낸 게 누군지, 하야미 부장이 실제로 부정한 돈을 받은 게 맞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알맹이는 구급구명센터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환자의 구명인지 수익 창출인지의 논란, 대학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환경에 내몰린 구급구명센터의 현실, 권력투쟁에 골몰하는 의사와 환자에게만 몰두하는 의사 사이의 대립과 충돌, 의료행위에 있어 윤리의 문제, 그리고 진짜 의사가 나아가야 할 길 등 의사 출신인 작가가 세상을 향해 내던진 긴급하고도 절실한 화두들입니다.

 

주인공인 하야미 부장은 여러 면에서 이국종 교수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입니다. 긴급환자 이송을 위한 응급의료 전용헬기라는 공통점도 있는데다 , 이 사람은 진짜 의사구나.”라는 생각을 저절로 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시리즈 주인공인 다구치와 시라토리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축소된 점은 아쉬웠지만, 사회파 메디컬 소설의 미덕이 진하게 녹아있어서 미스터리 서사를 앞세운 전작들보다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 읽고 있는 신의 카르테 시리즈가 소도시의 지역의료기관을 무대로 선하고 소시민적인 의사의 감동적인 고군분투를 그렸다면 제너럴 루주의 개선은 총탄이 날아다니는 살벌한 전쟁터 같은 구급구명센터를 이끄는 피투성이 장군하야미 부장의 혈투를 그리고 있어서 차별화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제너럴 루주의 개선과 전작인 나이팅게일의 침묵은 같은 시간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말하자면 다구치와 시라토리가 두 사건을 동시에 해결하느라 분주하게 뛰어다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순서대로 두 작품을 읽어야 이야기의 맥락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감흥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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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헤드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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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기사야마 세이타의 삶은 평범하지만 행복합니다. 매력적인 아내 기키, 아이돌로 활약 중인 큰딸 마후유, 게임 마니아인 둘째딸 아야카 등 가족들 역시 유쾌한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기사야마는 이 소중한 가족이 언제든 작은 균열 하나로 박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불안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사소한 사건 하나 때문에 현실이 돼버립니다. 가족이 해체된 뒤 절망에 사로잡힌 그의 선택은 마약 딜러에게서 산 위험천만한 약물 시스마. 마지막으로 엄청난 쾌락을 맛본 뒤 삶을 마감하려 했지만, 약물에서 깨어난 기사야마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상황을 목도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소중한 가족들이 끔찍한 형태로 살해당하는 악몽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시작으로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명탐정의 창자등 지금까지 읽은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들은 이른바 특수설정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걸맞게 상상을 초월하는 설정과 기괴한 전개, 그리고 충격적인 엔딩을 선사해왔습니다. 취향의 차이 때문에 읽은 작품들 모두 별 4개만 주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작 소식이 들릴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궁금증 때문에 기어이 장바구니에 담곤 했습니다. (유일하게 못 읽은 명탐정의 제물역시 언젠가는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엘리펀트 헤드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상상력엔 끝이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정신과 의사 기사야마가 위험천만한 약물 시스마를 투약한 뒤 겪게 되는 가공할 상황과 함께 19금 판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잔인하고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룹니다. 특히 시라이 도모유키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난 독자라면 이 가공할 상황때문에 충격, 혼란, 당혹감, 불쾌감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상상력의 끝판왕이라 부를 만한 이 놀라운 설정에 거부감을 느낀 독자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걸 망각한 채 미스터리 자체에 빠져들게 될 텐데, 그 이유는 (전작들을 능가하는) 특수설정과 본격 미스터리 서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범인의 정체를 밝히고 범행동기와 방법을 추리하는 본격 미스터리이긴 하지만 탐정도, 범인도 기상천외한 캐릭터로 설정돼있고(초반부터 탐정 역할과 범인 후보군이 곧바로 공개됩니다), 사건들 역시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잔혹하고 기괴한 형태로 벌어져서 초반부터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라는 위화감과 의문에 휩싸인 채 앞 페이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한 진범을 추적하는 과정은 집중력이 필요할 정도로 꽤 복잡하게 설정돼있는데, 거기에다 크고 작은 반전들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1/3쯤 되는 지점부터는 기억할 필요가 있는 대목들을 카메라로 찍어가며 읽어야만 했습니다. 덧붙이자면, 하찮아 보이는 작은 단서, 단역 수준의 인물, 별 의미 없는 풍경이나 공간 묘사조차 나중에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되므로 반전의 쾌감을 제대로 맛보려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됩니다.

