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증
마리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박하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 사립중학교 입시를 앞둔 딸과 함께 고급 맨션에 사는 마미는 겉으로는 평범한 주부 같지만 실은 동생 나미에게 빌린 아파트에서 여러 남자와 난잡한 성관계를 갖곤 하는 성욕 이상자입니다. 어느 날, 관계를 갖던 남자 중 하나가 온몸에 작은 혹이 난 채 기이한 형태로 사망하면서 마미의 삶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더구나 참을 수 없이 성기가 가렵고, 복통과 함께 기생충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가 하면 끊임없이 들려오는 벌레 소리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리고 맙니다. 그러던 중 가족에게 뜻밖의 사고가 벌어지면서 마미의 정신은 완전히 붕괴됩니다. 마미가 쪽지 하나만 남겨놓고 사라진 가운데 남편 다카오와 동생 나미는 마미가 투고했던 소설을 통해 그녀의 난잡했던 사생활을 알게 된 뒤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한국에 출간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은 모두 일곱 편입니다. 일본에서 출간된 작품 수에 비하면 극히 일부만 한국 독자에게 소개된 셈인데, 2016년에 번역-출간된 고충증은 그녀의 데뷔작(2005)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읽지 않고 책장에 방치해온 작품입니다. 읽기 싫어서도, 게으름을 부려서도 아니고, 오히려 아껴 읽고 싶은 마음에 내내 미뤄온 것입니다. 마리 유키코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가 중 한 명인데, 그동안 읽은 작품 대부분에 별 4개만 줬음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찾아 읽은 건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그녀만의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함을 남기는 미스터리) 서사 때문입니다. 인물과 사건 모두 음습하고 기분 나쁘고 악취로 진동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눈길이 자꾸만 끌렸다고 할까요? 표지와 제목 모두 독특하면서도 기괴함을 풍기는 고충증마리 유키코 식 이야미스의 정점처럼 느껴져서 아끼고 또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성욕에 이끌린 지독하고 난잡한 성교, 온몸에 블루베리 같은 혹이 난 채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참을 수 없는 복통을 일으키다가 항문으로 빠져나오는 징그러운 기생충 등 고충증은 상상만 해도 불결함과 혐오감을 자극하는 소재들이 난무하는 야만적인 소설’(일본 평론가 도요자키 유미)입니다. 또한 끈끈한 욕정과 추한 악의가 소용돌이치는 고급 맨션의 위기의 주부들’”이라는 홍보 카피대로 인간의 어둡고 일그러진 내면을 집요하게 포착해내는 마리 유키코 특유의 글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서스펜스 심리물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마지막 반전을 통해 앞서 읽은 이야기들이 완전히 전복되는, 그래서 기생충과 난교와 의문의 죽음과 살인사건이 어떻게 얽히고설킨 것인지를 소름 돋도록 목도하게 만드는 잘 짜인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마리 유키코는 현대의학에서도 그 정체를 확실히 알아내지 못한 고충(孤虫)이라는 기생충에 대해 알게 된 뒤 오랜 시간의 자료조사를 거쳐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명백히 추상적인 개념인 인간의 악의와 욕망을 기생충이라는 구체적이고도 혐오스러운 존재와 결부시킴으로써 누구도 상상해내지 못할 독특한 미스터리를 완성한 셈인데,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읽은 마리 유키코의 그 어느 작품보다도 강렬한 인상과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막판에 미스터리가 해소되는 과정이 지나치게 단조롭고 설명적이라 아쉽기도 했지만, 읽는 내내 말할 수 없는 불쾌감 속에서도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듯한 긴장감과 몽롱함을 만끽한 것은 특별한 경험이 돼줬습니다.

 

첫 챕터가 극단적인 불쾌감을 선사하는 마미의 고백이라면, 두 번째 챕터는 시작부터 뜻밖의 반전을 선보이며 앞서 전개된 마미의 고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어 사라진 마미를 찾는 남편 다카오와 동생 나미의 행적이 미묘한 기류와 함께 전개되고, 잇따라 기이한 형태로 사망하는 인물들이 속출하면서 긴장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또한 고급 맨션에 거주하는 주부들의 수상쩍은 행태 역시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 때문에 독자는 수시로 위화감을 느끼는 것과 함께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좀처럼 가늠하지 못하게 됩니다. 때론 괴담처럼, 때론 심리 스릴러처럼 읽히는 혼란스러운 이야기는 예상 밖의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19금 판정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위가 높은 작품이라 내용에 몰입하기도 전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가 적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마리 유키코의 작품에 익숙한 독자라도 비슷한 경험을 겪을 수 있는데, 그 고비만 넘긴다면 마리 유키코의 진정한 이야미스의 맛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이 무척 아쉽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야미스를 충분히 즐겼으니 나름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이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한 뒤 마리 유키코의 이야미스에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족으로... 2016년에 출간된 책의 오타에 대해 언급하는 게 너무 늦은 뒷북이긴 하지만, 초반에는 잘 보이지 않던 오타가 후반으로 갈수록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많아진 건 무척 유감이었습니다. 인물 이름은 물론 소제목까지 잘못 표기된 건 상식 밖의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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