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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당신이 무사히 타락하기를 ㅣ 나비클럽 소설선
무경 지음 / 나비클럽 / 2025년 6월
평점 :
독특한 역사 미스터리 소설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을 읽고 관심 목록에 올려놓은 작가 무경의 연작단편집입니다. ‘계간 미스터리’ 2023년 가을호 신인상 수상작인 ‘치지미포, 꿩을 잡지 못하고’를 포함하여 모두 네 편이 수록돼있는데, 역설적이면서도 중의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 때문에 무슨 이야기가 실려 있을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인간 영혼의 타락을 기원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즐기다가 끝내 지옥으로 보내고 마는 악마입니다. 단, 이 악마는 ‘악마다운 짓’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타락하는 영혼을 지켜보며 향기로운 악취(?)를 만끽하거나 기껏해야 인간을 딜레마적인 상황에 몰아넣는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짐으로써 한 영혼의 급전직하를 유도할 뿐입니다. 재미있는 건 “인간이 봐도 인간 같지 않은 자들이 있지요? 그런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는 건 내 직업의식이 허락하지 않습니다.”라는 말대로 이 악마는 이미 타락해버린 영혼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타락하는 중인 영혼 또는 절대 타락할 것 같지 않지만 한순간 타락의 길에 들어서는 영혼이야말로 이 악마의 최대 관심대상인 것입니다.
수록된 네 편은 각각 1951년 한국전쟁 중의 지리산, 1992년 휴거 소동 이후 혼란에 빠진 사이비교단, 1987년 민주화 운동 와중의 부산의 폐광, 그리고 독재의 시대였던 1973년의 경찰서 취조실 등 모두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빨갱이 대장 잡기’로 공적을 세우려는 군인들, 휴거가 무산된 뒤 각자도생을 모색하는 교주와 교도들, 폐광에 숨겨진 금괴를 차지하려는 탐욕적인 인간들, 그리고 태연히 고문과 폭력을 휘두르던 경찰 등 네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단순명료하고 급격한 타락이 횡행했던 시대이자, 인간을 극단적인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던 시대를 살아가다가 한순간에 “나약함과 야욕에 휘둘려 타인과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평범한 인간”들입니다.
독자는 악마 앞에서 스스로 타락해가는 인물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악마의 말 한마디에 휘둘려 탐욕과 본성을 드러내는 인물에게선 영화 속 악당의 최후를 지켜보는 듯 통쾌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선지 악마가 들려주는 ‘기묘한 이야기’ 풍의 타락 성공사(?)는 극적인 반전이나 쫄깃한 미스터리 서사 없이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읽히는데, 물론 그 뒷맛은 씁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하지 않는 인생은 가능한가?”라는 출판사 홍보 카피는 이 작품의 뒷맛을 아주 잘 대변하고 있는 문구인데, “스스로 타락하지는 않더라도 난 과연 악마의 속삭임을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자문이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무경의 신작 소식이 들렸을 때는 당연히 ‘마담 흑조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독특한 연작단편집을 만나게 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한동안 책을 읽을 수 없는 형편이 됐지만, 그래도 마담 흑조의 두 번째 이야기가 출간된다면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