 

처음엔 읽는 내내 이런 미친...”이라는 혼잣말을 되뇌었다.”는 편집자의 고백이 과장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실제로 저 역시 읽는 동안 여러 차례 똑같은 마음의 소리를 내지르곤 했습니다. 그리고 시라이 도모유키의 뇌 구조가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도 상상력이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복잡한 설계를 정교하고 완벽하게 마무리한 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읽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만점을 주진 못했지만, 특수설정 미스터리에 조금이라도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진 독자에겐 무조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미스터리도, 트릭도, 전개도 모두 스포일러 금지!”라는 띠지의 카피 때문에 인물이나 내용에 대해 거의 언급하진 못했지만, ‘엘리펀트 헤드는 출판사의 소개글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읽어야 제 맛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예측은 무의미합니다. 함부로 상상하지 말 것.”이라는 홍보카피처럼 뇌와 이성을 무방비 상태로 열어놓은 채 읽어야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온전히, 완벽하게 음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독자에 따라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낄 대목들이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그 부분만 극복한다면 시라이 도모유키의 초강력 특수설정 미스터리의 진면목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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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충증
마리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박하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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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 사립중학교 입시를 앞둔 딸과 함께 고급 맨션에 사는 마미는 겉으로는 평범한 주부 같지만 실은 동생 나미에게 빌린 아파트에서 여러 남자와 난잡한 성관계를 갖곤 하는 성욕 이상자입니다. 어느 날, 관계를 갖던 남자 중 하나가 온몸에 작은 혹이 난 채 기이한 형태로 사망하면서 마미의 삶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더구나 참을 수 없이 성기가 가렵고, 복통과 함께 기생충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가 하면 끊임없이 들려오는 벌레 소리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리고 맙니다. 그러던 중 가족에게 뜻밖의 사고가 벌어지면서 마미의 정신은 완전히 붕괴됩니다. 마미가 쪽지 하나만 남겨놓고 사라진 가운데 남편 다카오와 동생 나미는 마미가 투고했던 소설을 통해 그녀의 난잡했던 사생활을 알게 된 뒤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한국에 출간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은 모두 일곱 편입니다. 일본에서 출간된 작품 수에 비하면 극히 일부만 한국 독자에게 소개된 셈인데, 2016년에 번역-출간된 고충증은 그녀의 데뷔작(2005)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읽지 않고 책장에 방치해온 작품입니다. 읽기 싫어서도, 게으름을 부려서도 아니고, 오히려 아껴 읽고 싶은 마음에 내내 미뤄온 것입니다. 마리 유키코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가 중 한 명인데, 그동안 읽은 작품 대부분에 별 4개만 줬음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찾아 읽은 건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그녀만의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함을 남기는 미스터리) 서사 때문입니다. 인물과 사건 모두 음습하고 기분 나쁘고 악취로 진동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눈길이 자꾸만 끌렸다고 할까요? 표지와 제목 모두 독특하면서도 기괴함을 풍기는 고충증마리 유키코 식 이야미스의 정점처럼 느껴져서 아끼고 또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성욕에 이끌린 지독하고 난잡한 성교, 온몸에 블루베리 같은 혹이 난 채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참을 수 없는 복통을 일으키다가 항문으로 빠져나오는 징그러운 기생충 등 고충증은 상상만 해도 불결함과 혐오감을 자극하는 소재들이 난무하는 야만적인 소설’(일본 평론가 도요자키 유미)입니다. 또한 끈끈한 욕정과 추한 악의가 소용돌이치는 고급 맨션의 위기의 주부들’”이라는 홍보 카피대로 인간의 어둡고 일그러진 내면을 집요하게 포착해내는 마리 유키코 특유의 글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서스펜스 심리물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마지막 반전을 통해 앞서 읽은 이야기들이 완전히 전복되는, 그래서 기생충과 난교와 의문의 죽음과 살인사건이 어떻게 얽히고설킨 것인지를 소름 돋도록 목도하게 만드는 잘 짜인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마리 유키코는 현대의학에서도 그 정체를 확실히 알아내지 못한 고충(孤虫)이라는 기생충에 대해 알게 된 뒤 오랜 시간의 자료조사를 거쳐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명백히 추상적인 개념인 인간의 악의와 욕망을 기생충이라는 구체적이고도 혐오스러운 존재와 결부시킴으로써 누구도 상상해내지 못할 독특한 미스터리를 완성한 셈인데,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읽은 마리 유키코의 그 어느 작품보다도 강렬한 인상과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막판에 미스터리가 해소되는 과정이 지나치게 단조롭고 설명적이라 아쉽기도 했지만, 읽는 내내 말할 수 없는 불쾌감 속에서도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듯한 긴장감과 몽롱함을 만끽한 것은 특별한 경험이 돼줬습니다.

