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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헤드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10월
평점 :
정신과 의사 기사야마 세이타의 삶은 평범하지만 행복합니다. 매력적인 아내 기키, 아이돌로 활약 중인 큰딸 마후유, 게임 마니아인 둘째딸 아야카 등 가족들 역시 유쾌한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기사야마는 이 소중한 가족이 언제든 작은 균열 하나로 박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불안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사소한 사건 하나 때문에 현실이 돼버립니다. 가족이 해체된 뒤 절망에 사로잡힌 그의 선택은 마약 딜러에게서 산 위험천만한 약물 시스마. 마지막으로 엄청난 쾌락을 맛본 뒤 삶을 마감하려 했지만, 약물에서 깨어난 기사야마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상황을 목도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소중한 가족들이 끔찍한 형태로 살해당하는 악몽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시작으로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명탐정의 창자’ 등 지금까지 읽은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들은 이른바 특수설정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걸맞게 상상을 초월하는 설정과 기괴한 전개, 그리고 충격적인 엔딩을 선사해왔습니다. 취향의 차이 때문에 읽은 작품들 모두 별 4개만 주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작 소식이 들릴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궁금증 때문에 기어이 장바구니에 담곤 했습니다. (유일하게 못 읽은 ‘명탐정의 제물’ 역시 언젠가는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엘리펀트 헤드’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상상력엔 끝이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정신과 의사 기사야마가 위험천만한 약물 시스마를 투약한 뒤 겪게 되는 가공할 상황과 함께 19금 판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잔인하고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룹니다. 특히 시라이 도모유키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난 독자라면 이 ‘가공할 상황’ 때문에 충격, 혼란, 당혹감, 불쾌감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상상력의 끝판왕이라 부를 만한 이 놀라운 설정에 거부감을 느낀 독자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걸 망각한 채 미스터리 자체에 빠져들게 될 텐데, 그 이유는 (전작들을 능가하는) 특수설정과 본격 미스터리 서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범인의 정체를 밝히고 범행동기와 방법을 추리하는 본격 미스터리이긴 하지만 탐정도, 범인도 기상천외한 캐릭터로 설정돼있고(초반부터 탐정 역할과 범인 후보군이 곧바로 공개됩니다), 사건들 역시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잔혹하고 기괴한 형태로 벌어져서 초반부터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라는 위화감과 의문에 휩싸인 채 앞 페이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한 진범을 추적하는 과정은 집중력이 필요할 정도로 꽤 복잡하게 설정돼있는데, 거기에다 크고 작은 반전들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1/3쯤 되는 지점부터는 기억할 필요가 있는 대목들을 카메라로 찍어가며 읽어야만 했습니다. 덧붙이자면, 하찮아 보이는 작은 단서, 단역 수준의 인물, 별 의미 없는 풍경이나 공간 묘사조차 나중에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되므로 반전의 쾌감을 제대로 맛보려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됩니다.
처음엔 “읽는 내내 “이런 미친...”이라는 혼잣말을 되뇌었다.”는 편집자의 고백이 과장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실제로 저 역시 읽는 동안 여러 차례 똑같은 마음의 소리를 내지르곤 했습니다. 그리고 시라이 도모유키의 뇌 구조가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도 상상력이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복잡한 설계를 정교하고 완벽하게 마무리한 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읽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만점을 주진 못했지만, 특수설정 미스터리에 조금이라도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진 독자에겐 무조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미스터리도, 트릭도, 전개도 모두 스포일러 금지!”라는 띠지의 카피 때문에 인물이나 내용에 대해 거의 언급하진 못했지만, ‘엘리펀트 헤드’는 출판사의 소개글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읽어야 제 맛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예측은 무의미합니다. 함부로 상상하지 말 것.”이라는 홍보카피처럼 뇌와 이성을 무방비 상태로 열어놓은 채 읽어야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온전히, 완벽하게 음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독자에 따라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낄 대목들이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그 부분만 극복한다면 시라이 도모유키의 ‘초강력 특수설정 미스터리’의 진면목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