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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미궁 ㅣ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4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도조대학 의학부 3학년 덴마 다이키치는 어느 날 거듭된 불운으로 인해 터무니없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의료법인 헤키스이인 사쿠라노미야 병원에 자원봉사자로 위장잠입하여 그곳에서 종적을 감춘 한 남자를 찾는 일입니다. 인근의 도조대학병원과 달리 주로 종말기 의료를 담당하고 있던 그곳엔 안 그래도 최근 불온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덴마를 더욱 긴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잠입 직후 덴마는 아무리 종말기 의료기관이라곤 해도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목도하고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도조대학에서 파견된 간호사 히메미야의 연이은 실수로 덴마는 자원봉사는커녕 환자신세가 되고 마는데, 그의 치료를 맡은 건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피부과 의사 시라토리입니다.
‘나전미궁’은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의 외전으로, 시리즈 1편인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직후에 출간됐지만 내용상으로는 시리즈 3편인 ‘제너럴 루주의 개선’과 연결되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나전미궁’의 알맹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 덴마의 미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헤키스이인 사쿠라노미야 병원에서 종적을 감춘 한 남자를 찾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말기 의료로 유명한 이 병원의 시스템을 조사하는 일입니다. 거듭된 사고로 환자신세가 되고 만 덴마는 어떻게든 미션을 완수하려 애쓰지만 그 전에 보통 병원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쿠라노미야 병원의 운영방식과 기이한 캐릭터를 지닌 의료진들 때문에 연이어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 와중에 수상쩍은 간호사 히메미야와 더 수상쩍은 피부과 의사 시라토리를 만난 덴마는 그들에게서 병원의 실체와 의료진의 비밀을 들은 뒤 과연 자신이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내용도 복잡한데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물론 주 무대인 헤키스이인 사쿠라노미야 병원 자체가 비범하다 못해 기괴하거나 판타지처럼 설정돼서 보통의 메디컬 미스터리와 달리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다만 이 작품의 방점은 ‘종말기 의료의 현실과 폐해에 대한 비판’, 그리고 ‘효율성과 수익만 중시하느라 종말기 의료를 도외시하는 의료계와 정부에 대한 비난’에 맞춰져있어서 사회파 서사와 메디컬 미스터리의 조합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를 가질 만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의학이란 원래 출신성분이 형편없는 존재인데도 지금은 귀부인처럼 행세하고 있어. 웃기지도 않지. 의학이란 시체를 먹고 살아온 빌어먹을 학문이야. 그걸 잊지 말게.” (p297)
정부와 의료계가 돈에 눈이 멀어 정작 세심하게 보살펴야 할 종말기 의료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을 통렬히 비판하는 사쿠라노미야 병원장 이와오의 일갈입니다. 이는 ‘제너럴 루주의 개선’에서 주인공 하야미가 적자를 줄이기 위해 돈이 안 되는 구급구명센터, 소아과, 산부인과를 축출하려는 병원 경영진과 충돌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흐름인데, 현직 의사이자 의료개혁 급진론자인 가이도 다케루의 주제의식이 함축적으로 깃든 문장이기도 합니다.
이와오 원장이 마주한 적은 사쿠라노미야 병원을 위성병원 취급하며 종말기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떠넘겨온 도조대학병원과 부조리한 정책으로 대형의료기관의 편의만 봐주는 후생노동성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선봉에는 이와오 원장의 쌍둥이 딸이자 부원장인 사유리와 스미레가 나섭니다. 서로 판이한 성격인 사유리와 스미레는 ‘시체를 먹고 살아온 빌어먹을 의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배수의 진을 치고 마지막 결전을 다짐합니다.
종말기 의료를 소재로 정부와 의료계를 비판한다는 이야기 자체는 너무나도 구미가 당기지만 ‘나전미궁’은 이야기를 너무나도 비틀고 비튼 탓에 재미와 주제의식 모두 작가의 의도만큼 전달되지 않은 아쉬운 작품입니다. 미션의 주인공 덴마는 코미디 캐릭터 이상의 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소소한 미스터리 해결 외에는 오히려 방관자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이와오 원장으로 대표되는 사쿠라노미야 병원 사람들 역시 지나치게 희화화 또는 불가사의한 캐릭터로 포장된 탓에 정작 그들의 진심이 뭔지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도조대학병원과 결전을 벌이는 이유도, 굳이 비극적인 결말로 폭주하는 이유도 이해불가 또는 공감불가였는데, 그래선지 평범하더라도 선명하고 현실적인 전개가 아쉽기만 했습니다.
‘名品再讀’이라는 이름으로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를 다시 읽었는데, 한국에 마지막으로 소개된 ‘아리아드네의 탄환’(일본출간 기준으로 시리즈 6편)은 다시 읽을 계획이 없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실망감이 크기도 했고, 이 시리즈의 미덕에서 많이 벗어나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는 처음 읽었을 때만큼의 긴장과 흥분을 전해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입니다. 출간된 지 한참 된 작품들이긴 하지만 독특한 메디컬 미스터리를 찾는 독자라면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을 통해서라도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