 

첫 챕터가 극단적인 불쾌감을 선사하는 마미의 고백이라면, 두 번째 챕터는 시작부터 뜻밖의 반전을 선보이며 앞서 전개된 마미의 고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어 사라진 마미를 찾는 남편 다카오와 동생 나미의 행적이 미묘한 기류와 함께 전개되고, 잇따라 기이한 형태로 사망하는 인물들이 속출하면서 긴장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또한 고급 맨션에 거주하는 주부들의 수상쩍은 행태 역시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 때문에 독자는 수시로 위화감을 느끼는 것과 함께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좀처럼 가늠하지 못하게 됩니다. 때론 괴담처럼, 때론 심리 스릴러처럼 읽히는 혼란스러운 이야기는 예상 밖의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19금 판정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위가 높은 작품이라 내용에 몰입하기도 전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가 적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마리 유키코의 작품에 익숙한 독자라도 비슷한 경험을 겪을 수 있는데, 그 고비만 넘긴다면 마리 유키코의 진정한 이야미스의 맛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이 무척 아쉽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야미스를 충분히 즐겼으니 나름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이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한 뒤 마리 유키코의 이야미스에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족으로... 2016년에 출간된 책의 오타에 대해 언급하는 게 너무 늦은 뒷북이긴 하지만, 초반에는 잘 보이지 않던 오타가 후반으로 갈수록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많아진 건 무척 유감이었습니다. 인물 이름은 물론 소제목까지 잘못 표기된 건 상식 밖의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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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망자, ‘괴민연’에서의 기록과 추리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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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입니다. 패전 직후 혼란에 빠진 근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민속학과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가 혼재된 독특한 장르를 맛볼 수 있는 시리즈인데, 일본에서는 2021년까지 모두 11편의 작품이 출간됐지만, 아쉽게도 한국에선 2013년에 출간된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을 끝으로(모두 4편 출간) 신간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걷는 망자는 저와 같은 도조 겐야 팬에게는 무척 반가운 작품인데, ‘도조 겐야 시리즈의 스핀 오프라 할 수 있는 연작단편집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도조 겐야의 조수인 젊은 남녀지만, 전국을 떠돌며 괴담을 수집하는 도조 겐야의 행적이 간간이 그려지고 있어서 아쉬운 대로 도조 겐야 시리즈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도쇼 아이는 어릴 적 고향 인근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도조 겐야와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바 있고, 그 덕분에 대학생이 된 현재 학교 도서관 지하에 자리 한 괴이 민속학 연구실’, 통칭 괴민연으로 불리는 도조 겐야의 연구실 겸 장서 보관실에 드나들게 됩니다. 홀로 괴민연을 지키고 있던 건 도조 겐야의 조수이자 대학원생인 덴큐 마히토입니다. 두 사람은 도조 겐야가 수집해서 보내온 괴담의 진상을 토론하고 미스터리를 추리하여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곤 합니다. 재미있는 건 격세유전을 통해 외할머니의 영매 재능을 물려받은 도쇼 아이가 괴이 현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덴큐 마히토는 소심할 정도로 괴담 공포증을 가진 인물로, 괴이란 모두 망상이며 합리적인 추리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도조 겐야가 30대 초반으로 나오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 중반입니다. 외지고 작은 마을이라면 여전히 근대적 풍습과 전설이 잔존해있던 시절로, 도조 겐야가 수집한 괴담들은 하나 같이 현지인들에게는 생생한 공포이자 무시할 수 없는 금기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자의 망령이 돌아다니는 바닷가(‘걷는 망자’), 4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머리 없는 여자의 저주(‘다가오는 머리 없는 여자’), 완벽한 밀실인 곰덫 안에서 내장이 파헤쳐진 채 발견되는 어린이의 시신과 시간이 갈수록 작아지는 깊은 산속 서양식 저택의 비밀(‘배를 가르는 호귀와 작아지는 두꺼비집’), 요괴를 체험하기 위해 스스로를 밀실에 가둔 요괴연구회 멤버가 겪은 의문의 사건(‘봉인지가 붙여진 방의 자시키 할멈’), 그리고 풍토병이 불러온 끔찍한 앙화와 참극(‘서 있는 쿠치바온나’) 등 모두 다섯 편이 실려 있습니다.

 

도조 겐야가 수집한 괴담의 내용이 먼저 소개되고, 괴민연 책상에 마주앉은 도쇼 아이와 덴큐 마히토가 괴담 속 미스터리를 추리하는 형식으로 이뤄져있습니다. 말하자면 추리 과정 자체는 안락탐정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부분의 괴담이 미쓰다 신조 특유의 민속학과 호러가 접목된 으슬으슬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어지는 두 안락탐정의 추리는 로맨틱 코미디 기운이 깃든 코지 미스터리에 가까워서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줄 아는 영매의 재능을 가진 도쇼 아이와 괴이 현상 자체를 부정하며 어떻게든 합리적인 추리를 도출해내려는 덴큐 마히토가 괴담의 실체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벌이는 투닥거림은 로코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기 직전 벌이는 유쾌한 소동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이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되는지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공개되는데, 미쓰다 신조의 다른 작품과 세계관이 연결돼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가 괴이 현상 속에 교묘하게 감춰진 범죄를 밝혀내는 본격 미스터리라면, ‘걷는 망자는 진실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괴담 자체를 텍스트 삼아 실제로 벌어졌을 법한 상황을 추리하는, 말하자면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라는 수준의 추측성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덴큐 마히토가 이런저런 추리를 마구 던지고 도쇼 아이가 깔끔한 논리로 반박하는 가운데 점차 진실이라 여겨지는 지점에 도달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이런 설정도 나름 재미있고 흥미롭긴 하지만, 아무래도 딱 떨어지는 결론이 아니다 보니 독자에 따라 다소 찜찜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현장과 동떨어진 안락탐정 미스터리의 한계겠지만, 가령 이들이 내린 결론 가운데 한두 개쯤 도조 겐야의 반박을 통해 뒤집어지는 경우가 있었다면 조금은 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도쇼 아이와 덴큐 마히토가 이끄는 괴민연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한번쯤이라도 도조 겐야가 특별출연을 해준다면, 아니 도조 겐야까지 포함한 3총사가 활약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면 정말 흥미진진한 시리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계기로 11년 가까이 한국 출간이 중단된 도조 겐야 시리즈가 부활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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